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편-④] 여성 ADHD의 진단이 늦어지는 이유들
한번은 ADHD 진단을 위해 '종합심리검사'를 받았다. 검사 후 종합적 평가를 듣는데, 알 수 없는 타격감이 찾아왔다.
"아주 여성스러워요. 차분하고 순종적이고요. 심리적 상태를 신체 증상으로 표현하는 '신체화'도 보이네요."
내가 생각하는 나는 오히려 행동거지가 투박하고 여성성에 갇히기 싫어하는 유형이었다. 내가 여성스러운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 대목에서 그 말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걸까? 신체화라면, ADHD 증상에 대한 내 얘기를 단순한 심리적 방어기제로 여기시는 건가?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고개는 제멋대로 주억거렸다. 멋쩍은 웃음, 수줍은 눈빛, 끄덕끄덕. 선생님이 "ADHD는 아닌 걸로 보여요. 그러니까 너무 예민하게 ADHD 진단에 얽매이지 말고..."라는 말에도 나는 버튼 눌린 듯 준비된 반응을 보였다. 상담센터를 나오고서야 깨달았다. 아, 뭔가 잘못됐다.
묻지 못한 것들이 머릿속에 난무하고 속으로는 "그런 게 아니라고요!!!" 하고 포효하면서도 고분고분한 모습만 유지하려 애쓴 거다. 이만큼이나 수동적인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니... 혹시 선생님이 말씀하신 '여성스러움'은 이런 건가?
여성이 직접적인 부정적 감정표현을 억누르도록 사회화됨을 지적하는 연구는 많다. 소라야 시멀리는 다수의 문화에서 여자아이들은 '더 순응적이고 덜 적극적이고 덜 지배적이기를 요구받는다'고 썼다. 타인을 우선시하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실망과 좌절, 분노, 두려움은 감추라는 기대에 부응해 '예쁜 표정'을 지음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달래도록 암묵적으로 교육받는다. '그렇게 여자아이의 미소는 진정성이 부족해지고 자기 이해에서도 진정성이 부족해진다'.(<우리의 분노는 길을 만든다> 39쪽)
그러니, 알고 보면 내 그런 태도는 오히려 ADHD 가능성을 재고해 보는 단서가 되어야 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 행동하려는 의지가 클수록 ADHD인의 증상 표현은 감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ADHD 질환 진료 데이터'에 따르면 20~30대 젊은 여성의 ADHD 발병률은 최근 10년간 7배 가까이 늘었다. 20~30년 전까지 아동 ADHD의 남녀 비율은 9:1 정도였다고 한다.(반건호, 114-115쪽) 세계적으로 전체 성인 인구의 5% 정도가 ADHD를 가졌다는데, 그럼 그 많은 ADHD 여아들은 그동안 어디에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걸까?
여러 학자들은 '사회나 가족의 기대치가 남아와 여아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점'을 원인의 하나로 꼽는다. 남자아이가 남자다움을 강요받듯, 여자아이는 정신없이 뛰거나 시끄럽게 떠드는 경우 직간접적으로 더 많은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
소라야 시멀리는 2014년 몇몇 대학의 연구자들이 4개국을 대상으로 젠더와 취학 전 준비상태에 관해 시행한 대규모 연구를 소개했다. "미국의 아이들은 자기조절능력에서 젠더 간 커다란 격차를 보였다. 연구자들은 젠더에 따른 부모와 선생의 기대치가 아이들이 행동하고 평가받는 것에,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통제할 책임감을 느끼는지 여부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아냈다. 또다른 연구가 지적하듯, 남녀의 자기통제 차이는 유전적 소인과 사회문화적 기대의 상호작용(소위 후생유전학)이 반영된 것에 가깝다."(34쪽)
'여자아이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를 내면화한 아이는 산만하고 충동적인 성향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법을 찾아낸다. 수업시간에 박차고 일어나는 대신 머릿속으로 온갖 모험을 한다. 눈에 띄게 몸을 흔드는 대신 낙서를 끄적이고 손가락을 꼬물거린다. 하지만 내면에는 좁은 울타리 안을 빙빙 도는 야생마가 있고, 자주 숙제와 준비물을 빠뜨리거나 엉뚱한 말을 하는 등 공동체에서 안정감을 갖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병을 일찍 발견할 기회는 한층 멀어지고 성인기에도 힘든 시간을 보내기 쉽다.
