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소리 한 번 내는 것조차 어려운 세상이다. 게다가 ‘잘’ 한다는 건 더 어렵고, 그래서 귀하다. 올해를 보내기 전 지나쳐버리기엔 아까운 인디 뮤지션을 만났다. 이들은 당신의 눈엔 보이지 않아도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이 가까이 있다.
EDITOR 조하나 PHOTOGRAPHY 김보성
우아함과 고통의 시간은 비례한다는 것을, 수려함과 노력의 정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은, 세상과는 관계없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호랑이 같은 청춘들. 홍대 라이브 신과 인디 음악 신에서 이미 잔뼈가 굵은 이들이 새로운 밴드로 모였다. 로로스의 기타리스트 진실과 칵스의 베이시스트 박선빈, 재즈 드러머로 활동하던 임상욱, 호랑이띠 동갑내기인 세 친구들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최적의 균형감을 선보인다. 밴드 이름처럼 인생과 시간을 사유하는 밀도 깊은 가사가 공간감과 입체감이 살아있는 소리의 우주를 떠다닌다. ‘어떻게’ 노래하는지 보다 ‘무엇을’ 노래하는지가 이들에겐 더 중요한 화두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이십 대의 끝자락 밴드로 뭉쳤다. 이전의 밴드 활동과 비교하면 어떤가?
선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편하고 좋은 부분이 많다. 나도 20대 초반부터 밴드를 해왔고 진실이도 마찬가지였는데, 각자 어렸을 때부터 밴드를 하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 봐서 그런 지 지금 좀 더 나이가 들고 밴드를 같이 하니 여러 가지 트러블을 조율하는 게 훨씬 더 수월해진 것 같다. 오히려 밴드 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게 인관 관계인데 한국에선 멤버들이 나이 차이가 나면 좀 애매해진다. 서로 대놓고 말하기도 뭐 하고. 우리 셋은 동갑이라 차라리 불만이 있으면 더 시원하게 싸워볼 수 있다.(웃음)
라이프 앤 타임의 본격적인 출발은 언제였나?
진실: ‘같이 밴드 해보자’는 말은 계속하다가 구색을 제대로 갖추고 합주를 시작한 건 작년 말쯤이다.
박선빈이 있었던 칵스는 한국에서 젊은 밴드로서 방점을 찍은 슈퍼 밴드였다. 한편 진실이 몸담고 있는 로로스는 포스트록 장르 특성상 대중과의 거리가 가깝고 친밀한 편은 아니었고.
진실: 아무래도 노래가 하도 길어서.(웃음)
드러머 임상욱은 오랫동안 재즈를 했다.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세 친구가 밴드로 모였을 때 어떻게 하리란 그림이 있었을까?
선빈: 초반에 뭔가 정해놓고 시작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장르도 없었고. 기타, 베이스, 드럼에 노래를 하는 밴드 정도?
진실: 그러니까 우린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은 거다. 하나의 밴드만 하는 것보다 우리가 음악적으로 가지고 있는 다양한 면을 보여주고 싶은 거지. 칵스와 로로스, 재즈와는 전혀 다른 모양새가 나왔고 우리도 결과물에 꽤 만족을 하고 있다.
노래하는 진실의 모습을 보고 그동안 그 끼를 어떻게 참았나 했다.(웃음)
진실: 로로스는 로로스대로 장르적인 매력이 있고 배울 것도 많지만 라이프 앤 타임에선 또 다른 느낌을 표현할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공연을 하다 보면 신이 난다.
선빈: 스무 살 때였나? 군입대 전 판을 크게 벌여 공연을 했는데 진실이가 거기서 노래를 했었다. 그 기억이 인상 깊어 라이프 앤 타임에서도 진실이가 노래하면 좋겠다, 했다.
거의 10년 가까이 지나 함께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니 기분이 어떤가?
선빈: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땐 신기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가사가 특히 좋았다. 요즘엔 아무도 말하지 않은 것들이다.
진실: 가사 같은 경우 정말 고민을 많이 한 부분이다. 우리는 어떻게 보여주느냐 보다 무엇을 얘기할 건지에 대해 항상 집중하려고 한다. 우리의 입장으로 말할 수 있는 무엇. 이게 라이프 앤 타임이 다른 밴드와 구분될 수 있는 색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운드의 질감 자체도 공간감이나 입체감이 많이 느껴진다.
진실: 맞다. 초반에 우리 밴드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할까, 하다가 아예 우리가 장르를 새로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해서 ‘아쿠아 록’으로 밀어보자 했었다.(웃음)
물속에 잠겨있는 듯한 느낌?
