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시의 낭만이 존중받지 못하는 지금, 예술의 영속성과 그 위대함을 말하는 것 자체가 무모하고 헛된 일이라 체념하던 즈음, 온전히 자신의 삶으로서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시대의 아티스트와 조우한다는 것. 깊게 파인 주름과 어린아이 같은 수줍은 미소, 모든 걸 꿰뚫는 듯한 눈빛, 이 모든 게 한 표정에 담긴 순간을 목격한다는 것. 이 얼마나 감사하고도 다행인 일인가.
EDITOR 조하나 PHOTOGRAPHY 김참, 프라이빗커브 COOPERATION 아트북스
패티 스미스(Patti Smith)와의 만남은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2010년 아마존 ‘최고의 책’ 선정과 함께 ‘내셔널 북 어워즈’를 수상한 그녀의 회고록 <저스트 키즈>가 2년 후 가을, 한국에 선을 보였고,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그 책의 표지가 좋아 무작정 골라 들고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첫 내한이었던 2009년의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에서의 몽환적인 마력이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고, 66세의 나이에 발표한 열한 번째 정규 앨범 <Banga>의 메시지가 마음에 내리 꽂힐 즈음, 이듬해 2월 그녀의 단독 내한 공연 소식이 들려왔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 100위’에 든 뮤지션이자, 시인이자 반전·사회 운동가인 그녀와 나는 그렇게, 우연과 필연의 힘으로 마주했다.
십 대 시절, 랭보의 시집을 훔쳐 뉴욕행 버스를 탄 이후 끝없는 인생의 여정을 거쳐 지금 이곳, 서울에 있다. 삶의 여행자로 지난날을 돌아보면 어떤가?
내가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파리나 비엔나 등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는 꿈을 꿨다.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사람들은 “뉴욕에 갈 돈조차 없으면서 그 도시들을 어떻게 갈 거냐”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나는 노래를 함으로써 전 세계를 여행한다. 나는 미국인이라기보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호보(Hobo)’에 가깝다. 곳곳을 돌며 사진을 찍고 시를 쓰고 무언가를 창조해 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나는 타고난 여행자다. (웃음)
시나 그림도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이지만 자서전은 좀 더 직설적이고 직접적이다. <저스트 키즈>를 통해 세상에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로버트가 죽기 전, 그와 약속했다. 그와 나의 이야기를 쓰기로. 그는 내가 쓴 글을 사랑했고,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또 나를 믿었다. 하지만 그를 떠나보내고 나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남겨진 사람으로서의 삶과 현실을 감당해야 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로버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책을 써나가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교감 같은 게 느껴졌다. 로버트와 나의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를 일깨워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세대가 자신들의 인생을 헤쳐 나가는 데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다시 말해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러한 예술적 소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로버트와 나는 돈이 없었다. 신용카드도, 팩스도, 컴퓨터도, 아이폰도, 아이패드도, TV도,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우리가 가진 거라곤 그저 몇 권의 책과 옷가지, 미술도구뿐이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작품으로 우리 자신을 정의했다.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가 가진 물질적인 것들, 최신 휴대폰이나 컴퓨터, 헤어스타일, 생김새로 자신을 정의하도록 압박받는다. “너, 코 수술 좀 해야겠네.”, “너 보톡스 좀 맞아야겠구나”, “넌 살을 좀 빼야겠다” 이렇게 말이다. 이건 비즈니스가 만들어낸 음모와도 같다.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어야, 이렇게 생겨야 당신이 중요한 사람으로 느껴지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건 다 헛소리(Bullshit)다! 물론 좋은 컴퓨터를 가지고, 멋진 헤어스타일을 한다는 건 멋진 일이다. 하지만 이게 당신이 누구인지 정의해주지 않는다. 내가 <저스트 키즈>를 통해 말하고 싶은 건 이거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자신 내면을 통해, 자신만의 창조적인 힘으로 무엇을 하느냐로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다. 엄마로서든, 직장인으로서든, 정원사든, 수도승이든, 무슨 일을 하든지 말이다.
