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ru Dec 29. 2023

예민함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다

미안해하지 말아요. 당신의 예민함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니까.


<The Talks>에서 엠마 스톤은 “For a long time I thought being a sensitive person was like a curse(오랫동안 나는 예민함이 저주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배우가 되어 그 예민함의 힘을 아름답게 발현하기 전까지 그녀에게 예민함은 늘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받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예민한 사람’이라고 대중에 나서 떳떳하게 말하게 되기까지 숱한 자기기만과 자기혐오, 자책으로 괴로워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지극히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민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예민한 사람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본능으로 알아챘다. 나를 둘러싼 세상의 어른들에겐 예민함은 까다롭고 피곤한 골칫덩어리였다. 자신들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나는 늘 거부당했다. 그래서 십 대와 이십 대엔 어떻게든 안간힘을 쓰며 나의 예민함을 없애버리려 안간힘을 썼다. 내 의견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으며 고분고분하게 모나지 않게 튀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다. 언제나 또래 집단과 사회 집단에 둘러싸여 군중 속에 가려진, 아무런 색깔도 찾지 못한 채 회색으로 거무튀튀하게 지냈다. 나의 십 대와 이십 대는 온통 나를 둘러싼 세상과 타인을 살피는 시간이었다. 삼십 대가 지나고부터 그제야 세상과 타인보다 그 안의 내가 차츰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말 그대로 더 이상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가시를 삐죽 세우고 몸을 한껏 웅크린 고슴도치였던 나는 살아갈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야.” 나부터 스스로 변치 않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전히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싶고 부모와 친구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의 한 부분은 이를 뜯어말렸지만, 또 다른 나의 한 부분은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제야 나는 조금 용감해지고, 또 조금 가벼워지고, 또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후, 잡지사 에디터로 수많은 아티스트를 만나 인터뷰하며 나의 예민함을 녹여냈고,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 사이를 방황하다 깨달은 자기 신뢰를 나만의 이야기와 문체로 풀어낸 첫 번째 에세이 <서울에서 도망칠 용기>를 출간했다. 그리고 마흔을 갓 넘긴 나는, 또 다른 예민한 당신에게 주저 없이 말한다. 예민함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라고.





나의 예민함의 기원


‘예민하다(銳敏하다)’는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천성이 슬기롭고 총명하다는 뜻이다. 예민한 사람은 어떤 경험이나 정보를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깊게 처리한다. 또 어떤 자극이 주어졌을 때 더 크게 반응한다.


이 세상 다섯 중 한 명은 예민한 사람으로 태어난다. 외부의 자극에 더 깊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그만큼 뇌가 더 발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예민함은 타고난 기질(출생 전 엄마 뱃속에서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전달된 것)이기에 노력으로 없앨 수 없다.


예민함은 선천적 기질로 물려받기도 하고 후천적으로 발달하기도 한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험악한 시집살이를 했다. 장남인 아빠로부터 대를 이을 ‘아들’ 대신 딸이 나올 것이란 걸 알았던 할머니는 이를 무척이나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그 모든 감정의 배설은 엄마에게 쏟아졌다. 아빠가 아동기에 경험했던 정서적인 상처와 무시, 폭력, 무관심으로 깊어진 예민함의 기질 역시 나에게 이어졌다.


나 역시 태어나 자라며 대대로 물려온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되었고,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젊은 엄마 아빠의 다툼과 폭력 속에서 늘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나 눈치를 봤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우리 집의 불행의 근원은 나 자신이라 생각하며 자아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굳어졌다. 자존감은 바닥이었지만, 자존심은 기괴하게 높았다. 어린 시절, 스스로를 방어하는 유일한 기재가 자존심이었기 때문이다. 예민하지 않으려야 예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집안의 가장이라도 되는 듯 자기 전 가스불을 두 번, 세 번 점검하고, 현관문은 잘 잠겼는지, 다음 날 학교 준비물을 잘 챙겼는지, 물병에 물은 채워져 있는지 등을 수시로 확인하며 강박장애를 키워갔다.