진실: 맞다. 가사 내용에도 물 이야기가 많다. EP 첫 번째 트랙 ‘대양’에서는 드러밍의 리듬이 진짜 파도가 몰아치듯 밀려오는 느낌이다. 사운드적으로도 물의 질감을 표현하려고 했다.
생각하고 마음먹은 대로, 표현하고 싶은 대로 현실적으로 펼쳐내는 게 신기하다.
진실: 그건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대한 방법에 해당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공부해 온 거라 오히려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무엇을’ 얘기할 것인가가 언제나 가장 큰 고민이다. 선빈이랑 우연히 <라이프>와 <타임>이라는 시리즈 다큐멘터리를 봤다. 우리가 록 밴드로 이런 걸 노래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한국에 그런 팀이 정말 없었다. 사운드 메이킹에만 너무 집중하는 나머지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를 너무 흘려보내는 팀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다큐멘터리가 큰 영감이 되었고, 그걸 록 밴드의 사운드와 화법으로 만들어본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해보니 역시 재밌다.
선빈: 그런 부분에서 밴드 이름을 참 잘 지은 것 같다.
‘삶’과 ‘시간’은 정말 거대한 명제다.
진실: 그래서 우린 무엇이든 노래할 수 있다.
너무 거대하고 추상적인 대명제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진실: 단, 우리는 모든 걸 자연물에 비유해 표현한다. 음악적인 소재가 기타와 베이스, 드럼이라면 가사 안에서의 소재는 자연이 되는 거지. 무언가를 자연물에 빗대어 우리가 느꼈던 시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미니멀한 록 사운드로 표현하는 거다.
라이프 앤 타임의 음악엔 오브젝트가 항상 등장하는 건가?
진실: 이번 앨범은 그렇다. 앨범 재킷에 우리가 곡으로 표현한 오브젝트 5개가 자연도감처럼 들어있다.
너무 컨셉추얼해지는 게 아닐까. 전제가 깔리면 나중에 자가당착에 빠질 수도 있다.
선빈: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했는데, 일단은 자연스럽게 하다 보면 또 답을 찾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우리만의 콘셉트와 스타일이 있다는 뜻이다. 언제나 그런 유니크함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런 부분에 대해 자부심도 있고.
데뷔 EP가 훌륭했다. 반응도 좋았고. 정규 앨범은 준비 중인가?
선빈: 이달부터 준비를 시작해 내년 상반기 정도엔 발표하려고 한다.
모든 게 자연스러운 거겠지? 그동안 살아오면서 삶의 질료들이 쌓이면서 ‘삶’과 ‘시간’을 이야기하게 되는 시기 말이다.
진실: 물론이다. 록 밴드라는 게, 음악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우리에겐 ‘직업’ 아닌가. 그러면서 자부심을 갖게 되는 이유는 음악이 예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술’이라는 단어가 주는 위압감 때문에 이런 얘기는 잘 안 하게 되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이라는 건 그냥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들려주는 거다. 우리만의 방법으로 우리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냥 그게 예술 아닌가?
각자 밴드맨으로서 강한 자아가 있을 텐데 어떻게 조율하나?
진실: 악기가 적은 게 그런 부분을 해소해 주는데 일조한다.
악기가 적어 표현의 한계를 느끼거나 허전한 건 못 느끼나? 워낙 사운드적으로 꽉 찬 밴드에서 활동해 왔으니.
진실: 확실히 있다. 채우려고 할 때도 있고. 하지만 악기가 적을 때의 매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너무 거기에 매달리진 않는다. 담백하고 미니멀한 사운드에 욕심이 있어 시작한 밴드이기도 하니까. 늘 좀 더 강한 걸 하고 싶었다. 단순한 것보다 강한 건 없다.
ARENA HOMME+, September 2014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아레나 옴므 플러스와 조하나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라이프 앤 타임의 묵중한 메시지를 좋아한다. 호랑이의 우아한 한 걸음 한 걸음을 연상케 하는 그루비한 베이스에 날카롭고 무심한 진실의 목소리를 얹은 '호랑이'는 대한민국 청춘에 보내고픈 응원가다.
초연함이 서서히 스며든다
일그러져 이빨을 드러낸다
우아함과 고통의 시간들이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네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한다
먹잇감이 나의 눈을 바라본다
수려함과 노력의 정도와는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네
우리는 호랑이
라이프 앤 타임 '호랑이'
밴드 음악을 다큐멘터리화 한 라이프 앤 타임의 인생과 시간의 기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들은 여전히 '어떻게' 말하느냐 보다 '무엇을' 말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이후 발매한 정규 2집 <Age>를 보더라도 그들의 '어떻게'는 '무엇을'만큼이나 훌륭하고 기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