‘예술’의 진정한 의미는 70년대 말 정점을 이루고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80년대 이후부터는 ‘팝 스타’라 불리는 인물이 많지, ‘시대의 예술가’라 불리는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1970년대부터 2010년대인 지금까지 계속해서 예술가로서 변화를 느끼는가?
나는 각각의 모든 세대가 그들 자신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예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로큰롤을, 패션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내가 비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각자의 세대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다. 다만 내가 이 모든 것들에서 찾고자 하는 건 특정하게 타고난 정신적 콘텐츠다. 나는 앤 드뮐미스터(Ann Demeulemeester)의 옷을 보고 그녀의 정신과 시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피카소(Picasso)의 ‘게르니카’를 보면서 세상을 염려하는 그의 진실한 감정과 이 세상이 반영된 모습 또한 볼 수 있다. 또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으로부터 20세기의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여러 시대를 대표하는 이들의 작품을 통해 그들의 정신과 마음을 느낀다. 하지만 사실 현대 예술에서 엄청나게 많은 걸 느낀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물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분명 현대 예술은 정신 외의 다른 부분에서 오는 것들이 많다. 나는 구식이다. 렘브란트(Rembrandt)의 그림을 사랑하고, 19세기 프랑스 시집을 읽는다. 나에게 로큰롤은 여전히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다. (웃음) 우리가 예술에 반응하는 건 주관적인 일이지만 어떤 예술에서든 진심으로 정신적인 콘텐츠를 느끼기를 갈망한다. 종교나 신앙으로 규정된 진리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단순한 본유의 인간적인 감각 말이다.
정서나 환경의 차이로 해외 팬들에게 당신의 노랫말이나 시의 함축된 이미지가 완벽하게 이해되거나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한계를 뛰어넘어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세세하고 미묘한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나는 영어밖에 할 줄 모른다. 하나님은 내게 여행에 대한 욕구는 주셨지만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귀는 주지 않으셨으니까. 나는 불어도, 스페인어도, 한국어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로큰롤을 한다. 로큰롤은 전 세계적인 언어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혹은 사랑을 노래하는, 혹은 환경에 대한 노래들이 각각 있지만 나는 공연을 하면서 사람들이 이런 걸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공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바로 소통이다. 내가 관객들을 위해 무대 위에 있다는 걸 알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무대 위에 올라가 노래만 부르다 떠나기보단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길 원한다. 나는 화려한 조명을 사용하고 무대 의상을 여러 번 갈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딴생각을 하며 콘서트를 하고 술에 취해 수표를 받고 떠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내가 공연하는 곳에 모인 사람들의 영혼을 느끼고 싶다.
최근 투어를 하면서 경험한 특별한 느낌이 있었나?
일본 투어에서 그랬다. 지진과 쓰나미의 시련을 이겨내려 하는 상황과 그 여파 때문에 관객들의 분위기는 처음엔 굉장히 무거웠다. 어떤 지역에서는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모두가 무대 앞으로 나와서 “그래, 이런 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우리는 지금 살아있고, 우리는 강해!”라고 외칠 때까지. 사실 나는 지금 한국 젊은이들의 분위기가 아주 궁금하다. 뉴스만 봐도 그렇다. 지금의 한국은 어려운 선택들과 위협, 걱정거리들이 아주 많아 보인다. 젊은이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아주 많다. 당신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나? 특히 원자력 같은 위협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위협하는 일이다. 핵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위협이었다. 미국이 원자 폭탄을 투하했을 때부터… 그때부터 우리는 이 문제를 안고 살아왔다. 나는 미국이 그런 끔찍한 짓을 했다는 게 정말 부끄럽다.
긴 시간과 오랜 경력으로 당신이 갖게 된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때론 두렵지 않나? 행동이나 발언에 더 신중해지거나 사람들의 오해나 반응들에 신경 쓰게 된다던가.