나도 정신과 신체가 분리된 느낌 속에 학창시절을 보냈다. 몸은 교실에 앉아 있었지만 제대로 수업을 들은 적이 거의 없었다. 창밖을 흘끔거리며 저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일은 심심풀이가 아니라 본능이나 천형 같았다. 공허하고 우울했다. 종종 야자를 빼먹고 논밭을 가로질러 2시간 떨어진 집까지 걷거나 행선지 없이 버스를 탔다.
돌아보면 충동성을 억누르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큰소리를 내며 거칠게 행동할 수 있는 건 청소시간뿐이었으므로, 나는 늘 책상을 교실 뒤쪽으로 밀 때 아주 폭력적으로 밀쳐서 주위의 아이들을 놀라게 했다.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가 휴일이면 하루 10시간씩 전단지를 돌리면서 활동 욕구를 풀었다. 밤에 친구와 산책을 하다가 제멋대로 사라져버리고, 갑자기 학교를 빼먹고 멀리 떨어진 도시에 번지점프를 하러 가기도 했다.
참고를 위해 내 학생시절에 대한 정보를 좀더 드리고 싶다.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친해지는 친구는 모두 일대일 관계였다. 아이들이 무리 지어 노는 걸 보면 정말 신기했다. '저게 재밌나? 힘들지 않나?' 여러 명이 섞일 때의 대화 흐름이나 게임 규칙을 잘 따라가지 못해서다.
"넌 역시 특이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화단에서 커다란 거미를 잡아와 키웠다. 교복단추를 바꿔달고 타이에 수를 놓고 책상을 온통 락커로 칠하는 등 교칙의 틈새를 찾아 개성 표현에 주력했다. 직접 만든 머리장식 때문에 버스를 타면 "쟤 봐"하며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말 없는 아이였지만 점차 전교생에게 '좀 이상한 애'로 인식되었다.
선생님들은 한숨을 쉬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어떻게 혼내야 할지 몰라하셨다. 생활기록부에도 이렇다 할 특이사항이 없었다. 매번 지각 직전에 놓이거나 준비물을 잊었지만 부모님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티가 나지 않았다. 딱 한 번, 고등학교 시절 나의 교묘함을 매의 눈으로 간파하신 선생님이 '조용해 보이지만 산만함'이라는 지혜로운 의견을 남기셨을 뿐이다.
하지만 대학에서도 매우 관심 있는 수업의 집중도가 20~30% 정도였고, 늘 지각하거나 졸았다. 친구의 공책을 빌리거나 책만 붙잡고 벼락치기로 성적을 받았다. 겨우 대여섯 명이 원탁에 앉아 듣는 대학원 수업에서조차 집중하지 못했고 대답도 잘 하지 못했다. 핑계가 있을 때마다 중간에 빠져나갔다가 돌아오지 않기도 일쑤였다. 한 번은 보다 못한 전공 교수님이 나를 따로 불러 충고하셨다. "저렇게 공부해서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면목이 없었지만 어떤 약속을 할 수가 없었다. 강의 중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봐도 능력밖이었다.
나는 모든 것에 참여했지만, 내 마음은 모든 것에서 겉돌았다. 요일별로 스터디를 참여하고 밤을 새가며 발제도 빠짐없이 했다. 그러나 한편 신성한 상아탑에서 나만 불순분자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한 선배는 내게 "넌 시체 같아. 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냐?"라고 말했다. 한국어교원자격을 얻기 위해 버티고 있었던 대학원이었지만 속으로는 그런 내가 부끄러워 너무 도망치고 싶었다. 동학 간에 서로의 논문을 읽어주고 끌어주어야 하는 분위기도 남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기 힘든 나로서는 버겁기만 했다.
