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시간이 달리는 ADHD

[치유편-③] 약도 쓸 수 없는 몸, 답이 없을까(1)

by 묘보살과 민바람

내가 먹는 스트라테라에는 드물지만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 황달과 간 손상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살 충동이다. 후자는 본격적으로 찾아온 바 없지만 전자는 나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얼굴이 눈에 띄게 노래졌다. 다른 정신과 약을 먹었을 때도 눈 흰자가 노른자에 가까워지는 증상이 있어 복용을 중단했었다(약을 안 먹으면 색이 돌아온다). 지방간도 있는 터라 약 복용을 피하다가, 그래도 한 번은 약을 제대로 먹어보고 싶어서 한 달 정도 중단 없이 먹었었다. 그러다 얼굴색이 영 마음이 쓰여 다시 단약 중이다.


단약 후 3주 간 땅파고 들어가는 무기력과 우울이 찾아왔다. 결국 다시 약을 먹고 이 글을 쓴다. 약을 끊을 수 없게 된다는 게 이런 거였을까? 아니면 약이 아닌 다른 요인들이 영향을 미쳐 일어난 현상일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이제 약 없이 사는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긴 세월세월 약 없이 살아오며 얻은 요령을 돌아보면서 이 과도기를 건널 힘을 얻어야겠다.


20대에는 하루 걸러 하루 밤샘이었던 것 같다. 놀 때는 놀면서 밤새고 할 일은 딱 죽었구나, 싶을 때까지 미루다가 말 그대로 초를 세며 패닉에 빠졌다. 일을 하염없이 벌여놨을 땐 조금만 미뤄도 퀭한 눈으로 새벽빛을 맞이하게 됐다. 그렇게 체력을 탈수기에 돌린 결과로 이제 웬만해선 미루지 않는 의젓한 ADHD인이 되었다. 영양수액은 내 소중한 원고료보다 비싸니깐.


밤샘을 예방하는 요령도 생겼다. “아직 쓸 기분이 아니야”라는 무적의 논리에 지고 있을 때, 나를 구제하기 위해 던져보는 질문이 있다.

'이걸 하면 뭐가 좋지?'
'안 하면 어떻게 되지?'
'혹시 계획이 무리한가?'
'일 중간중간에, 그리고 일이 끝나면 나한테 뭘 해줄까?'

이번주엔 두 번째 질문이 효과가 있었다. 매주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을 떠올리니 갑자기 정수리에 죽도를 맞은 듯했다. 이 양반이 배가 불렀네. 지금 기분이 문제인가?



미루기의 개미지옥 탈출법


▲ 행동을 시작하게 하는 ‘최종판결’이 반드시 만장일치일 필요는 없다. “행동 개입의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51대 49의 결과만 얻으면 된다.” (책 <성인 ADHD의 대처기술 안내서> 중) ⓒ freepik



마음은 생겼지만 여전히 손에 안 잡힐 때는 3단계로 일에 다가간다.


-1단계: 감정 정리. 5분 명상이나 차 마시기, 가벼운 산책으로 기분을 환기한다.
-2단계: 행동력 활성화. 잠시 바닥을 쓸거나 쓰레기 분류 배출을 하거나 미뤄둔 계좌이체를 한다. 해야 하는 일 대신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을 ‘거짓 바쁨’이나 ‘가짜 효율성’이라고 하는데, 이를 적당히 이용해 잡일도 해치우고 추진력도 얻는다.

-3단계: 생각의 준비운동. 할 일의 범위와 제출일을 다시 확인하고, 브레인스토밍이나 정보 수집을 한다. 이 작업에서 너무 많은 생각이 섞여들면 결과물로 만들 때 시간이 많이 걸린다. 관련 없는 생각은 분리해서 메모하고 나중에 다시 생각한다.


그래도 시작이 어려우면, 할 일이 안 부담스러울 때까지 작은 일로 쪼갠다. 자료를 찾기 싫으면 ‘노트북 전원 켜기’만 목표로 한다. 그것도 싫다면 ‘엉덩이를 컴퓨터 책상 근처로 밀기’까지만. 책 <성인 ADHD의 대처기술 안내서>에 나온 표현으로 “과제를 터무니없이 단순하게 만들어 그 일을 안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터무니 없는 것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뒤의 행동을 할지 말지는 그 다음에 결정한다. 선택 과정에서 의무감보다 주도권을 느낄 때 추진력이 생긴다. 한 가지를 해봤지만 정말로 하기 싫다면, 좀더 쉬고 다시 생각한다.


