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 Z의 시선으로 바라본 디지털 시대의 연애법
그와의 대화에는 늘 똑같은 패턴이 있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라고 묻는 나의 질문에 그는 "응, 그냥 일 끝나서 친구랑 밥 먹고 이제 운동 가려고"라고 답한다. 그가 먼저 내게 무언가를 묻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장문의 메시지로 일상을 공유해도, 그의 반응은 짧고 건조했다. "그랬구나, 재밌었겠네." 마치 자동응답 같았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조심스러운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 민감한 주제로 의견을 나눌 때도 그는 늘 말을 빙빙 돌렸다. 다가가면 물러나고, 궁금하게 만들면서도 선을 긋는 사람. 그런 그의 애매한 태도는 더 알고 싶게 만들면서도 내 마음을 지치게 했다.
요즘 시드니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중이다. 코끝을 톡 찌르는 바람에 계절이 바뀌었다는 걸 알았다. 회사 근처 카페에서 산 커피가 하루 중 가장 따뜻한 순간이 된다. 이렇게 사소한 이야기마저 그에게 전하고 있는 나 자신이 가끔 우습게 느껴진다.
그는 지금 시애틀에 있다. 우리의 시차는 19시간. 내가 잠들 무렵 그는 하루를 시작하고, 내가 눈을 뜨면 그는 잠자리에 든다. 엇갈리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매일 대화를 이어갔다. 이 관계는 미국에서 혼자 여행 중 켠 데이팅 앱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프로필은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묘한 끌림이 있었다. 우연히 SNS를 공유하게 되었고, 그는 점점 내 스토리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가고,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첫 영상통화 이후 그 불편함은 사라졌다. 시시콜콜한 이야기 속에 그는 어느새 나의 하루에 스며들었다.
그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았다. 학생 때 수영을 했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며, 시끄럽고 요란한 축제를 좋아한다는 것 또 그가 술에 약한 편이고 만화 보는 것을 좋아한 다정도 뿐이었다. SNS 속 그의 사진은 카메라 앞에 서는 걸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가족과 함께 산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얘기는 없었다, 그저 동생이 있다는 정도. 이 정보들이 내가 아는 그의 전부다.
그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딱 한 번, 연애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장거리 연애에 지쳐 지금은 쉬고 있다는 말, 그리고 "폰과 연애하는 기분이었다"는 그의 회의적인 한마디. 그 말은 곧, 나와의 관계에도 닿아 있는 문장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고백이 나에게는 넘을 수 없는 큰 벽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그는 별말을 하지 않았고,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말했다. 내 감정, 하루 일과, 친구와 나눈 대화, 최근에 들은 음악, 짜증 나는 상사의 이야기까지.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나는 늘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돌이켜보니 원맨쇼도 아니고 혼자 삽질하며 문자를 보낸 셈이다.
처음에는 그와의 대화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고, 그가 내게 관심을 주는 듯한 기분에 설레발을 쳤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우리의 대화는 점점 시들해졌다. 서로 더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심심할 때만 연락했다. 그걸 나는 알면서도, 그의 "뭐 해?" 한 마디에 또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답장을 하면, 나는 또 말이 많아지고, 그는 장단을 맞추듯 반응했다. 이런 대화는 며칠간 즐거웠지만, 결국 그는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는 사람이란 결론에 다다랐다. 그는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현실의 사람을 원했고, 나는 대화를 통해 유대감을 쌓아가는 사람을 원했다.
나는 늘 말했고, 그는 늘 들었다. 더 정확히는, 내 말풍선을 읽고 '그랬구나'라고 반응했다. 언젠가 이 무미건조한 대화에 서로 지치면, 그는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 것이고, 나도 묻지 않을 것이다. 왜 연락하지 않느냐고. 그저, 안부를 묻지 않아도 괜찮은 사이가 될 것이다.
찰나의 시간 속에서, 나는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애정을 품었다. 그도 나를 궁금해하길 바랐다. 그래서 누군가 지금 내게 “만난 적도 없는 사람과의 대화만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아마 지독한 로맨티스답게 “네, 가능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떻게 얼굴도 안 본 낯선 이를 사랑할 수 있냐고 내게 묻는다면, 되려 난 질문하고 싶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사는데 무엇이 불가능하게 쓰냐고.
보이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 이건 아마 내가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믿고 사랑하는 이유와도 비슷할지 모른다. 만지지 않아도 느낄 수 있고, 그로 인해 내 마음이 치유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덕에 나는 만질 수 없는 사람에게도 애정을 느껴버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가 그를 좋아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나도 내 감정에 100% 확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그 사람보다, 그와의 대화 속에서 만들어진 환상에 빠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영화 “Her” 속 테오도르처럼.
이 영화 속 주인공 테오도르는 이혼 후 공허한 삶을 살아가던 차, 사만다라는 인공지능과의 대화를 통해 다시 삶에 활기를 되찾는다. 나 역시 알고 있다.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사랑하게 된 건 외로움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그의 감정은 코드로 짜인 프로그램을 향했지만, 진심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 그에게 느낀 감정이 환상이었을지 몰라도, 난 진심이었다.
사람들은 외로워서 사랑에 빠진다. 대부분은 현실 속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지만, 나는 정신적인 유대감만으로도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영화가 내겐 피부처럼 와닿았다. 내 감정도 테오도르와 다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사랑한 건, 그가 아닌 내 상상이었다. 그 감정은 외로움을 메우기 위한 환상이었고, 이제는 인정할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사랑은 언제나 이상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때로는 환상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나는 그와의 대화 속에서 결핍과 기대, 외로움과 욕망을 마주했으니 말이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알게 된 것은, 그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누군가를 알고 싶다는 마음은 어쩌면 내 안의 공허함이 만든 기만일지도 모른다. 분명 나의 그리움은 그를 향했지만, 그가 나에게 있어 그리운 사람은 아니었다.
결핍은 기대를 낳고, 기대는 실망으로 자랐다. 외로움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다가왔다. 어쩌면 나는 그를 통해 나를 더 알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내 감정이 진심이었는지, 진심이길 바랐던 건지는 몰라도, 그와의 몇 마디 대화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흔들림이 사랑이라면, 참으로 불완전하여 아름답다.
우리는 결국 만나지 않았다.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결국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짧은 계절 동안 우리는 하루를 나눴고, 대화가 익숙해질 무렵 나는 그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 목소리, 웃는 얼굴까지.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제는 그의 하루가 궁금하지 않다. 다만 아주 가끔, 마지막 메시지를 다시 읽는 나를 발견한다. 그것이 미련인지, 습관인지, 혹은 지나간 계절을 다시 껴안고 싶은 마음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떤 이유든 상관없다. 이제는 그 계절도, 그 안의 온기도 희미하기 때문이다. 그저 그는 지나간 계절의 온기였고, 나는 그 온도를 기억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