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제야 왔을까. 2000년 데뷔해 그래미 어워드와 글래스톤베리, 코첼라 헤드라이너 무대까지 휩쓴 프랑스 밴드 피닉스가 지구 반바퀴를 돌아 한국 무대에 서기까지 14년이 걸렸다. 괜찮다. 기다릴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EDITOR 조하나 PHOTOGRAPHY 김참
무심한 멋. 열정과 무력감 사이 적당한 어딘가에 피닉스는 늘 있었다. 이지적이고 도회적이고 냉소적인 그들의 음악은 포근하고 따뜻한 위로를 동시에 품었다. 트렌디한 록과 힙합, 일렉트로닉, 각각의 음악 장르가 세기말을 갓 지나온 젊은이들의 갈증을 충족시켜주고 있었을 때 피닉스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선택했다. 피닉스의 음악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고, 그래서 어디에든 속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장르와 문화적 요소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섞였을 때 언제나 피닉스만의 새로운 음악이 되었다. 일찍이 누군가가 확립해 놓은 하나의 세계관이나 스타일 이름을 따와 ‘이것은 누구누구 스타일이다’라고 말할 때가 있는데, 피닉스는 이런 문장의 자리에 자신의 밴드 이름을 올려놓은 보기 드문 밴드다. 피닉스는 ‘춤출 수 있는’ 밴드였다. 그것도, ‘슬픈 춤’을. 무턱대고 신만 나지 않는, 애잔하면서도 감상적인 댄서블한 록을 하는 밴드. 이후로 그런 스타일의 음악을 하는 밴드는 언제나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했을 것이다. ‘피닉스 같은 밴드’라고.
2009년 발표한 네 번째 앨범 <Wolfgang Amadeus Phoenix>로 2010년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얼터너티브 앨범’을 수상하며 미국 팝 음악으로 뒤덮인 세계 음악 시장에서 피닉스가 프랑스 밴드로서 자존심을 세웠을 때, 행여 찬란한 순간을 맞이한 밴드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수많은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했지만 밴드의 라이프스타일 곳곳에 밴 여유와 관망은 바이오그래피가 쌓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풍부해졌다.
작년 봄에 발표한 다섯 번째 정규 앨범이자 4년 만의 신작인 <Bankrupt!>에서 묻어난 동양적인 무드와 위트는 해 뜨는 나라 동아시아의 꿈틀거리는 에너지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이 앨범의 타이틀 ‘Entertainment’ 뮤직비디오는 한국 드라마를 오마쥬해 화제가 됐는데 개인적으론 씁쓸하기도 했다. 한국의 모습이 지구 반대편 저들에겐 여전히 저리 비치는 걸까. 혹은, 우리가 갖는 ‘프렌치 시크’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그들의 ‘코리안 피버’에 대한 그것과 다르지 않은 걸까. 혹은, 수십 년 전 유럽을 휘감았던 무드를 지금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느끼고 있는 걸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지난 1월 23일, 아시아 투어의 피날레 장소로 서울을 택한 피닉스가 무대에 오르기 전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호기심과 무심함이 공존하는 눈빛으로 에디터를 바라봤다. 이어진 공연은 가볍고도 무거웠으며 담백하고도 열정적이었다. 공연 끝 무렵 보컬 토마스 마스는 툭, 하고 힘을 빼며 무대 아래로 떨어져 관객석을 부유했다. 논리가 아닌 감정만으로 가능한 설득이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무엇에도 힘주지 않는 듯 보였지만 완벽하고 강력했다. 피닉스의 힘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그들과 다시 한번 대화를 나눴다. 이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섯 장의 앨범을 낸 피닉스는 지금 어디쯤에 있나?
크리스티앙 마잘라이: 우리는 처음 밴드를 시작했을 때와 변함이 없다. 여전히 ‘인디’ 밴드이다.
로랑 브랑코위츠: 시작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인디적’이라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로랑 브랑코위츠: 우리 자신이 만든 레이블을 통해 앨범은 물론 투어까지 모든 과정을 전적으로 직접 컨트롤한다.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에 적합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와 생각이 맞는 사람들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지금은 우리가 늘 꿈꿔왔던 방식으로 ‘독립적인’ 방식으로 작업하고 활동하고 있다.
인디의 방식으로 출발해 빌보드와 그래미를 거머쥔 세계적인 밴드가 되었다. 피닉스의 음악은 한 시대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Bankrupt!> 앨범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심했던 점이 있었나?
로랑 브랑코위츠: 우리가 지금까지 발매한 앨범 중 가장 고심했던 앨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Wolfgang Amadeus Phoenix>의 대중적인 성공 이후의 앨범이라 더 그랬지. 종전까지 우리가 만들어온 익숙해진 룰을 깨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서 5집이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5집 발매와 활동을 기점으로 우리는 더 이상 예전 것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임무 수행 중이다.(웃음)
피닉스의 3집까지만 해도 한국에선 정식유통이 안 되어서 직수입 음반을 사서 들어야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북극에서 음악을 만들어도 한국에서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음악 유통 방식이 발전했다. 피닉스에게 이런 환경은 득인가, 독인가?
크리스티앙 마잘라이: 우리는 모던한 세상을 좋아한다. 그런 환경이 앨범 판매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음악으로 많은 대중과 만나는 것이다. 이전까지 레코드 산업 구조에 의해 막혀있던 대중과의 통로도 지금은 우리에게 더 이상 장애물이 안 된다. 음악을 둘러싼 기술이나 환경의 발전은 우리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자유를 줬다. 설사 이 때문에 돈을 적게 벌 지언정 우리는 더 행복하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회를 사랑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피닉스만의 본질은 무엇인가?
