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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Nov 23. 2023

취향 없이 살기

마음 미니멀리즘


겨울 패딩 한 벌 없는 단벌 인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올겨울엔 패딩을 장만해 보겠다는 결심으로 중고거래 앱을 몇 번 드나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동안 옷을 사지 않은 터라 오랜만에 하는 쇼핑이 몹시 피곤한 일이 되어 버렸다는 것. 날은 점점 추워지는데 그냥 올겨울도 코트 한 벌로 버텨 볼까 싶은 귀찮음이 샘솟던 참이었다. 그러다 머릿속에 스친 생각 '그냥 엄마한테 안 입는 패딩 없냐고 물어보자.' 가장 쉬운 방법이 가까이에 있었으니.


다른 사람이 입던 옷을 얻어 입겠다는 건 취향은 포기해야 하는 일이다. 같은 또래 사이에서도 취향이 각양각색으로 갈리는데 연령이 다른 사람에게 옷을 물려받는다면 내 마음에 드는 옷일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하다.


어머니가 보여주신 패딩도 그랬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패딩을, 그것도 안 입는 옷이 많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여러 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후보군이 모두 하나 같이 내 취향에 빗나가는 옷들이다. 선택지가 많으니 더욱 고르기가 힘들었다. 하나밖에 없으면 고민할 것도 없이 'YES'일 텐데. 새 옷을 사든 헌 옷을 사든 물려 입든 선택지가 많으면 취향이라는 기준이 끼어들어서 참견을 하는 건 똑같다.


그중에 그나마 내가 입을 수 있을 만한 무난한 디자인과 색상인 롱패딩을 하나 골랐다. 보고 또 봐도 내 취향은 아니다. 허리 라인이 들어간 재킷이나 코트를 싫어하는데 하필 이 옷이 딱 그런 옷이다. 가릴 처지는 아니지만 모처럼 내 취향이 한결같음을 확인했다. 여전히 보온성이라는 실용성보다는 디자인부터 보는 나를 보며 내면의 목소리가 묻는다.


'취향 버리기로 한 거 아니었어?'


패션 산업이 유발하는 환경오염에 일조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새 옷은 사지 않고 이왕이면 옷은 물려 입을 수 있으면 물려 입자고 마음먹은 게 언제였나. 이게 참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아직까지 내가 좋아하는 패션 스타일을 버리기는 힘든 것 같다.


패션 취향을 짧게 논했지만 취향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은 훨씬 많다. 음식부터 시작해서 화장품, 향수, 음악, 영화, 드라마, 미술, 연애에 있어서는 연애 상대에 대한 취향까지 취향을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다. 그 많고 많은 취향들에 대해서 나는 어느 순간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토록 좋아했던 음식들을 더는 입에 대지 않는 나를 보고 입맛도 변한다는 것을, 지루한 음악이라고 생각했던 클래식을 좋아하게 되면서 음악 취향도 바뀐다는 것을, 취미가 게임에서 독서로 바뀌는 것을 보고 취향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던 취향이 순식간에 버려지는 것을 보고 내가 가진 세세한 취향도 마음만 먹으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취향이란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한 게 아닌지, 취향이라는 좋고 싫음에 대한 판단이 과연 필요한 일인지, 취향이 더 나은 선택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취향을 한번 버려 보기로 한 것이다.




미니멀리즘이 모든 것을 최소화하고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취향까지 포기하란 법은 없다. 오히려 미니멀리스트들은 물건을 구입할 때 실용성과 내구성을 고려할 뿐만 아니라 취향에 맞는, 자신이 오래 좋아할 수 있는 물건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한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지금 단순히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기 위해 이러는 게 아니다. 나를 상대로 하나의 실험을 해 보고 싶었다.


내가 나 자신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어디까지 비울 수 있는지, 즉 나의 한계를 알아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취향을 내려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화장을 멈추고 오랜 취향이었던 긴 머리를 단발로 짧게 자르고 염색을 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했다. 외모에 대한 취향이 학습된 욕구인지 타고난 본능인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도 취향을 버림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취향이 아닌 옷을 입는, 사소한 행동을 시작으로 취향을 버릴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동안 비움을 통해 알게 된 것이 한 가지 있다. 나의 한계를 알면 나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강해지며 한계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이번에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나는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할 뿐이고 스스로 확인할 뿐이다. 내가 미적 감각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인지. 나의 호불호에 흔들리지 않고 더 나은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어디까지나 나를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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