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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Jun 21. 2022

우리의 병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넷플릭스 <11월 13일: 파리 테러 그 이후>


2015년 11월 13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유럽의 심장부 프랑스 파리의 공연장과 축구 경기장 등 총 6곳에서 총기 난사와 자살폭탄 공격 등 최악의 동시다발 테러가 발생했다. 하룻밤에 최소 130명이 사망했다. 테러 발생 다음 날,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단체 IS가 성명을 내고 자신들의 소행임을 주장했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11월 13일: 파리 테러 그 이후>, 총 3편으로 구성된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한동안 생각이 많았다. 나는 2015년, 11월 13일, 뭘 하고 있었지. 동네 모퉁이에 있는 로컬 커피숍부터 펍, 바타클랑 라이브 공연장까지, 테러범은 일상을 즐기는 이들을 노렸다. 한국으로 치자면 홍대 일대일 테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애정을 듬뿍 쏟던 홍대 골목 구석구석, 그곳에 연쇄 다발적 테러가 하룻밤에 이뤄져 백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면.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커피숍과 펍, 라이브 공연장이 테러의 대상이라는 것은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이들을 작정하고 노린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는 그 일상이 언제든 생지옥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로 작정했다는 듯. 


파리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테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담담하게 그날 밤, 그리고 그날 밤이 바꾼 그들의 일상, 그리고 현재를 조용히 따라간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파리 테러 생존자인 프렌치의 묘사와 표현, 은유는 철학적이고 또 시적이다. 반드시 ‘테러’에 집중하지 않더라도, 삶의 의미, 커뮤니티의 의미, 그리고 인간의 의미에 대해 상당히 깊은 성찰과 담론이 오간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올랑드도 등장하지만, 당시 파리 시장으로 현재까지 재임 중인 안느 이달고의 인터뷰가 특히 인상적이다. “파리가 상징하는 것, 젊은이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들,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공격이었다.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인데 그걸 공격한 거다. 자유라는 가치,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 이런 것을 공격 대상으로 삼은 거다.” 그녀 역시 이민자 출신으로 세계적인 도시로 꼽히는 파리를 대표하는 자리에 이르렀다.


프랑스 내부적으로는 불경기로 일자리를 잃어 사회에 불만을 품은 이슬람교 이민자가 증가하고 있고, 이를 IS를 비롯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들이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국가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주의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프랑스 국내 정책도 이슬람 과격 세력을 자극한 것으로 꼽힌다. 예컨대 프랑스에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무슬림이 거주하고 있지만, 2011년부터 이슬람 여성들의 전통 의복인 부르카(전신을 가리는 옷)의 공공장소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시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교육청 차원에서 이슬람교가 금지하는 돼지고기 음식을 급식으로 강요하기도 했다.


이 밖에 프랑스가 대외적으로 이슬람 과격주의 척결에 앞장서고 있는 점도 테러의 타깃이 되는 주요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프랑스는 2013년 말리 정부의 요청으로 알카에다 소탕을 위한 공습을 단행했고, 이후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수년째 이슬람 과격주의자들과 싸우고 있다. 또 IS 격퇴를 위해 2014년 이라크 공습에 이어 2015년 9월부터는 시리아에서 공습을 진행했다.


한편, 파리 연쇄 테러 직후 IS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프랑스는 2015년 11월 15일, IS의 최대 본거지이자 심장부인 시리아의 라카를 대대적으로 공습하면서 보복에 나섰다. 여기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11월 20일 “국제사회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슬람국가(IS)의 위협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내용의 ‘IS 격퇴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국제사회의 IS 격퇴 공조 움직임이 강화됐다.


파리 테러 당시 대통령이었던 올랑드를 비롯해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무슬림’이나 ‘이슬람 무장 단체’ ‘IS’ 같은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 보다 테러 이후, 물리적/신체적으로 상해를 입지 않았더라도 그 현장을 목격한 이들의 정신적 고통과 트라우마에 대해 고민했다. 


