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by 소연

오늘 갑자기 부모님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져서 내가 정말 누군가의 딸이 맞는지, 나의 존재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는 건 생각보다 큰 공허함을 가져온다. 부모님과의 물리적, 심리적 단절은 늘 내게 새로운 외로움을 안겨준다. 혼자라는 감각은 15년을 살아도 낯선 시드니의 도시의 차가운 공기처럼 서서히 스며든다.


퇴근 후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창밖을 보며 수많은 사람을 관찰했다. 통화하며 바빠 보이는 듯한 멋진 정장 차림의 중년 아저씨, 조용히 헤드폰이나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을 보는 청년들 (나 포함), 자녀와 장을 보고 집을 향하는 듯한 젊은 엄마, 그리고 노약자석에 앉아계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사람들을 보며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나만 빼고 이 모든 사람은 돌아갈 가족이나 집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진다. 아니, 아마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 아니라 애인의 집에 가는 걸지도 모르겠다며 위안으로 삼아 보지만, 결국 나는 그럴 애인조차 없다는 걸 깨닫고 나니 뭔가 더 짜증이 났다. 기차 안의 누군가는 그들의 가족과 혹은 애인과 단란하게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겠지 생각하니 정말 너무 부러웠다.


고개를 돌려 챙 모자를 푹 눌러쓰고 친구들과 웃으며 시끌벅적하게 수다를 떠는 고등학생 여자아이들을 보며 나는 학창 시절 겪었던 수많은 나의 어린 시절의 날들이 떠올랐다. 어떤 기분일까,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다 먹고 휘휘 도시락통에 숟가락 젓가락 달그락달그락거리며 가방을 흔들며 집에 가는 기분은, 아침에 휴대전화기 알림 소리가 아닌 주방에서 북적북적 나는 소리와 조금은 화가 난 목소리로 잠을 깨우는 가족이 있다는 건, 그리고 머리를 길게 길렀을 때 교복에 머리카락이 엉겨 붙어 하나하나 때 주는 엄마가 있다는 건 정말 어떤 기분일까 봐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너무 궁금하다.


고등학생 시절 삼삼오오 친구들끼리 모여 수다를 떨 때 나는 친구들이 자기들끼리만 공감할 수 있을만한 일상대화를 나누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 정도의 눈치는 없지 않았기에 한 번도 내색해 본 적은 없지만, 사춘기였던 나는 진심으로 친구들의 지나가는 듯한 대화들이 정말 부러웠다. 예시로 주말에 쇼핑을 갔는데 자신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탈의실에서 등 지퍼를 올려달라고 엄마를 크게 불렀는데 엄마가 탈의실밖에 있지 않아서 짜증이 나는 동시에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봐 너무 부끄러웠다는 어느 한 친구의 말에 나만 빼고 듣고 있던 모두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공감할 때. 그런 대화가 오갈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런 평범한 일상이 뭔지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져서인 것인지 아니면 엄마와 딸 사이의 유대감, 그 끈끈한 관계가 내게는 없다고 느껴져서 그런지 형용할 수 없는 질투와 슬픔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항상 혼자라는 기분 속에서, 나는 다수가 되고 싶었고,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었다. 그래서 학교에 가는 것이 좋았다. 교복을 입고 길을 걷는 그 순간, 나는 그저 한 명의 학생일 뿐이라서. 그것만큼은 나를 특별하며 유별난 아이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하지만 그 일상적인 대화들 속에서, 아무리 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도 나는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걸, 나는 남들과 같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는 그걸 인정하는 게, 그 사실을 마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그런 친구와의 대화는 단순히 그 말을 넘기면 그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머리카락이 블레이저에 잔뜩 묻었다며 친절하게 떼주며 “소연이 너도 머리카락 이렇게 잘 빠지는구나 나도 그런데”라며 한 마디 덧붙였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런데 너는 블레이저에 머리카락 한 올 안 묻네, 신기하다.” 그 순간, 친구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엄마가 머리 빗겨주실 때, 학교 갈 때 머리카락을 롤러로 때주시 거든.” 친구의 대답이 내 귓가에 그리고 내 머리에 맴돌았다. 아마 나도 모르게 흠칫 표정이 굳어버렸던 것 같다. 그 짧은 순간의 침묵은 마치 얼음장 위를 걷는 듯했다. 그런 나의 모습을 친구는 다행히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침묵 속에서 한없이 무겁고 낯선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때 종이 울려 다행히도 그 얼음이 깨졌다. 그때 나는 정말 숨을 곳이 있으면 숨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긴 생머리가 양옆으로 흔들리는 기분은 참 소녀다운 것만 같아 좋아했지만, 그런 내 머리카락이 블레이저에 엉겨 붙는 게 너무 싫어서 며칠 뒤, 결국 싹둑 단발로 자르고 말았다. 긴 머리가 좋았기에 며칠 고민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르고 나니 오히려 여유 없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후련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더는 학교에 대한 애착이 가지 않았다. 17살에서 18살로 나이를 한 살 먹는 게, 마치 20살과 25살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것처럼 그때 내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17살까지의 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어떻게든 그들과 같아지려 억지로 노력했지만, 18살이 되자마자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 18살의 일 년은 여름의 꿉꿉한 날씨처럼 늘 불쾌했다. 하루하루가 내 삶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 찼기 때문일까, 한때 대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나를 위해 제일 좋은 학교라며 보낸 사립학교가 정말 싫었다. 그 학교에 잔뜩 사랑받고 자란 친구들의 여유가 나를 더 작게 느끼게 하였고, 그 와중에 담임선생님의 말이 내 가슴에 날카롭게 꽂혔다. 그래서 학교가 더더욱 가기가 싫었다.