예민함은 특별하다


예민한 사람은 숨겨진 의미와 행간을 잘 읽어내며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의 연결 고리를 본능적으로 찾아내고 그 의미를 깊게 추구한다.


예민한 사람은 감각적으로 미묘한 변화를 잘 캐치한다. 어떤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그 방 안의 분위기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공간을 채우는 이들의 에너지와 감정을 느낀다. 관찰력이 좋은 편이라 몇 번 만난 사람들의 성향도 빨리 알아차린다. 그런 경험들이 누적되어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편이다. 상대에 대한 파악이 잘 되다 보니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얼마나 배려의 고수인가 하면, 내가 상대를 배려함으로써 상대가 느낄 부담까지 고려해 배려를 하는 지경이다. 하지만 배려 감성 지수가 이렇게나 높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상대를 만나면 불쾌해질 수밖에 없다. 모두가 나처럼 배려 깊진 않아도 적어도 무례하진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피해의식으로 나는 늘 소화불량과 불면증, 편두통에 시달렸다.


공감 능력이 높아도 너무 높아 드라마나 영화, 뉴스를 봤을 때 나오는 등장인물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그 사람의 슬픔, 아픔, 두려움, 공포 등을 똑같이 느낀다. 책과 영화, 그림과 같은 예술작품과 자연의 경치에 깊이 감동한다. 그래서 한때는 내가 심리학자나 심리상담사가 되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공감 능력이 너무 높은 걸 알기에 오히려 스스로 선을 긋지 못하고 과도한 공감으로 힘들어할 게 뻔했다. 이를 심리학에선 ‘과잉 공감’이라고 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감정이 나도 모르게 불쑥 들어와 버리는 것이다. 좋은 느낌의 공감 능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나에게 피로하고 스트레스가 되는 감정이다.


예민한 사람은 오감이 크게 발달해 사람이 붐비는 곳이나 어질러진 공간처럼 시각적인 정보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 쉽게 피로를 느낀다. 까슬까슬한 촉감, 진한 냄새, 카페인이나 식품첨가물에도 큰 자극을 받기도 하며, 큰 소리뿐 아니라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시계 초침 소리에도 불편함을 느낀다.


나는 잡지사 에디터로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는 인터뷰를 할 때 예민한 사람의 높은 공감 능력의 덕을 톡톡히 봤다. 인터뷰 장소에 들어서면, 그 공간에 있는 사람 각각의 감정과 에너지를 모두 느꼈다. 서울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도시에서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슬픔과 아픈, 애잔함을 모두 느꼈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쓰러졌다. 감정적 에너지의 소모가 엄청났던 것이다.


그래서 예민한 사람은 혼자 시간을 조용히 보내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 피곤해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예민한 기질을 어떻게든 억누르고 없애는 게 답인 줄 알았던 이십 대엔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곳과 사람 많은 곳을 일부러 찾아다녔다. 그렇게 나를 혹사시키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하면 내 예민함이 무뎌질 거라 믿었던 것이다.


예민한 사람은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잘 느끼고 공감을 잘하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뭐가 필요한지, 지금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저절로 안다. 정말이다. 그 모든 게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냥 눈에 들어와 버린다. 그러다 보니 나를 너무 과도하게 희생하게 된다. 그렇게 안 하면 내가 너무 불편하다. 그 사람의 어려움이 느껴지니 이를 빨리 해결해 줘야 한다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데도 압박을 느끼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한다. 예민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해 도움을 주려 한다고 빈정거리거나 자존심을 상해하기도 하는데, 이는 오해다. 예민한 사람은 오히려 이러한 ‘연민 피로증’ 때문에 계속해서 자신을 희생시키며 스스로 소진되는 ‘기버 번아웃’에 시달린다. 나는 특히 연애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희생하거나 이용당하기 일쑤였다. 나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지킬 수 있는 건데, 그땐 몰랐다. 나를 희생하고 소진해 남을 돕는 예민한 사람들의 ‘평강공주 신드롬(구원자 판타지)’은 상처와 회의감만 남겼다.