가까스로 과정을 마친 후에도 늘 아쉬웠다. 결국 몇 년 후 사이버대학원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실시간 화상세미나에선 딴생각을 하다 질문을 받고 당황하는 일이 많았지만, 다행히 기본 수업은 모두 녹화된 영상으로 들었다. 놓친 부분을 몇 번이고 돌려볼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학기에 한두 번은 서울로 올라가 오프라인 모임에도 참여했다. 일반 오프라인 대학원처럼 유대관계를 강조하지는 않는 분위기여서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교육기관에서 만족스럽게 공부한 기억이다. 내 단점을 보완하려면 면대면이 아닌 온라인 수업을 들어야 했던 거다.
젠더 인식은 ADHD 진단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도 가장 소홀히 여겨져 온 문제다. 뒤늦게 자가진단을 하고 전문가를 찾더라도 여성의 ADHD는 간과되기 쉽다. 진단 기준과 도구가 남성의 경향성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지수 임상심리학자는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정신의학계에서 진단을 위해 사용하는 권위 있는 편람)'의 개발을 주도한 위원회의 구성원이 모두 남성이었다는 점, 정신장애 묘사에 전반적으로 남성 중심적 언어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 ADHD 진단 기준 역시 남성의 전통적 성 역할인 '목표지향적' 활동이나 '성취'에 치중해 있다는 점 등을 언급한다.
여성도 여성의 방식으로 과잉행동과 충동성, 공격성을 드러내지만 DSM은 남성적 표현 방식만 반영하고 있어 여성 ADHD인의 증상이 과소 추정되는 점도 지적된다. 측정 도구는 주의력과 관련된 속성 자체(정보처리 속도, 정확성, 지속성 등)를 묻기보다 겉으로 관찰되는 '행동적' 특성(충동성, 산만함 등) 위주로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
20년간 ADHD를 진단해 온 경희대 소아정신과 반건호 교수는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정신장애 기준을 만들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가 군대 징집 기준 마련이었기 때문에 남성 위주의 기준이 반영된 것도 훗날 ADHD 진단 기준이 남성 편향적으로 치우친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나는 왜 집중하지 못하는가>, 188쪽)
여기에 또 하나, 정신건강 전문가의 편견도 영향을 미친다. 경험 많은 의사나 상담사, 임상심리학자도 개인의 잠재적 고정관념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여성은 쉽게 불안하고 예민해진다' '여성은 신체적 고통을 호소해 의존하고 관심을 받는다' 등이 무의식적으로 판단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내 경우 그것이 '예민한 여성 → 생각 과잉 → 스스로 ADHD 주장'이라는 추측 알고리즘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정서적으로 민감하고 주저하는 특성은 ADHD 증상 때문에 생겨난 일종의 생존 전략인데, 원인과 결과를 섣불리 뒤바꿔버린 거다.
진료에 암묵적으로 적용되는 성 편견은 여성이라면 따로 근거를 찾을 필요가 없을 만큼 공공연하게 지적되고 있는 현상이다. 마야 뒤센베리의 저서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에서 많은 근거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전편에서 언급한 다른 문제들-공존질환과의 혼동, 증상 유형의 다양성, 지적 활동과 사회적 성취 관련 선입견 등-이 작용한 결과로 나는 여러 번 ADHD 진단에서 비껴났다.
종합심리검사 후 차분하고 순종적인 태도에 대한 평가가 "주의력을 주로 보는 다른 검사를 받아보자"는 권유로 이어졌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전문가 개인의 문제로 돌리기보다 '숨겨진 문제들'을 인지하고 논의하는 분위기가 일반화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환자 스스로도 젠더 문제가 의학적 진단과 치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의식할 필요가 있다.