내가 입학했을 때부터 담임 선생님은 나를 정말 싫어했다. 왜냐하면, 나는 엄마, 아빠 없이 어디서 온 지도 모를 전교에서 딱 하나 있는 유학생, 게다가 동양인이었으니까. 그 학교의 명성과 내가 맞지 않는다며, 모두가 있는 앞에서 수치심을 주던 그 선생님이 참 미웠다. 밥 먹고 잠잘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왜 나는 그 선생님에게 계속해서 이유 없이 혼나야 했는지 정말 서러웠다. 그래서 고3 때, 나는 철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한국에 가고 싶었다. 그러면, 더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 같지도 않은 말들을 듣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그때의 나는 매일매일 학교 담벼락에 서서 뛰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면, 내가 다른 학생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그런 생각에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그저 그 순간들을 견뎌냈다. 하지만 매일 그저 견디기만 하는 삶은, 점점 더 나를 지치게 하였다.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나는 점점 더 내 세계로 움츠러들고, 학교 친구들과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내가 가족 없이 호주에 덩그러니 혼자 살다 보니, 사람들은 마치 내가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으며, 오빠도 없는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특히, 어른이지만 누구보다 어른 같지 않았던 나의 담임 선생님에게서 그런 시선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시선이 너무 불편해서, 그 선생님의 귀에 대고 크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나에게도 이 세상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 주는 엄마가 있고, 아빠가 있으며, 오빠도 있다는 걸. 비록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그리움과 사랑으로 언제나 내 곁에 있다는 걸 말이다. 자주 못 보지만, 그래도 내게도 가족이 있다는 걸, 떨어져 있어도 늘 마음속에 있는 것이 가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 멍청한 선생님에게 말이다. 그런 마음이 들 때쯤, 아주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가족들과 함께 살던 그 시절, 엄마는 큰 도끼 빗으로 내 머리를 빗겨주셨다. 그때는 머리카락이 뽑힐 만큼 한 움큼 움켜잡고, 정갈한 포니테일로 묶어주던 기억이 났다. 그런 나날들이 너무 그리워져서 내 마음은 점점 더 외로워졌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애착 핑크색 바비 이불을 내 몸에 칭칭 감고 또 오빠가 내가 10살 때 사준 해질 대로 해진 곰 인형도 부둥켜안고 그리운 마음에 한참을 울었다.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울며, 그렇게 나의 18살 365일이 지나갔다.


그렇게 2019년이 되기 전에 난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그런데 내 삶에서 가장 괴로웠던 날들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한번 나는 시궁창에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 해 1월이 시작되자마자 내게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합격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기쁨이 있었지만, 반면, 주치의의 말에 나는 삶의 끝자락을 느꼈다. “어쩌면 암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내게 삶의 절망처럼 다가왔다. 사실 고3 때 대학교에 가는 게 아주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원하던 학과에 합격한 그 소식에 내심 기뻐했지만, 그날 내가 더는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으니 너무 억울했다.


학창 시절 내내 스트레스 속에서 머리카락이 빠지고, 노인들만 걸린다는 메니에르병까지 생겨 귀가 먹고 어지러워 토를 했던 그 시절에도, 사실 나는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들을 날에 찾아왔다는 사실이 너무 아이러니하고도 씁쓸했다. 내 삶이 엉켜서 풀 수 없을 것 같은 실 뭉텅이처럼 느껴져, 울기보다는 웃음이 나왔다. 마치 미친 여자처럼 지하철에서 실소가 끊이지 않았다. 지하철에 앉아 있던 승객들은 나를 미친 사람처럼 쳐다보며 혀를 차며 지나갔지만, 나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신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원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죽음을 선사하실 거면, 고요히 잠든 사이에 나의 생명을 앗아가시라” 열심히 기도했을 때는 들어주시지도 않으셨던 신이, 이제야 좀 숨을 쉬려 하니, 잔인하게도 나를 또다시 도마 위에 올려놓은 셈이었다.