예민한 사람은 주변 상황과 다른 이의 기분과 정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친절하고, 배려 깊고, 따뜻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게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인간관계는 언제나 힘들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감정도 느끼는데 하물며 나와 같이 사는 사람, 친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의 감정은 말할 것도 없다. 가족이나 친구,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하면 같이 있기만 해도 나 역시 우울해지는 ‘정서 전염’을 겪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 아빠의 불안과 우울, 무기력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살았다. 감정뿐 아니라 말과 행동, 말투, 그 저변에 깔린 숨겨진 의도, 의미, 뉘앙스마저도 알아챌 수 있으니 또래보다 성숙한 ‘애늙은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으나 정작 내가 느끼는 감정의 실체와 근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아무도 묻지 않았고, 또 궁금해하지 않았다.


외부 자극에 예민한 만큼 자기 스스로에게도 예민하고 엄격한 사람들은 이상적인 높은 기준 때문에 과하게 양심적이고 자기비판에 신랄하다. 실수를 반성하고 성찰적인 태도를 가진 겸손함을 지녔다. 하지만 가끔 겸손함을 넘어 스스로 낮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크단 뜻이기도 하다. 자신을 책망하는 이유는 스스로 더 멋있는 사람이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나는 더 긍정적이어야 해’ ‘나는 더 적극적이어야 해’ ‘나는 더 어른스러워야 해’하며 스스로 정한 기준 이상만큼 다다르지 못하면 전부 쓸모없다고 극단적인 판단을 내려버린다. 흑과 백으로 결론 내리기 좋아하는 완벽주의자이다. 나는 정말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얻은 경험과 혼자만의 방황과 시행착오를 통해 흑과 백 사이의 회색 지대, 정의와 불의 사이의 소심함과 비겁함, 기쁨과 슬픔 사이의 무감각, 진실과 거짓 사이의 침묵 같은 삶의 오묘함을 배우며 깨우쳐갔다.






Sensitive x Fragile


예민한 사람은 센스와 감각이 좋아 예술 쪽에선 적수가 없다. 감각이 워낙 트여있어 뇌 자극을 많이 받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영민한 편이고, 기본적으로 배움에 있어 뭘 해도 중간은 간다. 하지만 예민한 사람은 스트레스에 취약해 깨지고 부서지기 쉽다. 그래서 가진 바 능력은 감각적이고 뛰어난데 한 가지 일에 끝장을 볼 만큼 집중적으로 파고들기에는 유지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초감각 덕분에 뛰어난 센스를 가졌지만, 초감각 때문에 스트레스 취약성도 동시에 높아진다.



예민함을 향한 가스라이팅


“너는 뭐가 그리 예민해?”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들어?” “좀 둥글둥글하게 살아” 예민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안 하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예민함’을 상대방을 비하하거나 공격할 때 주로 쓴다. 예민한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노력해도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라고? 그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 주면 안 될까? 예민해서 좋은 점도 많은데. 단순히 모든 걸 희미하게 뭉뚱그려진 "예민하다"라는 이유로 가족에도 사회에도 거절당하는 느낌이다.


예민하지 않은 사람들이 예민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이유는 대부분 이렇다. 예민한 사람들은 서두르는 것을 싫어하고 일을 더 신중하게 처리해 답답하고 융통성이 없다,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별거 아닌 것에 상처를 잘 받는다, 늘 부정적이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하다, 자기 생각대로 하려고만 하고, 성격이 둥글둥글하지 못하고 날이 서 있으며, 감정적으로 대응한다, 강박증에 완벽주의자다, 마음이 너무 여리고 약하다 등등.


