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하나 Jul 23. 2024

지금 우리 꼴을 보세요!

5년 전 공개된 시리즈 <이어즈 앤 이어즈>를 다시 꺼내본 이유.


HBO와 BBC가 공동 제작하고 한국에선 왓챠플레이에서 만나볼 수 있는 <이어즈 앤 이어즈>는 <닥터 후>로 대표되는 영국 TV 시리즈의 거장 러셀 데이비스가 각본을 쓴 디스토피아 공상과학 리얼리즘 시리즈입니다.      

2019년 공개 당시 영국 시리즈 <블랙 미러>와 <웨스트월드>에 미국 가족 드라마 <디스 이즈 어스>를 절묘하게 섞었다는 호평을 받으며 영미권에서 매우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죠. 2019년부터 2034년까지 약 15년의 시간을 담은 6편의 에피소드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과 영국의 브렉시트, 중국의 패권주의, 유럽 각국의 극우화, 기후재난, 난민 문제 등 격동하는 국제 정세와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등장, AI의 등장과 기술의 발전이 영국의 한 평범한 중산층 가족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이야기합니다.  

 

   

2024년, 바이든에 의해 재선에 실패했던 트럼프가 재등장해
다시 미국 대통령 자리에 앉느냐 마느냐를 이야기하며
프랑스의 극우가 득세하는 총선을 지켜보고,
이상기후 위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자니
5년 전 <이어즈 앤 이어즈>가 예견한 가까운 미래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 같아 다시 꺼내 보았습니다.

   


ⓒ 이어즈 앤 이어즈 / 왓챠플레이



<이어즈 앤 이어즈>에는 엠마 톰슨과 로리 키니어, 러셀 토비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연기파 영국 배우들이 등장합니다. 흥미롭고 탄탄한 각본은 물론 탁월한 캐릭터 묘사와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현대 정치적 불안에 대한 탐구로 찬사를 받은 <이어즈 앤 이어즈>는 제10회 크리틱스 초이스 TV 어워드에서 최우수 시리즈,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부분에 후보로 올랐습니다.  


    

<이어즈 앤 이어즈>

      


6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한 시즌이 전부인 <이어즈 앤 이어즈>는 첫 에피소드부터 속도감 있게 작품의 대담함과 예지력, 시각적 매력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습니다. 여느 공상과학이나 퓨처리즘 작품들과는 달리 시리즈는 아주 가까운 미래, 또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너무나도 그럴듯한 미래를 아주 리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평범한 중산층 가족이 겪는 아주 가까운 미래 ⓒ 이어즈 앤 이어즈 / 왓챠플레이



<이어즈 앤 이어즈>는 영국 맨체스터에 사는 평범한 중산층 라이언스 가족을 따라갑니다. 라이언스 가족의 장남이자 은행가에서 일하는 스티븐은 세무사로 일하는 아내 셀레스트와 두 딸과 함께 사는 중산층입니다. 그의 동생 다니엘은 정부 주택 담당 공무원으로 랄프와 결혼한 게이인데, 그의 남편 랄프는 세균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지구가 실제로 평평하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여전히 911 테러는 일어나지 않았다거나 코로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 많죠.)       


전 세계적으로 우익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트럼프는 재임 중이며 대형 은행은 파산하고 반이민주의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AI와 테크놀로지 덕분에 가족들은 언제 어디서든 그룹 통화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에서 트럼프는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날 핵 발사 버튼을 누르고 세계는 혼란에 빠집니다. 라이언스 가족 중 활동가로 전 세계를 누비는 이디스는 핵이 떨어진 중국의 인공 섬 근처인 베트남에 있다가 핵폭발로 폐허가 된 장소를 촬영하다 피폭됩니다. 기대수명이 현저히 줄어든 그녀는 이 사실을 숨기고 영국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죠.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고, 비극은 반복됩니다. 영국에선 비비안 루크라는 우스꽝스러운 인물이 TV에 출연해 사이다 발언을 하며 인기를 끌더니 급기야 당을 만들고(그녀가 하도 방송에서 ‘F**k’을 외쳐서 방송사가 ‘****’으로 처리하자 정당 이름을 ‘4 stars’로 짓죠) 총리가 됩니다. 2019년 이 시리즈 공개 당시 영국의 총리 보리스 존슨을 풍자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뚜렷한 이념도 정책도 없지만 사람들이 듣고 싶은 '사이다 발언'만 골라가며 총리까지 된 루크 ⓒ 이어즈 앤 이어즈 / 왓챠플레이



스티븐과 다니엘은 트럼프의 포퓰리즘이나 영국의 브렉시트, 유럽의 극우화에 열광하는 대중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영국식 냉소와 조크로 투덜대며 불평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죠. 은행가에서 일했던 스티븐은 세계적인 은행권 붕괴로 직장을 잃고 자전거 배달 일을 합니다. AI의 등장으로 역시 고수익이었던 일자리를 잃은 세무사 셀레스트 역시 두 딸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죠. 

