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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Jun 05. 2024

세상의 모든 미성숙한 어른들을 위한 동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에릭>


지난 5월 30일, 올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기대작 중 하나였던 <에릭>이 공개되었습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비 호프만 주연에 에미상을 수상한 애비 모건이 대본을 썼습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이 작품의 주연뿐 아니라 총괄 프로듀서로도 참여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공개 이후 넷플릭스 시리즈 글로벌 1위에 올라섰고, 제 예감엔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킬 것 같네요. 


<에릭>이 공개되면서 이 시리즈가 실화에 바탕을 두었는지 구글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고 하는데, 제작진은 이 이야기가 허구라 밝혔습니다.     






시놉시스

1980년대 뉴욕,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빈센트(배네딕트 컴버배치)는 <세서미 스트리트> 스타일의 어린이 TV 인형극 프로그램 <굿 데이 선샤인>의 제작자입니다. 정신장애와 중독으로 불안정한 행동을 이어가던 빈센트는 점점 가족과 친구, 동료로부터 멀어집니다. 아홉 살 난 그의 아들 에드거의 실종과 함께 빈센트의 삶에 ‘에릭’이 실체를 드러냅니다.      







영국식으로 풀어낸 미국 이야기

개인적으로 뉴욕의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리즈를 영국인 제작진이 만든다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가비 호프만을 제외하고 배네딕트 컴버배치와 대부분의 제작진이 영국인입니다). 영국 시리즈는 미국 시리즈에 비해 이야기를 질질 끄는 걸 싫어합니다. 가끔은 과감한 비유와 생략으로 미국 시리즈의 매끄러움을 일부러 비켜 가기도 하죠. 총 6편의 에피소드로 만들어진 영국 심리 스릴러 <에릭>은 전형적인 미국의 범죄 스릴러와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상업적 계산보다는 메시지에 집중하는 낭만적인 면도 있습니다. 시즌 2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감독이 공개된 시즌의 반응을 봐야 한다(수익을 체크해봐야 한다)고 말하는데, 루시 포브스 감독은 “이미 내가 원하는 엔딩이 나왔다”라며 딱 잘라 버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국 드라마의 바이브를 좋아합니다. 시대와 배경, 상황에 잘 붙는 사운드트랙도 좋습니다. 


     

배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영국 시리즈 <패트릭 멜로즈>



언제나 빛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영국 시리즈 <셜록>으로 많은 한국 팬들에게 사랑받았지만, 이후 어린 시절 학대받은 자기혐오적인 중독자를 연기한 영국 시리즈 <패트릭 멜로즈>에서 그의 연기는 더욱 빛이 납니다. 컴버배치는 인간의 결핍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훌륭하게 표현하는 보기 드문 배우입니다. 시대와 배경, 상황이 다를 뿐 <패트릭 멜로즈>와 <에릭>의 두 캐릭터는 뿌리를 같이 하고 있네요.      




80년대 뉴욕의 금수저 출신 빈센트는 부동산 개발업을 하는 부호 아버지를 증오하는 재능 넘치고 자의식 강한 아티스트입니다. 강압적이고 물질주의적인 부모로부터 받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도시에서 몰아내고 부자를 위한 도시를 만드는 아버지의 일을 역겨워하며 그 모습을 닮은 사회를 혐오하고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냉소적인 사람이죠. 아들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아들의 말엔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도 노숙자가 된 퇴역 군인에겐 다정한 말과 함께 적선을 하는 모순된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매 작품마다 깊은 캐릭터 분석과 연기력으로 호평을 받는 배우로 유명하지만, <에릭>에서 그는 전형적인 아메리칸으로 외모부터 억양까지 모든 것을 바꿔야 했던 영국인 배우로서의 고충을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는 멋지게 성공합니다. 그는 <에릭>의 빈센트로 이번에도 완벽하게, 그리고 멋지게 변신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80년대의 카르마
 

<에릭>은 ‘Home’과 ‘가족’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경찰과 행정, 정치가 부정부패와 유착에 물들기 시작하는 80년대 뉴욕이 배경입니다. 빈센트의 아들, 에드거의 실종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점차 번잡스러운 뉴욕 도심으로 번져갑니다. 개인의 삶과 시대적 배경이 씨실과 날실처럼 엉켜 결국 하나의 거대한 검은색 비닐봉지 안에 묶이는 나비효과 같은 이야기죠.     