이런 ‘쪼개기’ 기술은 반복되는 지루한 일을 할 때 특히 유용하다. 나는 화장실 청소가 힘들어서 변기와 세면대, 바닥 청소로 나눠 샤워할 때 한 군데씩 한다. 이것도 띄엄띄엄 하다 보니 늘 곰팡이 투성이지만, 그래도 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적당히 더러운 상태로 유지된다.


멀티태스킹은 단순작업을 할 때 유용하다.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갤 때 전자책이나 유튜브를 듣는다. 이 둘을 같이 해도 여전히 지루하면 무음으로 화면을 보는 동시에 다른 소리를 들으며 집안일을 한다. 산만함은 좋은 에너지원이다. 자극의 정도가 딱 맞아떨어지면 더없이 충만하다.


떡집에서 알바를 할 때가 생각난다. 작두로 떡을 썰고 있었는데 일이 손에 좀 익으니 한 손으로 작두질을 하면서 나머지 손으로 다른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당황해서 타이르셨다. "어이, 어이, 너무 일 잘하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해." 그땐 나도 내가 잘 보이려고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보면 한 가지 단순작업의 지루함을 못 견뎠던 것 같다. 안 말리셨다면 결국 피를 보지 않았을까. 혼자 일할 때도 5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그때를 떠올린다. 워, 워. 무슨 사고를 치려고. 멀티태스킹도 상황 정도껏이다.



성인ADHD의 '시간은 4배속으로 흐른다'



매섭게 추웠던 날, 부산에 눈이 왔다. 그날은 아침 9시에 상사들을 만나 야외활동을 해야 했고, 긴장한 탓에 새벽 5시에 눈이 떠졌다. 준비할 시간이 남아돌아 창 밖에 엷게 쌓인 눈을 감상했다. 세상에, 부산에 눈이라니!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도 길에서 동영상을 찍으며 행복해했다. 그 결과 상사들을 20분이나 추위에 떨게 만들었다. 나는 4시간 동안 뭘 한 걸까?


ADHD인이 시간과 관련해 겪는 또 다른 문제는 왜곡된 시간 지각이다. 시간을 비현실적으로 인식하고 소요시간을 과소 추정하는 특징이다. 원래 시간은 상대적이라지만, 5분과 20분이 똑같을 때가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혹시 ADHD인들은 다른 차원의 존재들에게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지각을 하게 되는 데는 공범이 있는데, 모든 상황이 내 뜻대로 흘러가 주리라는 낙관주의다. 보통 성인ADHD인은 비관주의와 더 친한데 시간에 관해서만 낙관주의자가 되니 우스운 일이다. 이를테면 사람을 만나러 나왔는데 갑자기 선물을 사서 가야 한다는 강한 확신이 밀려온다. 10분이면 근처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서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과감히 실천한다.


막상 가 보면 지하도 안에서 백화점 입구를 못 찾고, 필요한 매장이 몇 층인지 몰라 헤맨다. 엘리베이터는 내려오지 않고, 에스컬레이터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칸칸마다 “죄송합니다!! 먼저 지나갈게요!!”를 외치며 내려오는 진풍경(진상)을 연출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걸 생각하면 머쓱해진다.





▲ Young과 Bramham에 따르면, ADHD가 있는 경우 어떤 활동을 수행할 정확한 순간을 알아차리는 ‘경보 시스템’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다른 생각이나 자극에 주의를 빼앗겨 미래의 할 일을 기억하기 어려운 것이다. ⓒ freepik



이 얘기에 공감한다면 적어도 한 번은 ‘시간 추정 연습’을 하는 게 좋다. 하나의 행동에 실제로 소요되는 시간을 세분해 적어보는 것이다. ‘약속에 나간다’가 행동이면 외출 준비 시간, 대중교통 대기 시간, 이동 시간으로 쪼개고, 외출 준비는 세수하기, 화장품 바르기, 밥 먹기, 옷 고르기, 짐 챙기기 등으로 나눠 각각 몇 분쯤 걸리는지 써본다. 그러면 40분으로 예상한 일에 실제로는 2시간이 필요했음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일정을 짤 때도 마찬가지다. 시간 배분은 에너지 배분이다. 능력에 계획을 맞춰야 한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에 속아 탈탈 털린 게 몇 번인지. 소요시간은 예상되는 만큼의 2배로 잡는 게 좋다. 나는 하나의 글을 완성할 때 최소 2~3일의 여유를 넣고, 하루 할 일을 짤 때는 중요 일정의 앞뒤로 1~2시간을 비우려 하고 있다.


