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업으로 삼는 에디터에게 노엘 갤러거(Noel Gallagher)와의 인터뷰는 버킷 리스트 Top 3에 드는 꿈이었다. ‘2015 안산 M 밸리 록 페스티벌’ 첫째 날 헤드라이너 무대를 앞두고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그와 나눈 인터뷰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우리는 서로 엄지를 치켜들며 눈을 마주쳤다.
EDITOR 조하나 PHOTOGRAPHY 로렌스 왓슨(Lawrence Watson) COOPERATION 워너뮤직코리아
두 번째 솔로 앨범 <Chasing Yesterday>를 준비하면서 첫 번째 앨범과 달랐던 점이 있나?
준비하는 데에 있어 특별히 달랐던 건 없다. 오아시스(Oasis) 때부터 내가 곡을 쓰는 방식은 항상 똑같다. 보통 15~20개 정도의 완성된 곡을 가지고 스튜디오에 들어가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고른다.
첫 번째 솔로 앨범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가 나왔을 때 2집에 수록될 곡들이 완성된 상태라 밝히며 앨범이 금세 나올 거라 했었는데.
시간 날 때마다 곡을 쓰기 때문이지. 보통 15~20 트랙이 담긴 앨범을 낼 때도 30 트랙 정도의 다른 곡들이 마무리되고 있다. 투어가 끝나면 몇 주 동안 집에서 쉬면서 또 바로 곡을 쓰지. 언제나 많은 곡들이 준비되어 있다.
수많은 곡 가운데 앨범으로 묶어 낼 곡들을 추리는 기준이 있을까?
나의 본능적인 감을 믿는다고 해야 할까? 앨범을 만들 때 보통 앨범에 실릴 10개 정도의 트랙과 백업으로 대여섯 개의 트랙들이 준비되어 있다. 그걸 하나씩 들어보며 앨범에 수록해야 하는 이유를 따져 보는 거지. 보통 5~6 트랙들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 몇몇 노래들은 멜로디가 마음에 들지만 가사가 마음에 안 들거나, 그 반대일 경우도 있고. 그럴 땐 나의 직감을 믿고 결정한다. 이런 것 때문에 내가 ‘아티스트’라 불리는 게 아닐까?
20세기에 활동을 시작해 21세기에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록 스타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내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들 때문이다.
내한 공연 이후 해외 인터뷰에서 ‘한국의 끝내주는 팬들’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더라.
영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터뷰에서 이야기했지. 지금까지 월드 투어를 다니는 동안 태극기를 일주일 이상 보지 않았던 적이 없을 정도라니까. 세계 어딜 가든 항상 관객 중 누군가는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그게 똑같은 애일 수도 있겠지. (웃음) 정말 끝내주는 것 같다. 투어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지인들이 한국에 대해 묻는데, ‘정말 끝내주는 나라’라고 대답하면 다들 의아해한다. 친구가 전화해 어디냐고 물으면 “나 지금 한국에서 1만 5천 명 관객들 앞에서 페스티벌 공연을 하고 있어”라고 대답하는데, 그럴 때 그 친구는 엄청나게 놀란다. 많이 알려진 나라가 아니어서 그런 거겠지. 한국은 ‘잘 숨겨진 비밀’ 같은 나라다.
록 밴드 사이에서 ‘노엘 갤러거’라는 이름 자체가 가진 상징성이 있다. 이는 음악뿐 아니라 애티튜드도 포함된다.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거다. 누군가 나에게 어떤 질문을 하면, 난 그저 솔직하게 답한다. 그게 다다. 록 스타의 원칙이 아니고, 그저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던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뿐이다. 내가 신경 쓰는 건 딱 세 가지다. 끝내주는 곡을 쓰고, 멋진 앨범을 만들고, 완벽한 공연을 위해 리허설을 하는 것. 이 세 가지 외엔 어떤 것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무대 위에 올라가면 그 순간을 즐긴다. 어차피 끝내주게 잘할 거라는 건 아니까. 어떤 록 스타들을 보면 다른 요소들에 대해 굉장히 진지해지는데,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인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선 내가 답할 일이 아니다. 그냥 나는 항상 그래왔고,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다.
영국 <Q> 매거진 최근 인터뷰에서 U2가 아이폰에 신곡 음원을 넣은 것에 대해 “U2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7억 5천만 명의 사람들에게 당신의 휴대폰 속에 우리 노래가 들어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내 음반을 마음에 품고 있는 7백5십 명이 더 좋다. 나에게는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일이다”라고 답한 게 인상적이었다.