정말 좋은 질문이다. 어렸을 땐 내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는 영향 같은 것엔 큰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했다. 어릴 땐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하지 못하니까. 그러다 30대가 지나자 다른 사람들이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절실히 깨닫게 됐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누군가를 나쁜 길로 몰아가지만은 말자고 결심했다. 누군가가 나와 같은 길을 그대로 따라오거나 나처럼 되길 기대하는 게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더 탐구하고 생각해 보게끔 격려한다. 난 그저 우리 모두가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고,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사람이고, 내가 무대에 선다고 해서 특별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 나는 ‘록스타’나 ‘펑크의 대모’라고 불리기 이전에 단순한 공연자가 되려고 한다. 이건 그냥 내 직업일 뿐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다른 직업을 가진 이들 모두와 똑같이 내 일에 최선을 다하려 노력한다. 나는 전쟁을 반대하고, 환경을 염려한다. 이런 생각을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게 아니라 매일 한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행동을 똑바로 해서 누군가의 롤모델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본보기가 되길 바란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바닷가에서 쓰레기를 보고 그걸 집어 쓰레기통에 넣는다면, 누군가가 나를 보고 그렇게 할 것이다. 가끔은 아주 작은 행동이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게 점점 커지고 또 커지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왜냐면 그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
뉴욕에서 예술가를 꿈꾸던 시절, 궁핍함을 느꼈나?
글쎄, 꼭 그렇지는 않은데. (웃음) 궁핍했던 때 중 하나였다.
예술가의 창작과 물질적 풍요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모든 창조 활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이거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항상 좋은 작업을 하기만을 바라왔다. 돈을 번다는 것, 부자가 되거나 혹은 유명해지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따금씩 나는 꽤 큰돈을 벌고 유명세를 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부자였던 적은 없었다. 팝스타가 되길 원하고, 백만장자가 되길 원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도 좋다. 만약 그게 진정 자기가 원하는 거라면 말이다. 팝스타가 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아주 열심히 노력해야 할 거다. 나라면 팝스타가 되는 걸 원치 않겠지만. (웃음) 춤을 그렇게 춘다는 게 나에겐 정말 어려운 일이고, 또 내가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성공을 목표에 둔 예술에선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한다. 당신도 딱 보면 알 수 있을 거다. 숭고한 작품에 얼마나 많은 피와 땀, 눈물, 괴로움, 분노, 영혼이 깃들어 있는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로부터 질문을 이끌어내고,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단순한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위대한 작품을 희망하는 것이 젊은 예술가들의 목표였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에 결국 따라가게 되어 있다. 결국, 그러한 작품들이 몇 세기가 지난 후에도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생명을 갖게 될 것이다.
<저스트 키즈>가 영화로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는 건가?
아직 준비 중이다. 할리우드의 유명 프로듀서와 배우들로부터 많은 제의가 들어온 상태지만 대본이 완성되지 않았다. 만약 이 책이 영화화된다면 나는 그 과정에 완전히 전념하고 싶은데 아직 나에겐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소박한 영화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있다. 무명 배우들이 로버트와 내 역할을 맡아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실제로 정말 서로 사랑하는 소년과 소녀여야 한다. 언젠가 이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질 거란 느낌은 분명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미국뿐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서도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로버트와 나의 이야기는 시대와 세계를 초월하는 이야기다. 예술, 사랑, 우정, 죽음, 추억… 세상 모두에게 공통적인 이야기.
당신 인생의 가장 빛나는 청춘을 뉴욕에서 보냈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 어느 순간으로 가고 싶은가?
로버트를 처음 만났던 그때… 우리는 순수했고 우리가 신경 썼던 건 오직 예술과 서로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순수했던 순간이었다. 소박하고 단순한 순간은 순수하기 때문에 지켜질 수 있다.
<저스트 키즈>를 만나 행복했다. 지금은 당신은 여전히 ‘키즈’인가?