시간을 배분할 때는 쉬는 시간도 넣는다. 나에게 맞는 방식은 '포레스트' 타이머 앱으로 40분 집중하고 20분 동안 딴 짓을 하는 것. 하던 일을 끊어내는 게 정말로 쉽지가 않았는데 허리가 먼저 끊어질 상황이 되니 이젠 좀 끊어낸다. 시간을 설정하는 것도 잊어버릴 때가 많지만, 꼭 앱을 안 써도 1시간에 한 번은 과몰입을 끊어야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다.

쉬는 시간은 수행에 대한 보상이니 하고 싶은 행동을 한다. 쉬는 동안 간식을 먹거나 명상을 하거나 피아노를 치고 온다. 몇 시간을 쭉 일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쪽이 머리가 맑아져서 일에 쓰는 시간이 오히려 줄어든다(고 자신을 끊임없이 설득한다). 이 시간에 잠시 운동이나 집안일을 해서 활동 욕구를 해소하고 성취감을 높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나에게 최고의 보상은 마음껏 널부러져 있는 거다.


일에는 ‘결과를 결정하는 순간’이 있다. 요리할 때 재료를 태우지 않으려면 불을 줄여야만 하는 시점이 있고, 택시 말고 버스를 타려면 집을 나서야 하는 결정적 시점이 있다. 중간중간 내가 딴생각에 빠져있지 않은지, 중요 시점이 지금은 아닌지 감지하는 더듬이를 키우고 있다.



나에게 중요한 것


연재를 시작할 때는 의심스러웠다. 내가 뭔가를 꾸준히, 게다가 정기적으로 할 수 있을까? 일전에도 3회 만에 흐지부지 끝낸 연재가 두 개나 있었다. 변수와 변덕이 죽 끓듯 하기도 했고, 일단 내가 세포부터 비효율적인 인간이었다. 숲의 나무를 세어야 할 때 나뭇잎의 잎맥만 보고 있거나 숲을 지나 들판으로 가버리곤 했으니.


문서를 작성할 땐 내용을 다 짜지도 않았는데 문서 스타일에 집착해 들여쓰기와 테두리와 글자체에 공을 들이며 시간을 썼다. 연재 글도 A4 2장을 써야 하는데 8장을 써서 자르고 맞춘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다. 개요를 짜고 쓰지만 쓰다 보면 그렇게 된다. 생각을 가려서 꺼내지 못하니 결국 모래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작업을 하게 되는 거다.


하지만 성과만이 결과는 아니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돌아서 갈 때는 잘못 들어선 길에서 예상치 못한 발견을 하기도 했다. ADHD 치료나 정보 없이 버텨온 시간도 그랬다. 항상 노력 대비 결과물은 좋지 않았지만, 헤맨 만큼 나에게 맞는 요령이 생겼다.


사는 방식에 정답이 없는데 일 하고 시간 쓰는 방식에 정답이 있을 리야. 내가 얻은 답이 있을 뿐이다. 경험을 통해 자기에게 임상실험을 마친 방식이라면 그건 진짜다. 내 삶에서 중요한 게 뭔지, 그 중요한 것을 위해 지금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의식하며 살면 자기만의 요령이 붙는 것 같다.


주의력 결핍 장애(ADD)를 가진 라이더 캐롤은 책 <불렛저널>에 이렇게 썼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이유를 이해하면, 어떻게 할지 더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을 왜 하는지, 경험에서 무엇을 얻고 싶은지, 어떻게 할 생각인지 알기 위해 '사명선언문'을 써보길 권한다. 딱 한 문장이다.


나는 ________ 위해[왜] _______[어떻게] _______[무엇을] 하고 싶다.


나는 이렇게 쓰겠다. "나 자신을 치유하고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과 마음으로 연대하기 위해, 내 이야기를 쓰는 약속을 지켜서, 연재를 잘 마무리하고 싶다." 의도와 행동만 남겨두고 보니 잘 써야 한다는 부담과 회피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약 없이 사는 일상은 더 느리고 비효율적이지만, 하고 싶은 일을 나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해나간다면 그 자체가 내 삶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태도일 거다.



* ADHD의 일상 관리에 도움이 되는 책
1) 라이더 캐롤, <불렛 저널>, 한빛비즈
2) J. Russell Ramsay & Anthony L. Rostain,.<성인 ADHD의 대처기술 안내서>, 하나의학사.
3) Young & Bramham, <청소년 및 성인을 위한 ADHD의 인지행동치료>, 시그마프레스.



책에는 브런치보다 많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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