“Be good. Be kind. Be brave. Be different! (착하고, 친절하고, 용감하고, 달라져야 한다!)”라고 외치는 <굿 데이 선샤인>의 인형들과는 달리 평상시 빈센트는 잔인하고 냉정하며 냉소적입니다. 빈센트는 9살 아들 에드거의 일상을 모험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놀라운 창의력을 가진 반면, 아이를 무자비하게 판단하고 몰아세우며 불가능할 정도의 높은 기준을 들이대며 잔인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에드거의 실종을 계기로 빈센트의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기질은 직장을 넘어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하는 가정에까지 영향을 끼치죠.      



80년대 뉴욕은 탐욕과 권력, 기업 자본주의,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거리 구석구석 스타벅스가 들어서기 바로 직전, 거친 70년대에서 벗어나고 있었죠. 과도기의 한가운데에서 도시의 사람들은 벼랑 끝에 서 있었습니다. 화려한 디스코볼과 불빛, 음악, 부동산 개발, 경제 성장의 이면에 가려진 에이즈, 노숙자, 동성애 혐오, 약물 중독, 정신 질환, 인종차별 문제, 화이트칼라 범죄 등의 문제가 점점 모습을 드러냅니다.      



<에릭>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존재인 한 개인, 자아로부터 시작해 가족, 커뮤니티, 사회, 공권력, 행정, 국가로 그 탐구의 시선을 확장합니다. 80년대 미국 중산층 가장인 빈센트의 중독과 자기혐오의 함정을 파헤치는 동시에 부패한 정책과 제도, 리더십, 그리고 부패한 성장의 시스템적 문제, 사람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적 탐욕으로 인한 부당한 현실을 다룹니다.      


2024년,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죠. 우리는 여전히 80년대에 뿌린 것을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오늘날 여전히 그 씨앗을 뿌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가 될 자격이 있는가?

아들의 하굣길, 집으로 가는 길에 누가 더 빨리 뛰나 내기를 하는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에게 져주지 않습니다. 부자지간, 모녀지간에 눈에는 뚜렷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강압적인 권위의식, 경쟁, 시기, 질투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에릭>은 관대하고 자애로운 부모가 되기엔 한참 모자란 어른들에게 ‘우리는 과연 따뜻하고 사랑 가득한 ‘Home’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80년대 뉴욕은 겉으로 보이기엔 잘 정돈된 듯 보이지만 그 속은 혼돈과 부정으로 가득합니다. ‘나쁜 아버지’들로 넘쳐나는 세상과 경찰, 부동산업계, 정치를 아우르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 도시의 내부에서 썩어 들어가는 권위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대물림되는 시스템과 학대, 폭력, 나르시시즘에 아이들은 내몰립니다.      


마지막 에피소드, 빈센트는 그의 아버지를 만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공유합니다. <굿 데이 선샤인>이라는 제목은 그가 아버지와 함께 프렌치토스트를 먹으러 가던 길, 아버지가 공원을 걷다 한 말이었죠. 그리고 “더 이상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영원히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그의 아버지는 끝내 미안하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못합니다.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습니다. 빈센트는 그제야 ‘아들’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빈센트는 그렇게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진 후에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됩니다.   


        




차별과 편견의 나비효과

실종된 지 11개월이 지나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흑인 아이 말론을 찾는 실종전담반 흑인 형사 마이클도 있습니다. 그는 경찰 조직 안에서도 늘 외부인 취급을 받습니다. 그는 흑인일 뿐 아니라 동성애자이고 그 당시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던 에이즈에 걸린 파트너를 돌보며 시간을 보냅니다. 반면, 도시의 영향력 있는 부동산 큰손의 손자이자 백인인 빈센트의 아들, 에드거의 실종 사건은 연신 뉴스에 대서특필됩니다. 선량하고 정의로운 형사 마이클은 피부색만으로 에이즈의 근원이라 오해받고, 소아성애자 전과를 가진 백인은 시스템의 보호를 받으며 어린이 TV 프로그램을 만들며 삽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빈센트의 아들 에드거는 도시에서 가장 어둡고 소외된 지하 세계를 안식처로 여깁니다. 에드거를 찾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백인에 중산층인 빈센트는 평생 한 번 내려가보지 않을 곳이었죠. 사회의 모든 것은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죠. 우리 발 밑에도 사람이 삽니다.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에릭>에서 진짜 ‘괴물’은 과연 누구일까요? 80년대 뉴욕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크고 파란 인형일까요? 아니면 에릭을 만든 사람의 내면일까요? 아니면 에릭을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일까요?     