(웃음) 지금 내 머리가 잿빛으로 변하긴 했지만 나는 아직도 ‘키즈’인 것 같다. 아니, 앞으로도 나는 ‘키즈’일 거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건 우리를 젊게 해 준다. 물론 정신적으로 말이다. 공연을 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가운데 무언가에 갖는 열정은 우리를 젊게 만든다. 황혼의 아버지가 별일 없이 앉아만 계시다 어느 날 신기하게도 바느질에 솜씨가 있다는 걸 알게 되셨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매일 바느질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하셨고,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있는 대신 “오늘은 뭘 만들어볼까” 열정을 보이셨다. 바라건대 앞으로 100세가 되어도 나는 여전히 ‘키즈’로 남을 거다. 늙은 ‘키즈’. (웃음)
패티 스미스와의 인터뷰 도중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순간이 있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말하는 대목에서 “로버트를 처음 만났을 때…”라고 말하는 목소리와 눈빛과 어조는 그녀와 한 공간에 있는 우리 모두를 그 순간으로 데려다 놓았다. 스토리의 힘을 얻은 예술가와 예술 작품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잘 팔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그녀였다. 하지만 그래서 책을 쓴 게 아니라는 걸, 그래서 노래를 하고 “No More Bomb!”을 외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녀의 진심을 알아차리게 된 순간이었다. 책에 대한, 예술에 대한, 그녀의 동반자였던 로버트에 대한 그녀의 진정성은 그 한마디만으로 충분했다.
우리는 겪지 못한 시대를 본능적으로 동경하고 미화한다. 혁명과 예술의 기운으로 가득한 1970년대 뉴욕 거리를 누비고 다녔을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모습이 그러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풍족한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21세기 젊은이들이 되레 배고프고 헐벗은, 적게 가져 더 행복했던 그 시절을 동경하다니. 시대의 낭만이란 이면에 가려진 그녀의 현실은 분명 녹록지 않은 것이리라. 로버트를 비롯해 남편과 남동생은 물론 수많은 아티스트를 앞세워 보낸 그녀에게 남겨진 삶은 하나의 사명과도 같았으리라.
그녀가 지금까지 보내온 시간들이 먼지처럼 푸석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삶에 매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이겨내고 강해졌기 때문이다. 예술의 영속성과 삶의 유한성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저스트 키즈>의 패티와 로버트가 영원한 ‘키즈’로 남을 수 있는 이유 또한 이 때문이다. 그녀가 여전히 건재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에이즈 기금 모금에 참여하고 녹색당을 지지하며 전쟁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 사랑과 평화를 외치는 66세의 로커가 ‘노장’이 아닌 ‘키즈’로, 세상 유일한 무기인 기타를 들고 세상과 맞서는 ‘전사’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묻는다. 지금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ARENA HOMME+, March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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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 스미스는 오랜 시간의 힘과 품격,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과 호기심, 계산기를 두드려 이익을 따지지 않는 공감과 연대의 마음을 모두 가진 로커다. 모든 게 이미 예견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서점에서 우연히 그녀의 신간 <저스트 키즈>를 들어 올렸고, 책을 읽고 난 후 몇 날 며칠을 앓았다. 출판사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 잡지에 책 리뷰를 싣고 싶다고 했다가 때마침 그녀의 단독 공연 내한 스케줄이 확정되었단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인터뷰 일정은 잡지 않기로 했다는 말에 그동안 내가 했던 인터뷰들을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보내며 제발, 꼭, 기회를 달라 졸랐다.
그렇게 단독 인터뷰 기회가 주어졌고,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 속에 여전히 날카롭게 번쩍이는 눈빛을 담을 수 있었다. 그녀는 첼시 호텔의 예술가들 중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였고, 그 생존자의 힘으로 세상에 영감을 주며 살아가고 있다. 요즘엔 아무도 관심 없는 순수한 예술, 그 자체의 존재 목적을 나는 그녀를 통해 목격했다. 요즘도 가끔 살다가 쉰 소리가 나올 때면, 그때 그녀의 눈빛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