   


세계은행의 붕괴로 모든 돈을 잃고 자전거 배달 일을 하는 스티븐 ⓒ 이어즈 앤 이어즈 / 왓챠플레이




경제가 무너지고, 지구의 마지막 만년설이 녹고, 영국엔 3달 내내 비가 오고, 러시아 전쟁으로 동유럽에선 난민이 파도처럼 들어옵니다. 그사이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선 손에 휴대폰을 이식하는 기술이 등장하고 인간의 뇌를 데이터로 업로드해 육체를 벗어나 영원히 살 수 있는 ‘트랜스휴먼’이 그들의 위시리스트가 됩니다. 


척추 이분증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난 로지는 학교 급식 매니저로 일하다 AI의 등장으로 일자리를 잃고, 이후 어렵게 푸드 트럭 사업에 도전하지만 그녀가 지지했던 비비안 루크가 총리가 되어 서민 생활에 반하는 정책을 펴면서 불합리한 취급을 받습니다. 영국으로 몰려드는 이민자를 탄압하는 루크 총리의 혐오스러운 정책으로 결국 다니엘은 목숨까지 잃게 됩니다.     



루크가 재밌다는 이유로 열렬히 지지했지만 결국 그녀가 총리가 된 이후 펼친 반서민·반이민정책으로 경제적으로 고립되고 결국 가족까지 잃는 로지 ⓒ 이어즈 앤 이어즈 / 왓챠플레이








<이어즈 앤 이어즈>는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나비효과처럼 그 일로 인해 벌어질 파급 결과, 우리가 깨어나지 않으면 아주 가까운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경고하는 경각심으로 가득한 작품이지만 한편으로는 이토록 미쳐버린 세상을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비춥니다. 냄비 속 개구리처럼 사람들은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속에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노력합니다. 정치적인 일이나 지구 반대편의 사건이 어떻게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야 마는지를 <이어즈 앤 이어즈>는 덤덤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나에게만은 절대 생기지 않을 일’이라며 낙관주의에 물들어 평소 희망에 차 있던 인물들이 세상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한순간에 깨닫거나 자신이 이 시대에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은 오히려 더 설득력을 얻습니다.     

 


정치에 대한 신뢰를 잃고 언제나 행동하는 활동가 이디스 ⓒ 이어즈 앤 이어즈 / 왓챠플레이



<이어즈 앤 이어즈>와 비교되는 <블랙 미러>와 <웨스트월드>는 제작자 모두 영국인입니다. 영국은 ‘이 빠진 호랑이’ 취급을 받으며 과거 세계를 호령했던 영광의 기억에 갇혀 있습니다. 영국인의 역사와 기억, 의식 속에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세계 무대에서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무기력감에 빠져 있죠. 그래서 <이어즈 앤 이어즈>는 영국을 더 이상 역사적 흐름의 변화를 일으키는 영웅이 아닌, 극복할 수 없는 미국과 중국의 힘을 그저 견뎌내야 하는 밀물처럼 묘사합니다.       



모든 건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입니다 ⓒ 이어즈 앤 이어즈 / 왓챠플레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됩니다. <이어즈 앤 이어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여정은 매일매일 지옥에 가까워지지만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역사를 살아갑니다. 핵을 쏘고, 극우 민족주의가 득세하고, 유럽이 몰락해도 라이언스 가족은 여전히 매년 돌아오는 할머니의 생일에 함께 모여 축하합니다. 사람들, 우리에게 결국 매일매일은 그저 지속되는 삶이니까요.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 노트르담은 복원되었지만 피사의 사탑이 무너지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스마트폰 때문에 극우 독재의 어두운 면이 빛에 의해 드러나기도 합니다. 세상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 같다가도 이내 균형을 유지합니다. 


영국 정부가 비밀리에 진행하던 난민 학살을 막고 이를 생중계하는 이디스 ⓒ 이어즈 앤 이어즈 / 왓챠플레이




이 시리즈의 대본을 쓴 데이비스는
‘우리가 각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이미 수많은 서유럽 국가가 극우 민족주의화 되어 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굳이 유럽으로 갈 필요도 없죠.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세요.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보자고요.     

 

2024년 현재, 광대 같은 극우 포퓰리스트 보리스 총리로 뼈저린 실패와 수치를 경험한 영국은 마침내 노동당 총리를 선출했고, 1차 투표에서 극우 정당이 선두를 달렸던 프랑스 총선은 다행히 2차 투표에서 이를 저지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또다시 트럼프의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가 광대처럼 가볍게, 아니 어쩌면 치밀하게 계획되었을지 모를 한마디로 미국이 반으로 갈라지고 멕시코 국경에 벽이 세워지고 수많은 흑인과 유색인종이 목숨을 잃었으며 여성이 강간을 당해도 낙태할 수 없는 법이 만들어지는 것을, 그리고 그 영향이 전 세계로 뻗어 나아가는 걸 우린 이미 지켜보았는데도 말이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비트코인이 오르기에,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면 세금이 낮아져 지지하는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수와 세가 막강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반대편에서 무너지는 댐을 막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아질 때 우리는 공멸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나와 상관없는 일 같아도 어떻게든 결국 영향을 끼치고야 말 겁니다. 


2024년, 우리는, 그리고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 이어즈 앤 이어즈 / 왓챠플레이


                         





매거진의 이전글 평범한, 진저리 치도록 너무나 평범한 ‘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