보노(Bono)는 나의 친구지만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생각이 다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가지고 있다는 콘셉트는 죽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무섭기도 하다. 애플이 당신의 스마트폰에 손쉽게 음악을 넣을 수 있다면, 반대로 손쉽게 빼낼 수도 있다는 거니까. 내 스마트폰에는 워낙 많은 곡이 있기 때문에 어떤 곡을 빼갔는지도 나는 모르겠지만(XX, 알 게 뭐람!) U2처럼 전 세계 사람들이 내 앨범을 듣는 것보다 7백5십 명의 사람들이 내 앨범을 사고 소유해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더 좋다. 그게 나한테는 더 중요하다. U2는 퍼포먼스를 중요시하는 밴드이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걸 시도하려 한다. 그런 점은 이해하지만, 나는 그렇게 못 하겠다.
당신의 관객 중 어린 연령대의 팬들은 스트리밍이나 다운로드로 당신의 음악을 접할 텐데.
일단 스트리밍 서비스 시스템 자체에 동의할 수 없다. 아티스트들이 제대로 돈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송라이터가 엄청난 히트곡 하나를 썼다고 하자. 지금 시대에선 그 사람은 합당한 대가를 받을 수 없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히트곡 하나만 써도 엄청난 돈을 벌고 멋지게 살 수 있었다. 젊은 아티스트들이 마땅한 돈을 받고 있지 못하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 거다. 나는 앨범을 만들면서 프로듀싱하고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데에 50만 불에서 80만 불을 투자한다. 그걸 그냥 공짜로 주는 것과도 같다. 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스포티파이도 결국 음반사와 계약되어 있기 때문이지. 그런데 나 같은 독립 아티스트들에게는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시스템이다. 물론 그렇게 들려진 내 음악이 사람들로 하여금 공연에 오게 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음원의 가치는 점점 더 떨어지고 있고, 공연 티켓은 점점 더 비싸지고 있다. 아티스트들이 공연으로라도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무료로 음악을 듣는 시대가 왔다고 좋아하겠지? 앞으로 공연을 보려면 1백 불, 2백 불, 아니 5백 불은 지불해야 할걸. 영국에서 지금 내 공연의 티켓 가격은 보통 1백 불 정도 된다. 나중엔 어쩔 수 없이 2백 불이 될 것이다. 내 생각엔 10곡이 담긴 앨범은 20불, 공연은 40불 정도가 되어야 균형이 맞는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처럼 음원의 가치와 공연 티켓 가격의 균형이 무너지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록 스타가 아니다. 그냥 회사원일 뿐이지. 록 스타라 불리면서 은행원보다 돈을 못 버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러려고 내가 음악을 시작한 게 아니다.
많은 뮤지션들이 무대에서 관객들과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펼친다고 한다. 노엘 갤러거가… 설마 그렇지 않겠지? (웃음)
다행히도 나는 사람들이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든다. 내 공연에 온 관객들은 ‘떼창’ 할 때만큼은 내 존재를 잊어버리지. 노래가 알아서 그들을 이끌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만약 내가 관객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려고만 하는 아티스트였다면 관객들이 나한테 많은 걸 바랐겠지. 어차피 내가 그런 아티스트도 아니고. 폴 맥카트니(Paul McCartney)의 춤을 보러 그의 공연을 가는 게 아니지 않나? 닐 영(Neil Young)의 멘트를 듣기 위해 그의 공연을 가는 게 아니지 않나? 그냥 음악을 들으러 그들의 공연을 가는 거다. 관객들과의 기싸움 같은 건 없다. 단지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관객들과 더 많은 소통을 할 뿐.
지난 내한 공연에서 ‘Don’t Look Back In Anger’를 따라 부르는 관객들을 마이크에서 입을 떼고 한참 동안 바라보더라.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노래는 더 이상 오아시스의 것도, 당신의 것도 아닌, 세상의 것이 된 노래라고. ‘노엘 갤러거’라는 이름과 당신의 수많은 노래들, 무엇이 더 오래 남을까?
‘Don’t Look Back In Anger’(1996)라는 노래를 쓴 그날 밤의 그 순간은 변치 않고 지금까지 25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반대로 나는 생에서 그 순간을 단 한 번 겪었고, 그 이후로 계속 나이 들고 있다. 음악은 영원하다. ‘Live Forever’(1994) 역시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해서가 아닌 ‘영원히 기억되는 것’에 대해 쓴 노래다. 그게 바로 음악이다.