로랑 브랑코위츠: 우리는 각 시대마다 일어나는 사건들이 세계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인식하는데 좋은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동시에 각 시대마다 거론되고 급변하는 것들로부터 철저히 거리를 두고 지내려 노력하고 있다. 사실 ‘피닉스’라는 이름이 철 지난 향수 브랜드 같기도 하지 않나.
오랜 기간 밴드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로랑 브랑코위츠: 우리는 멤버 개인 각각으로서는 별로다. 그런데 밴드로 함께 할 때는 정말 잘한다. 그래서 우린 서로가 필요하다.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기 때문에 가족과도 같은 거다. 다른 방식으로 밴드를 꾸려나가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지금 우리가 밴드를 하는 방식에 만족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가족끼리 더 말을 잘 안 한다.(웃음)
로랑 브랑코위츠: (크리스와 어깨동무를 하며) 우리 둘이 친형제인데 이렇게 서로 말만 잘하지 않나.(웃음)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많은 일을 겪었을 거다. 문제에 봉착하거나 한계에 부딪히는 일은 없었나?
토마스 마스: 밴드 초창기 2년 동안 내내 싸우기만 한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봤을 때 역설적이게도 피닉스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우정이다. 우리가 밴드로서 영감이나 창작 능력이 사라지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없다. 오히려 각자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가다듬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더 긴장한다.
작업에 대한 부담감이나 결과물에 대한 불확실성이 문제가 될 때도 있나?
토마스 마스: 가끔 그럴 때가 있는 것 같다. 누군가를 만족시키려 음악을 하는 건 아니다. 일단 우리의 만족이 우선이다. 우리가 느끼는 흥미로움이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생기길 바라는 건 그다음 문제다.
64분 27초에 달하는 ‘Bankrupt! Diaries’는 앨범 작업 과정의 흔적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 트랙이다.
로랑 브랑코위츠: 작업을 하다 보면 우리가 ‘디바이스(Device)’라 부르는 수천, 수만 가지의 순간들이 있다. 그런 녹음 과정을 일기 쓰듯 앨범에 담고 싶어 마음에 드는 부분들을 골라 넣었다. 노이즈 같아 듣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운드가 태반이지만 그중에 놀라운 아이디어나 순간들이 숨어있다. 편집은 크리스가 맡았다.
‘Entertainment’ 뮤직비디오가 인상적이었다. 피닉스가 본 한국은 그런 모습인가?
토마스 마스: 사실 우리는 TV를 거의 보지 않아 특별히 ‘한국 드라마’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어 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의 시대 상황이나 정치 상황엔 관심이 많다. 독일이 베를린 장벽으로 나뉘었을 때의 시대적 긴장감이 많은 유러피언들에게 영향을 준 것처럼 말이다. 특히 데이빗 보위가 그랬다. 우리가 ‘Entertainment’를 작업하면서도 비슷한 무드를 느낀 것 같다. 그래서 이 곡엔 강한 감정이 담겨있다. 뮤직비디오는 오히려 더 가볍고 팝적인 느낌으로 가는 게 괜찮은 접근이겠다고 생각했다. 대중적이면서 의미 있는 앵글로 접근하는 게 중요하다고 느꼈다. 뮤직비디오를 맡은 감독이 유독 한국 드라마에 친숙한 사람이었던 게 큰 이유였다. 다소 위험요소가 있는 선택이었지만 좋은 결과물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그 결과, 무척 기이한 뮤직비디오가 탄생했지. 우리가 언제나 추구하는 색다른 방식과 시도로 말이다.
오리엔탈 무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나?
로랑 브랑코위츠: 우리가 좋아하는 건 유사성이다. 사람들 혹은 사물 간에 공통적인 부분들.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사운드를 채집하고 관찰하는 동안 처음에 떠오르는 많은 음표들이 거의 에티오피아 느낌이 났다. 그러다 나중엔 아시아적 느낌으로 옮겨갔다. 몇 개의 음표를 더하거나 덜어냄으로써 이런 변화를 줄 수 있다. 또 이런 것들을 한데 합치는 작업이 즐겁다. 우리는 이런 식의 ‘카오스 컨트롤’을 좋아한다. 지리적으로 한 특정지역에 국한하기보다는 어떤 경계나 한계를 규정하지 않는 게 우리가 음악을 하는 방식인 것 같다.
피닉스가 음악을 하는 작업 방식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면?
토마스 마스: 프랑스어로 ‘Joyeux Bordel’라고 한다. ‘유쾌하고 행복한 소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아시아 투어를 통해 동양의 에너지를 ‘직접’ 느껴보니 어떤가?
토마스 마스: 정말 대단했다! 지금껏 했던 투어 중 최고로 꼽을 수 있다. 아시아 각국의 고유한 특성이 있지만 모두 최고였다. 특히 서울의 팬들은 우리를 정말 따뜻하게 맞아줬다. 서울 여행기는 절대 잊지 못할 거다. 올여름, 다시 한번 한국에 온다!
ARENA HOMME+, March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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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파리 올림픽 폐막식을 보는데 피닉스가 나왔다. 그럼 그렇지. 프랑스를 말할 때 피닉스를 빼면 섭섭하지. 10년 전 나와 한국에서 만났을 때 모습 그대로, 여전히 공허한 얼굴과 멜랑콜리한 무드를 뿜어내며 진행 실수로 올림픽 선수단이 무대로 올라가 거의 무대에 난입하다시피 해도 이들은 그 '카오스'마저 마치 삶의 한 부분인 것처럼 능글맞게 녹여내고 있었다. 누군가 '프렌치 시크'를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피닉스를 말하겠다. 고집스럽게 유럽적이고 프렌치답게 까칠하고 고집스럽고 거만하고 불평 가득한, 그러면서도 틈이 많고 낭만적인 예술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