사회에서 예민함은 부정적 의미이다. 하지만 이건 예민하지 않은 사람들 시선과 입장과 기준에서 하는 말일뿐이다. 예민한 사람인 내 기준에서 보면 사람들은 너무 무심하고 무디고 무례하다. 배려 없이 사려 깊지 못하게 대충대충, 둥글둥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다 서두르고 실수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 실수를 하고도 제대로 된 반성이나 사과도 없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수히 상처를 주면서도, 상처를 줬는지조차도 눈치채지 못한다. 상처받은 예민한 사람들은 그걸 입 밖으로 내지도 않으니까.


예민한 사람들은 안다. 자신의 예민한 기질이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게다가 예민하고 공감 능력이 높으니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면 되는지 잘 알고 있다. 사회가 원하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유별나고 예민하다는 말 안 들으려고, 내 고유한 기질을 감추고 산다. 그러다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 마음에 병이 든다.





예민함의 힘


예민함은 하나의 특성이고, 능력이고, 재능이다. 나의 예민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전에 스스로 충분히 인지하고 자랑스러워하라. 예민하다는 건 유별난 게 아니라, 유난 떠는 게 아니라, 정보나 경험을 깊이 처리하는 뇌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예민함이 자랑스럽다. 이 세상이 나를 못 받아들인다고 해서 내가 잘못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상 사람 다섯 중 하나가 예민한 사람들인데 그렇지 않은 무심한 사람들을 배려하느라 대부분 자신의 기질을 억누르고 숨기고 속앓이 한다는 걸 <서울에서 도망칠 용기> 출간 후 수많은 피드백을 받으며 알았다.


예민함은 강력하고 창의적이며 타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다. 나는 내 능력을 감추는 대신 제대로 가꿔보기로 했다. 외부 자극으로 가득 찬 감정의 양동이는 수시로 자주 비워내고, 감정의 포화상태를 경계하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무심하고 무례한 사람들과는 선을 긋기로 했다.


“넌 누굴 닮아 그렇게 유별나니?” “네가 너무 민감하고 예민한 거야” 아이러니하게도 이 얘길 가장 많이 들은 건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가족으로부터다. 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로 했다. “아니, 나는 유별나고 이상한 게 아니라 특별한 거고, 이건 나의 특성이야. 나를 이해하기는커녕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무심하고 무례한 당신들이 문제야” 스스로 말해주기로 했다.


가스라이팅을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렸을 때부터 내 성격의 단점이나 고칠 점을 묻는 질문엔 언제나 ‘예민함’이라 답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내 특성을 단점이 아닌 장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를 더 깊이 이해하는 시간과 나에게 더 관대해지는 배려가 필요하다.


예민함은 특별하다. 나는 외부의 자극을 강렬하게 받아들이고, 현상을 깊게 사고하며, 열정적이고 멋있는, 지적이고 공감 능력이 높은, 이해심 많은 사람이다. 나는 나의 예민함으로 남들이 못 듣는 소리를 듣고, 못 보는 것을 보고, 못 맡는 냄새를 맡는다. 나의 예민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과 감정을 공감한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다이빙을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잘 듣고 살피는 건 나에겐 노력 없이 저절로 이뤄지는 재능이다. 누군가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게 나에겐 그저 타고난 능력이다.


내 유별남을 건강하게 드러낼 수 있고, 또 나의 예민함을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커뮤니티를 잘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 내 존재의 특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는 사람은 내 인생에 없어도 되는 사람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잔뜩 세우고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고슴도치의 가시를 다 뽑아 버리고 무력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무심하고 게으르고 무례한 사람들, 나에게 수치심을 주고, 가스라이팅하고 이용하려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가차 없이 끊어도 된다. “좋은 사람으로 남지 마라”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기로 한다.


섬세하게 디자인된 하이퀄리티 기능이 탑재된 기계는 그 기계의 활용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지만, 사용법을 잘 아는 사람을 통해 좋은 성과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나를 잘 헤아리고 보듬고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고슴도치로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예민한 사람들이여, 그대 역시 자신의 예민함에 원망 말고 감사를 보내길. 예민함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니까.






[참고 자료]

정신과 의사, 니시와키 슌지 <예민한 사람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작은 습관>

정신과 의사, 전홍진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한동훈이 좋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