ARENA HOMME+, September 2015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아레나 옴므 플러스와 조하나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음악 전문 에디터로 관객 하나 없는 텅 빈 홍대 라이브 공연장부터 굵직한 해외 뮤지션의 내한 공연과 매해 여름이면 열리는 대형 록 페스티벌까지 안 가본 공연이 없다. 음악을 하는 플레이어나 관객이나 그들을 관찰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 중 하나는 '오아시스'였다. 한국의 열악한 인디 음악 씬에서 열 명도 안 되는 관객들 앞에 서서 공연하는 신생 밴드들은 언제나 "오아시스처럼 될 거라"는 꿈을 품었고, 갤러거 형제는 진즉에 갈라섰지만, 밴드 오아시스와 그들의 노래들은 90년대와 2000년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방향키와도 같았다.
국내외 웬만한 뮤지션들을 다 만나본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언젠가 내가 노엘 갤러거를 인터뷰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가 내가 이 일을 그만두는 날이 될 거야." 노엘 갤러거는 한국에서 웬만하면 인터뷰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고, 나 역시 그럴 일이 없을 걸 알면서도 내한 소식이 있을 때마다 음반 레이블 관계자들을 귀찮게 했다. 2015년 봄, 그가 왔고, 단독 내한 공연 무대에 선 그는 세상에 이런 인간들은 처음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공연 내내 어리둥절해했다. 지구 반대편, 그것도 남북으로 쪼개진 작은 나라의 낯선 사람들이 자신의 노래를 추임새에 기타 솔로 리프까지 떼창을 하니 말이다. 이거다, 느낌이 왔다. 조금 더, 꾸준히 음반 레이블 관계자들을 귀찮게 해야겠다.
한국에서의 단독 공연이 마음에 들었는지 노엘 갤러거는 불과 3달 만에 여름 록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다시 한번 내한했다. 그리고 나에게 단독 인터뷰 기회가 주어졌다. 길고 긴 투어 중인 내한 아티스트들은 공연 전 스테이지 뒤에 마련된 컨테이너 대기실에서 10분 정도의 시간을 허락했다. 노엘 갤러거의 매니저 역시 같은 말을 했고, 나는 1분이라도 아끼려고 백스테이지를 전력 질주했다. 저 멀리 맨체스터 시티 깃발로 뒤덮인 노엘 갤러거의 컨테이너(그가 투어를 다닐 때 무조건 이행되어야 하는 그 유명한 계약 조건이다)가 보이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 청춘의 앤섬을 모두 써준, 나의 록스타, 울어버리면 어쩌지?
헐떡이는 숨을 잠재우지도 못한 채 컨테이너에 들어서니 부드럽고 젠틀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우쥬 라이크 어 티?(차 한잔할래?)" 그러곤 영국에서 직접 가져왔다는 요크셔 티백을 갓난아기 다루듯 어르고 달래며 컵에 넣고 완벽하게 온도를 맞춘 물을 천천히 부었다. 그러는데만 10분이라는 시간이 다 갈까 봐 조급해진 나는, 준비한 수백 개의 질문들을 보여주며 "나, 정말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시간이 될지 모르겠어"라고 백기 투항했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 "매니저가 10분 안에 끝내라고 했구나? Whatever! 나한텐 시간제한 없어. 하고 싶은 만큼 해. 무대에만 올라갈 수 있게 해 줘. 하하!" 그러고 보면 언제나 악동 이미지에 거친 언변과 행동으로 사고를 치는 건 노엘 쪽이 아니라 리암 쪽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아시스가, 노엘 갤러거가 이렇게 젠틀하고 예의 바르고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넘치는 사람인지 직접 만나기 전까진 알 길이 없었다. 세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거 하고 할 말 다 하며 당당하게 살면서도 세상 그 누구에게도 위협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완벽한 표본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10분으로 예정됐던 인터뷰는 30분을 훌쩍 넘겼고, 헤드라이너 무대에 오른 그의 공연을 보면서 그의 음악을 사랑하고, 또 그의 음악으로 빛났던 자신의 청춘을 힘껏 껴안는 한국의 젊은 관객들이 너무 아름다워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던 말처럼 나는 노엘 갤러거와의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내려놓으며 오랜 잡지사 에디터 생활을 그만두고 모험을 떠났다. 2024년, 오아시스가 재결합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리암이 삐딱하게 서서 뒷짐을 지고 턱을 치켜들고 노래하고 노엘이 그 옆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을 무대에서 다시 볼 수 있다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