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성실함이 숙청의 이유가 될 때

부당해고부터 글로벌 기업 자금 사고 수습까지, 나의 생존 기록

by 하루진

"시청으로 오십시오. 국내 대표 로펌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25년 차 직장 생활을 통틀어, 가장 차갑게 느껴졌던 호출이었습니다.

한 유망한 스타트업에서 시작된 균열은 저를 서울 도심 한복판, 거대 로펌의 미팅실로 몰아넣었습니다. 미국 CES 혁신상을 받고 100억 이상의 투자를 유치하며 승승장구하던 회사였습니다. 저는 그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재무 전략을 총괄하는 핵심 매니저로.


매일 아침 7시 반, 임원 회의가 시작되기 전 저는 법인차를 몰아 회사로 향했습니다.

차 안에서는 가호의 <시작>을 크게 틀었습니다. "원하는 대로 다 가질 거야." 그 가사가 가슴에 박혔습니다.

주차를 마치고 서서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저는 머지않아 임원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확신은 절반의 진실이었습니다.

저는 성과를 인정받은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략적으로 배치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대표이사는 모든 의사결정이 숫자로 집결되는 저를 '객관적 증인'으로 세워두려 했던 것이죠. 그의 고독한 방어 전략 속에서 저는 저도 모르게 전장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만심이 눈을 가린 그때, 저는 끝없는 추락이 바로 눈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최대주주는 대표이사를 몰아내기 위해 그가 아끼던 핵심 인력을 숙청하듯 쳐내기 시작했습니다.

살생부의 첫 번째 이름은 저였습니다. 로펌 미팅실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노트북 포렌식 동의서'였습니다. 회사는 광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전 대표와 전화 통화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원급 직원까지 권고사직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주에게 충성을 증명하고 싶었던 누군가가 복도를 지나다 밀고를 했던 모양입니다.


저보다 더 혹독한 자리에 놓인 것은 대표이사였습니다. 수많은 변호사에게 둘러싸인 그는 뜻밖의 방법을 택했습니다. 모든 대답을 일부러 영어로 쏟아낸 것입니다. 영어가 능숙한 단 한 명의 변호사만이 그를 상대할 수 있었고, 그는 그렇게 다수를 소수로 고립시키며 판의 주도권을 되찾았습니다.


저는 유죄 낙인이 찍힌 채 짐을 쌌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당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했고, 끝내 승소했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복직 이행을 거부했습니다. 저는 멈추지 않고 전문 변호사를 선임했습니다. 노동위 결정문을 증거자료로 제출해 법적 다툼을 이어갔으며 법원에서도 승소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부당해고 결정문은 회사의 의지와 무관하게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으로 생존의 기반을 먼저 챙겼습니다.

회사는 노동위원회의 결정에도 끝까지 버텼습니다. 복직 대신 반기마다 500만 원의 '이행강제금'을 국가에 납부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저는 법무사 없이 전자소송으로 직접 회사의 주거래 통장을 가압류했습니다.

실력으로 낼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반격이었습니다. 결국 회사는 버티다 몇 년뒤, 폐업 신청을 했습니다.

법적으로는 완승이었지만, 실제 제게 돌아오는 금전적 보상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세상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요.?

주주에게 줄을 섰던 임원들도 결국에는 토사구팽 당했습니다.

반면, 대표이사는 미국계 상장사의 아시아 총괄을 거쳐 연 매출 4,000억 기업의 수장으로 재기했습니다.

상처받았던 저는 회복의 시간을 거쳐 그의 지인을 통해 조용히 현업으로 복귀했습니다.

지금 저는 임직원 400명, 글로벌 본사 기준 65,000명 규모의 기업에서 자금팀 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입사 당시 직면했던 100억대 규모의 자금 사고를 수습했고, 횡령이 재발하지 않도록 자금 통제 시스템을 다시 세웠습니다. 본사는 그 과정에서 보여준 저의 거버넌스 이행과 커뮤니케이션에 깊은 신뢰를 보내왔습니다.


세상을 다 가질 것 같던 시절의 자만심은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한 가지 단단한 문장이 남았습니다.

"끝까지 가봐야 이게 정말 좋은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 다 열심히 하지 마세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일하다가 쓰러지면, 회사는 냉정하게 당신을 밀어냅니다.

제가 곁에서 직접 목격한 비정한 진실입니다.


오직 하나, 당신을 살릴 본질에만 집중하세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기분으로 내던져졌던 제가, 이제는 방황하는 동료 직장인들에게 제 시선을 나눠드리려 합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력을 갖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만듭니다.


부당해고의 끝없는 추락에서 대형 자금 사고를 잠재운 해결사가 되기까지. 제 생존 기록과 전략을, 이제 하나씩 들려드리겠습니다.


P.S. 1화는 화요일에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