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도 잘 버텨줘. 쓰러지지 말고.

오늘의 살림-남편 화장품 정리

by 글쓰는하루

욕실 수납장 맨 아랫단에는 남편의 화장품들이 자리잡고 있다. 수납장 문을 열어볼 때마다 그 화장품들은 한 번도 온전히 서 있던 적이 없다.

토너, 로션, 아이크림 등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그것들은 늘 피곤해 죽겠다는 듯이 널부러져 있곤 한다. 그나마 얌전히 누워 있기만 하면 다행인데, 간혹 고약한 녀석들은 수납장 문 틈에 기어코 기어들어가서는 수납장을 못 열게 만들곤 한다.


수납장 문을 열다가 뭔가 걸린 듯한 둔탁한 느낌이 들면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오늘도 문틈에 숨어 시위하고 있는 녀석과 한 판 전투를 치러야 하는구나. 한숨을 쉬며 어두운 수납장 구석을 노려보면, 상습범인 아이크림 또는 떠오르는 신흥강자인 수분젤이 문틈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억지로 녀석들을 빼내다 보면 내 손은 꼭 상처를 입는다. 물론 문틈에 끼어있던 녀석들도 끌려나오면서 찰과상을 입고 깔끔했던 튜브 커버에 자꾸 흠집이 생긴다.


피차 이렇게 힘든데 왜 자꾸 쓰러지니. 제발 세워둔 그대로 자리에서 굳건히 버텨주면 안 되겠니.


오늘도 퇴근 후 뭔가 꺼내려고 욕실 수납장 문을 열었다가 남편의 토너 병이 힘없이 넘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병에 들어있는 토너의 양이 줄어들면서 무게도 가벼워진 탓에, 요즘은 드르륵 열기만 하면 스르륵 하고 이 녀석이 쓰러져 버린다.


그래서 오늘의 살림은 남편 화장품 정리로 정했다.

너희들이 더 이상 쓰러지지 않도록 내가 버팀목을 마련해 주마!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60321214625_0_crop.jpeg 어지럽게 널려 있는 남편 화장품들


적당한 수납 바구니가 있으면 좋으련만, 집에 그런 것도 없고 사러 갈 시간은 더더욱 없다. 혹시나 쓸까 싶어 모아 둔 박스며 빈 병을 뒤져서 적당한 케이스를 찾았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60321220042_2_filter.jpeg 커피 캐리어와 플라스틱 캔이 오늘의 수납 바구니!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60321220217_4_filter.jpeg 플라스틱 캔은 박스 안으로 쏙 넣어준다.

견과류가 담겨 있던 플라스틱 캔은 박스 안에 맞춘 듯이 쏙 들어간다. 크기가 작고 특히 잘 넘어지는 화장품들은 이 캔 안에 넣어주면 된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60321220459_5_crop.jpeg 쏙 쏙 쏙! 제 자리 찾아간 화장품들

다행히 화장품들이 딱 맞게 자리를 잡았다. 맞춤형 수납박스를 욕실 수납장에 다시 넣으니 공간도 훨씬 덜 차지하고 깔끔하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60321220814_6_crop.jpeg 상자 안에 곱게 줄 서 있는 화장품들

이제는 너희들이 힘없이 쓰러질 일이 없겠지. 뿌듯하고 또 뿌듯하다. 비록 오늘은 초라한 헌 상자로 임시거처를 마련하는 데 그쳤지만, 나중에 꼭 너희들에게 더 예쁘고 깔끔한 새 울타리를 만들어 주마.


새 수납박스 안에서 꿋꿋한 자세로 버티고 있는 녀석들을 보자니 속이 후련하면서도 괜히 애잔한 느낌이 든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해 삶을 버티고 있으니까,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삶을 '살아가는 것'과 '버텨내는 것', 어떤 표현이 더 맞는지 요즘은 잘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나는 '잘 살아'라는 말 대신 '힘들어도 버텨라'라는 말을 듣는다. 애 낳고 경력 단절되면 다시는 사회에 못 나온다, 그러니 무조건 버텨라.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더 모아야 한다, 허리띠 졸라매고 버텨라. 버티는 게 이기는 거다, 그러니 묵묵히 버텨라.


언제까지, 얼마나 버티고 버텨야 진정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삶이라는 본질 자체가 버티고 견뎌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고민은 그렇게 접어둔 채, 오늘 하루도 나는 잘 버텼다. 이 차갑고 어지러운 사회에서 쓰러지지 않고 버티기 위해 동이 틀 무렵 부지런히 집을 나서, 오늘도 수많은 일을 겪고 묵묵히 버텨낸 후,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내가 정리한 화장품의 주인도 그러한 하루를 보냈으리라.


어쨌든 우리는 오늘도 잘 버티고 돌아왔다.

오늘 정리해 준 녀석들도 잘 버텨주기를.

그리고 우리 모두, 내일도 잘 버텨봅시다.


수고한 당신,

편안한 밤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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