어쩌면 졸업 후 갔던 일식집에서 코스 요리로 올라간 생선들이, 그들의 운명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도마 위에 올려지는 것처럼, 나 역시 이제 그 고통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는 것 같았다. 화려한 조명 아래, 사람들은 내가 살아있는 채로 숨을 쉬며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걸 모른 채 음미하며 즐기고, 나는 그 무대 위에서 고요하고 처절하게 나의 끝을 맞이하는 듯했다. 그 어떤 것도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을 막을 수 없을 테니, 이 모든 화려한 외양 뒤에 숨어 있는 내 고통을 나는 홀로 감내해야만 하겠구나. 참으로 쓸쓸한 죽음이겠구나. 그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올라왔고, 속이 울렁거리며 어지러웠다. 처음으로 공황장애가 무엇인지 실감하며, 숨이 막히고 호흡이 가빠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나는 남들과 같이 평범한 죽음도 맞이할 수 없구나, 그런 생각에 그냥 한참을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울었다. 조금 불쌍해 보였던 걸까, 어느 할머니가 내게 노인석 자리를 양보했다. 하지만 앉고 싶지 않았다. 왠지 내가 그 할머니보다 먼저 갈 사람이라 그런 자리를 주는 거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이상하게도 삶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이 아이러니한 일인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19살의 나는 대학교에 가고 싶었다. 동기들과 어울려 술도 마셔보고, 드라마에서 보는 캠퍼스 연애도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도 삶에 애착을 두게 된 것 같다. 하지만 혹시 몰라서 내가 죽으면 장기 이식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도 했다. 그때 너무 무서웠다. 수술이 잘못될까 봐 두려웠고, 수술 후에도 병이 재발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한부처럼 불안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너무 조마조마했다. 사실, 지금 24살이 된 나에게도 여전히 그 불안은 무서운 일이다.


어찌어찌 수술을 마치고 대학 진학을 미룬 채 병원에 몇 달 입원했을 때, 작은 튜브가 내 양옆에 꽂혀 복강에서 피를 빼는 동안, 나는 그 고통을 참아내며 그 순간을 견뎠다. 몸이 아파도, 이 고통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끼며 버텼다. 그 작은 튜브가 내 몸에 꽂혀 있던 그때, 나는 비로소 내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만약 누군가 그 시절이 불행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수술 자국이 배에 남고, 손과 발, 얼굴이 부풀어도, 정신과 약과 호르몬 약을 처방받는 것 외에도 주사를 내 배에 직접 놓아야 한다 했어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다시 삶을 살게 해 주셔서 똑바로 살겠다고 기도했다.


그러나 만 24살이 된 지금, 솔직히 말하자면 그 약속을 잘 지킨 것 같지 않다. 지금도 스트레스를 핑계로 폭식을 자주 하고,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을 해치는 행동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어쩌면 나는 위선자일지도 모른다. 위기 상황에서만 신을 찾고, 그때만 간절히 기도하는 그런 간사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 만큼 공부도 하고, 나의 삶에 양분이 되는 책도 읽으며, 운동을 매일 하지는 않지만 자주 가고 있다.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나의 이 반복은 비겁함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라고 믿고 싶다.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수많은 모순 속에서도, 내 작은 노력이 언젠가는 빛을 발할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그래서 올해는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나쁜 습관을 끊어내려 한다. 인스턴트 음식, 인간관계, 그리고 유통기한 짧은 만남도 말이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끊이지 않지만, 그래도 노력해보려 한다. 언젠가는 나약한 마음을 이기고 나아가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말이다.


과연 내년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덜 외롭고, 조금 더 나아진 정신과 건강한 몸을 가질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다짐을 글로 적어본다. 내 마음가짐이 흔들릴 때, 이 글을 읽고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2024년의 나, 정말 수고 많았어. 2025년에는 더 많은 의미 있는 순간들이 가득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2025년 1월 10일 Sam Kim의 MAMA DON`T WORRY 듣다가 삘 받아서 적는 글. 진짜 내 마음속 부동의 최애 곡. 홀로 어린 나이에 외지에 산 사람들의 마음은 다 똑같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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