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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u Dec 19. 2020

길고양이를 위한 겨울집


익숙해지지 않는 마스크의 답답함에

매서운 추위 더해진 요즘.


출퇴근 길이 한층 힘겨워졌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둘러도

살속으로 파고드는 바람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문득.


얼마전 시에서 설치한 겨울집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을

고양이들을 떠올렸다.


'모두들 이 겨울을 안전하게 지나고 있을까'





시작은 올해 여름이었다.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팀장님은 내게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셨다.



"주사님이 하고 싶은 사업이 있으면 추진해 보세요"



나는 작년 겨울부터 내내 머릿속에 담겨있던

생각을 조심스레 꺼내놨다.



"저 그럼 '길고양이 겨울집' 만들어도 될까요?"



길고양이 겨울집이란, 혹한기 길고양이들의 건강을 지키고, 고양이들이 추위를 피해 차량 엔진 등에 들어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박스 등으로 만들어 설치해놓는 것을 말한다.


‘길고양이’를 둘러싼 갈등은 내가 업무적으로 마주하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다.


한편에서는 시민의 세금으로 길고양이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고, 또 한편에서는 길고양이와 캣맘들을 위해 '고작 그것밖에' 안 해주는 시와 공무원이 무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시행하는 길고양이 관련한 사업은 ‘중성화 사업(TNR)’이나 ‘급식소’ 정도다. 길고양이를 위한 ‘겨울집’은 최근 들어 일부에서 시행하고 있다.


내가 있는 시청도 마찬가지다.


중성화 사업(TNR)은 국비와 도비를 지원받는 예산으로, 급식소는 도비를 지원받는 예산으로 운영하고 있다.


패기 있게 '길고양이 겨울집'을 만들고 싶다고는 했으나, 공식적인 사업이 아니었기에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지나치게 한정적이었다.


팀장님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동물보호지원을 위한 사무관리비와 재료비에서 조금씩 모아 약 130만 원 남짓의 돈을 마련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여러 캣맘들의 의견처럼 저렴하게 만들어진 겨울집으로 최대한 많은 개수를 사면 좋았겠지만 시에서 일하는 공무원의 입장에서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첫 번째로, '길고양이 겨울집' 설치와 운영 또한 시에서 운영하는 '공식 길고양이 급식소'에 준하는 관리 지침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시에서 예산을 들여 만든 '공식 길고양이 급식소'는 관리자가 최소 2인 이상이 모인 공원에 설치하고, 동물보호업무 담당자가 수시로 급식소를 점검하며 정해진 지침에 맞게 운영될 수 있도록 관리해야 한다.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있는 '길고양이 급식소'의 경우에도 담당자의 마음대로  '아무 공원'에나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당 공원을 관리하는 부서의 협조를 받은 곳에만 설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담당 부서의 허락이 없으면 모든 시설물은 '불법 적치물'이 된다.


'길고양이 겨울집' 또한 관에서 제작, 운영하는 설치물이었기에  급식소처럼 관리자가 분명한 곳에 놓아야 했고


그곳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볼 때, 다수가 이용하는 장소의 미관을 해치거나 불편함을 느끼게 해 서는 안 됐다.


다시 말해, 시범 운영 단계에서 겨울집의 개수를 무작정 늘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겠지만 시청 안에서 '한 명의 공무원'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 같은 건 없다.




두 번째로, '길고양이 겨울집'의 설치 목적은 추운 겨울 고양이들을 위한 안락한 쉼터를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길고양이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지자체에서도 겨울철 길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음을 알리며,


길고양이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도 조금씩 개선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최대한 깔끔한 모양으로 제작하는 것이 중요했다.


간혹, 주위의 미관은 아랑곳없이 오직 고양이들만을 바라보며 급식소와 집을 아무 곳에나 설치하는 분들이 있다.


민원을 받고 현장에 나가보면 '도대체 이게 고양이 밥집인지, 폐기물 더미인지' 모를 박스와 비닐봉지를 잔뜩 쌓아놓는 곳이 대부분이다.


안 그래도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시민들은

그런 설치물들을 발견하면 십중팔구 시청에 민원을 넣는다.



"아니, 동물을 위한답시고 저런 쓰레기를 쌓아놓고 있는데, 공무원은 저거 안 치우고 뭐해요, 도대체?"



굳이 모두  마음에 들어야 할 필요는 없고

그럴수  있는 일도 아니겠지


적어도 함께 이용하는 공공장소에서는

나의 행위로 인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생각을 해 봐야 함이 옳다.



   

 





9월경부터 본격적으로 제작 업체와 소통하며

길고양이 겨울집 디자인에 들어갔다.


캣맘들의 의견을 듣고 디자인을 조금씩 수정했다.



- 빗물받이가 있나요?

- 안에 스티로폼만 들어 있으면 고양이들이 긁어요

- 가능한 어두운 색으로 해 주세요



캣맘들의 요구를 하나씩 더할수록 제작 단가가 높아졌다.


내부에 단열재를 두른 스티로폼을 깔고,

빗물받이를 만들기 위해  리빙박스 뚜껑에 아크릴을 부착하기로 했지만  아크릴을 어두운  색으로 만들 경우 예산이 초과됐다.


계획했던 38개의 겨울집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색을 포기해야 했다.

      

예산이 정해져 있는 공식 사업을 착실히 수행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예산이 없는 사업을 오직 ‘담당자의 의지’만으로 계획하고 밀어붙이는 것은 아무리 좋은 의미와 취지가 있어도 부담이 되는 일이다.


괜히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벌였다고 눈총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완성된 '겨울집'을 캣맘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온전히 긍정적인 반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보고 싶었다.


추위에 떠는 생명에게 따뜻한 자리를 허락하는 것, 배를 곯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다치고 아픈 생명을 돌보는 것은 '옳고 그름'의 논리를 떠나 ‘인간성’과 관련한 부분이며,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기관에서 그를 위한 일들을 차근차근 시행하는 것으로 더 많은 가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길고양이 겨울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오직 내 의지로 했으니,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행동에 대한 책임이다.


겨울이 지나 따뜻한 봄이 오면 겨울집을 깨끗하게 수거하고, 관리하는 것 까지가 선택에 따른 수고일 것이다.


여러면에서 아직은 많이 부족했던 '길고양이 겨울집'이.


그래도, 한 마리의 생명 만큼은 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게 하기를,


한 명의 시민이라도 추운 겨울 길고양이에게 따뜻한 자리를 내어주는 일에 너그러워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본다.




시에서 설치한 길고양이 겨울집에 고양이가 들어가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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