테러의 주동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우리가 사는 세계는 현재 어디에 있는가? 은밀하게, 동시에 객관적으로 만연된 자본주의의 승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본주의적 권력이 국가의 권력보다 훨씬 강화되어가는 세상에서 점차 다양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고도화되는 제국적 개인 방식을 어떻게 종식할 것인가? 과연 자국이 공격받았다는 이유로 다시 똑같이 반격을 가해 되갚아 준다면, 그 명분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이리 반복되어 오고,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국가, 인종, 성별, 빈부 갈등의 극단적 결과, 테러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는 책을 읽었다. 전 세계 75억 인구 중 20억 성인은 노동에 접근할 수 없고, 그 결과로 시장에도 접근할 수 없다. 세계의 일반론적 관점, 강압적이고 충족된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따르면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유럽 국가들은 마치 이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또는 존재해서는 안 될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소중한 ‘문명화된’ 유럽이 침범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고 부당하다는 식의 선전을 오래전 시작했다. 


세계 인구의 1%가 전 세계 부의 46%를 소유하고, 10%가 부의 86% 이상을 소유한다. 세계 인구의 40%는 소위 ‘중산층’에 속하는 이들인데 세계 부의 14%를 소유한다. 마지막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 50%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빈곤층’이다. 자, 이제 빈곤층과 중산층의 싸움 <오징어 게임>의 시작이다. 중산층의 지상 목표는 오직 빈곤층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를 위해 “우리의 가치를 수호하자”는 선전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의 가치’는 바로 중산층의 서구적 생활양식을 의미한다. 서구 사회의 역사적 교만에 의한 큰 자기만족과 자기 위안, 빈곤층에 속하게 될까 하는 항구적 공포가 이들의 삶을 사로잡는다. 


한편, ‘노동자’도 ‘소비자’도 아닌 것으로 취급받는 빈곤층은 ‘무’로 산정된 허무주의에 빠져 복수와 파괴의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러한 파시즘은 좌절된 서구적 욕망의 이면이며, 마피아 조직의 유연성을 모델 삼아 나름 군사적으로 조직되고, 순전히 형식상으로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띤다. 자본주의와 파시즘은 글로벌 자본주의 구조에 내재한 양면의 얼굴이다.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서구 국가의 제국적 지역화로 파괴된 이슬람 국가는 파시즘의 실질적 형태를 점차 확연하게 드러낸다.


파시즘은 특히 전 세계 갈 곳 잃은 젊은이들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한다. 스스로 임금노동자나 소비, 미래 모든 면에서 변방에 있다고 인지하는 젊은이들이다. “자신을 희생해 서구인을 죽여 영웅이 되어라, 단 한 번이라도 네 하찮게 취급되는 목숨을 가치 있게 희생하라!” 이슬람화의 파시즘화가 아닌, 파시즘의 이슬람화다. 


‘야만’이라는 단어는 서구문화가 이슬람국가를 대상으로 자주 쓰는 단어다. 이 단어는 항상 ‘문명’이라는 단어와 반대되는 뜻으로 쓰여왔다. 야만인과의 전쟁은 야만인과 싸우는 문명인의 전쟁을 의미한다. 그러나 잔혹하고 범죄적인 행위와 관련해 서구의 교만이 문명을 표상한다는 근거는 그 어떤 것도 없다. 


파리 테러의 살인자들은 우리가 품지 못하고 외면하고 버려둔 젊은 파시스트들이다. 좌절된 서구적 욕망의 전형적 산물이다. 젊은 파시스트들은 자기 삶을 산정하지 않기로 했으며, 타인의 삶은 더더욱 산정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전 세계에 암처럼 번지는 허무주의는 때론 자신의 생명을 경시하는 동시에 다른 이의 생명도 중요치 않게 여기는 사회로 물들인다. 


프랑스라는 나라의 가치는 혁명의 전통이었지만, 이젠 더 이상 아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 유럽 국가는 이제 정체성 강한 지식인들의 특별한 집단이 되었다. 전쟁을 선포한 것은 서구권 국가가 ‘야만인’으로 치부하는 그들일까, 제국적 사업에 가담하고 자신의 가치와 이데올로기에 동조하지 않는 국가를 적으로 간주해 파괴해오며 이 상황 전체를 창조한 서구 문명일까. 알랭 바디우가 쓴, 11월 13일 파리 테러에 대한 프랑스 철학자의 고찰: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를 통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다. 내가 살았던 대한민국,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태국에서도 언제든 벌어지고, 또 벌어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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