'지식이 만든 편견은 남녀 모든 환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남성은 여성에게 더 흔한 질병인 우울증, 편두통, 섬유근육통, 유방암을 진단 받기 어렵다고 여러 논문은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편견은 여전히 여성인 경우 더 극복하기 어렵다. 결국 진단이 통계적인 예측과 반대인 경우는 개별 환자의 증상을 더 자세히 들으려는 의지가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데 훨씬 중요해진다. 여성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이 다소 예상 밖이더라도 환자의 보고가 신뢰할 만하다고 믿어야 한다. 자폐증이나 주의력결핍장애처럼 '남성의 질병'이라는 고정관념에 갇힌 다양한 질병을 앓는 많은 여성은 자신의 병명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경우에도 의사가 그런 가능성에 대해 완강하게 거부한다고 말했다.'(167쪽)
오해하기 쉬운데, 이것은 여성 ADHD인만이 힘들고 남성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 ADHD의 발견이 늦어지는 원인과 현재의 ADHD 진단이 가지고 있는 경향성에 대한 얘기다.
과하게 눈치 보고 작은 것도 걱정하는 습관은 성별을 떠나 많은 성인 ADHD인들이 공유하는 모습이다. 상황을 잘 따라잡지 못해 자기 의견과 결정에 확신이 없고, 민폐될 일을 줄여서 무리에서 배척당하지 않으려 애쓰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덜렁대고 산만해 꾸준히 지적을 받는 것 역시 낮은 자존감을 형성하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이들은 더 노력한다. 말하자면 자기를 탈탈 털어서 쓴다. 사회의 기대치에 맞춰 자신을 엄격히 감시하고 남들의 두세 배로 시간과 수고를 들여 차이를 메우려 한다. 그리고 의식하지 않은 그 '노력' 때문에 병은 감추어진다.
아니, 이런 사악한 모순이 다 있나. 환자의 노력이 진단을 방해한다니! '보통'으로 보이려 애쓰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닌데, 그간 대충 보통으로 보였으니 보통이 아닌 것 같다고 해도 보통으로 넘긴다.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분투'라는 무거운 말을 자주 떠올렸다. 하지만 내가 이 낱말에서 더 크게 느끼는 것은 생명력과 생동감이다. 셀 수 없는 난관으로 이루어진 일상을 하나하나 쌓아서 지금에 와 있는 사람들의 힘을 생각하면,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소름이 돋는다. 살아보겠다고 마음 밑바닥부터 솟아나는 그 에너지가 너무도 대단하고 근사해서. 좌절하고 무기력해진 시간조차 삶을 버리지 않고 이어가는 의지의 한 모습이다.
'ADHD 환자는 모두 계속 노력하는데, 이것이 강력한 치료 자산'이라는 심리학자 Young과 Bramham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정신질환이나 장애가 있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평생 자신의 부족함을 감당하느라 그런 고난을 감당하게 해 준 잠재력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
나를 당당히 드러내는 일은 여전히 어렵지만, "넌 너무 여려"라는 말에 더는 주눅 들지 않는다. 약해질 수밖에 없는 많은 요인을 갖고도 줄기차게 몸부림친 과정을 떠올린다. 사소한 힘들을 모아놓고 보니 백두산만 해 보인다. 그 힘은 야생마 같고 천둥벌거숭이 같은 자연 상태의 내가 타고난 순수한 재능일지도 모른다.
* 반건호 교수는 여아가 공존질환에 취약한 환경을 진단의 어려움 중 하나로 지적한다. 여아가 남아보다 청소년기에 빨리 진입하고, 그만큼 감정적 어려움에 일찍 노출되어 우울증, 불안장애 등을 갖기 쉽다는 것이다.(123-124쪽)
늘 어딘가 남과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서른에야 ADHD라는 병을 처음 알았고, 서른여덟에 성인 ADHD 확진을 받았습니다. 실체를 모르는 병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사람들 각자가 품고 사는 보이지 않는 아픔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많은 아르바이트와 직장을 거친 후 자신에게 맞는 생활을 찾은 지금, 저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보이지 않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분들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손을 흔들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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