빈센트에게 환영처럼 나타난 괴물 ‘에릭’은 보호자이자 그림자 같은 존재이자 친구입니다. 에릭은 빈센트의 죄책감이나 수치심, 주위로부터 들려오는 비난의 목소리, 스스로 박해하는 내면의 비평가, 방귀 뀌고 트림하고 조잡하고 지저분하고 충동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에릭은, 훨씬 더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아들을 찾기 위한 기괴한 여정에서 빈센트가 어떤 주파수로 조율하느냐에 따라 에릭은 그에 맞게 진동합니다. (시리즈에서 낮고 거친 에릭의 목소리는 모두 컴버배치가 연기했습니다.)     


'에릭'의 탄생 과정 ⓒ 넷플릭스 <에릭>


시리즈 내내 80년대 스타일의 스퀘어 쉐입 안경을 쓰고 등장하던 배네딕트 컴버배치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에릭 인형 탈 안에서 안경 없이, 특유의 푸른 맨 눈을 드러내며 연기할 때 그는, 에릭이 됩니다. 

      

“내가 바로 그 괴물이야. 바로 나야.”     


아들을 찾는 여정을 마친 빈센트가 재활원에 들어갈 준비를 하며 캐시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 한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에드거의 실종에 대한 동기를 찾기 위해 괴물을 찾지만, 그 괴물은 바로 빈센트 안에 있는 에릭이었습니다.           






여전히 내면을 찾아 여행하는 미성숙한 어른들

빈센트는 아들 에드거를 찾기 위해, 마이클은 실종 소년 말론을 찾기 위해 평행선을 달립니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달립니다. <에릭>은 세상의 모든 미성숙한 어른들의 내면의 아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빈센트는 아들을 찾는 여정 속에서 아들 에드거가 그에게 준 교훈, 즉 ‘자녀의 말을 경청하고 관찰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에드거에게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빈센트는 이제 에드거가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때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엔딩 씬에서 에릭 인형 의상을 입은 에드거에게 빈센트는 아이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에릭의 소유권을 넘깁니다. ‘아버지가 된다’라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즉 바통을 넘겨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자격이 있는가?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자고 하면서도 스스로 바꾸지 못한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정치인의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 또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의 시위 행렬 속에서 에릭 인형 탈을 쓴 빈센트가 소리칩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Home’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에릭>은 왜 특정인에게만 해피엔딩이 허용되는지 묻습니다에드거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말론은 그러지 못했죠. 2024년에 돌아보는 1980년대의 뉴욕, 그때 손쓰지 못한 것들의 결과를 우리는 지금 마주하고 있습니다.      


<에릭>은 우리가 서로를, 그리고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을 때, 정부와 조직이 실패했을 때, 그리고 가족과 결혼이 실패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에릭>은 내면의 어둠 깊이 침잠하고 깨어난 빈센트처럼 우리를 어둠 속으로 깊이 데려갑니다. <굿 데이 선샤인>에서 인형 탈 뒤에 숨어 “착하고, 친절하고, 용감하고, 달라져야 한다!”라고만 외치는 것보다 선량하고 다정한 용기와 행동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는 걸 조심해야 한다.’

- 니체     


<에릭>의 허물 많은 가장 빈센트에게, 사회의 강압에 짓눌린 흑인 형사 마이클에게, 부당하고 폭력적인 시스템에 아들을 잃은 말론의 어머니 세실은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을 위해 ‘사랑(LOVE)’과 ‘희망(HOPE)’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며,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나와 여러분에게, “DO BETTER(더 잘하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최근 대한민국의 채해병 사건을 보면서 거대 권력 앞에 선 한 사람의 선량함과 용기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우리 사회가 이 철학과 가치를 얼마나 무참히 짓밟고 있는지, 미성숙한 어른들의 탐욕과 거짓으로 다음 세대에 독처럼 퍼져갈 결과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정훈 대령 ⓒ 시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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