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집필 노동자의 '기록'적인 생활

[치유편-④] 약도 쓸 수 없는 몸, 답이 없을까(2)

by 묘보살과 민바람

첫인상이 단정하고 차분하다고들 한다. 어디까지나 첫인상인데, 아직 거기에 속고 계신 분들은 내가 대화 중에 다이어리를 펼치면 흠칫 놀란다. “이걸 알아볼 수 있어요?” 내가 봐도 괴발개발 난장판. 일정표라기보단 추상예술에 가깝다.


애인도 어이없어 했다. 진지한 모습을 보고 꼼꼼히 ‘다꾸’하는구나 싶어서 들여다 봤더니 웬 갓 출토된 고대벽화 같은 게 있으니. 그는 이런 시구를 읊었다. "우당탕탕 묘보살 씨는 다이어리도 얼렁뚱땅" '우당탕탕'이라는 별명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보다 우리가 먼저였다. 줄여서 '우당'이라는 호가 생겼다. 한자는 '우와~할 우'에 '당황할 당'. 초당 순두부의 계보를 잇는 우당 묘보살. 마음에 든다.


한 번씩 꽂힐 때마다 몇 달의 계획을 모두 표시해 버리는데 일주일만 지나면 계획은 다 틀어져 있다. 계속 볼펜으로 죽죽 긋고, 그 위에 또 휘갈겨쓴다. 결국 나조차 알아보기 어렵게 돼서 점점 다이어리를 안 보게 된다. 아시겠지만 다이어리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는 경우도 많다.


그나마 매우 가지런히 적은 5월


그래도 내 ADHD는 복 받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계획과 실천을 좋아하니까. 한때는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는 재미로 살았다. 기타 연습해서 3곡 치기, 한자능력시험 2급 따기, 내 행글라이더를 사서 비행하기, 정글에서 비 맞기 등 대중없이 하고 싶은 걸 죄다 적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블로그에 중간보고식으로 기록하면 잘 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록에서 한 줄을 지우는 순간, 뇌 속에서 도파민이 만세를 부르며 뛰쳐나오는 그 짜릿함.


써둔 건 80개 정도였는데 이룬 건 많지 않다. 오래 살아도 이룰까 말까 한 목표도 많았고, 무리한 계획과 오래 가지 않는 흥미 때문에 무기한 연기된 것들도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내가 도파민 중독이란 걸 확실히 알게 됐다. 그리고 도파민의 노예가 되기보다 적당히 힘을 빼고 도파민을 일꾼으로 부리기로 마음먹었다.



할 일을 물건처럼 들여다보기

계획 세우기와 목록 쓰기가 새로운 방식은 아니지만, 관점을 달리 하면 게임이 될 수 있다. 우선 이것도 하나의 창작이라서 계획과 목록을 완성한 것만으로도 작은 만족감이 생기고, 생각을 현실적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은 통제감을 준다. 할 일을 쓰는 것은 ‘행동’이기 때문에 다음 행동으로 이어가기 쉽다는 것도 장점이다.


할 일이 목록으로 남아 있으면 다음 일정을 확인할 때 이전에 한 일도 보게 된다. 그만큼 보람을 느낄 기회가 많아진다. 나를 채근하는 기록보다, 뒤에서 묵묵히 나를 밀어주는 기록이 힘이 될 때가 많다.


물론 이것도 뭔가 한 일이 적혀 있을 때의 얘기긴 하다. 일단 '5분간 숨쉬기 운동'이라도 써보고 심호흡을 해보면 어떨까(숨쉬기는 좋은 운동이다). 과거의 나처럼 거창한 것들을 적기보다 해낼 수 있을 만큼 사소하고 쉬운 할 일을 쓰고, 결과가 아닌 실행을 목표로 삼는 게 낫다. ‘한자능력시험 2급 따기’보다 ‘한자능력시험 2급 응시하기’나 ‘2급 준비용 책 한 권을 3번 보기’처럼 시도만 하면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좋다.


단기 목표는 따로 정하는데, 목표를 일이 잘 풀렸을 때와 아닐 때로 나눠서 세우면 호기심이 생긴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플랜A와 플랜B. 이렇게 하면 변수가 생겨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고, 완벽주의를 버리고 현실적인 기대를 갖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소한 것이라도 이룬 뒤에는 충분히 기념하고 축하하면서 성과를 풍부하게 음미해줄 필요가 있다. 중간 지점에서 스스로 작은 보상을 주는 것도 좋다. 뿌듯함이 클수록 마음은 자연히 다음 단계로 내킨다.


나는 해낸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못한 것은 질책하는 습관이 있어서, 앞만 보고 무뚝뚝하게 걸어나가는 자아의 등을 톡톡 건드려 알려준다. 어이, 글을 이만큼 써냈다니까? 그게 다야? 그리고 10초간 의식적으로 자아도취를 한다. 종착점만 바라보며 달렸는데 도착하자마자 다른 종착점을 보는 건 좀 슬픈 일이다.



Young과 Bramham은 '시간계획을 세우는 6단계'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목표 설정
2. 목록 만들기
3. 활동의 우선순위 정하기
4. 과제 완성에 걸리는 시간 추정
5. 과제 일정 짜기
6. 보상 체계 포함하기


이 중 목표 설정과 시간 추정은 지난 화와 관련이 있다. 이제 목록 만들기, 우선순위 정하기와 내 이야기를 엮어보면, 요즘 내 생활은 읽기와 쓰기 위주로 단순하게 돌아간다. 하루에 할 일은 크게 4가지로 나눈다.


- 꼭 끝내야 할 중요 과제 1개 (예: 청탁받은 글 마무리해서 송고하기)

- 해두면 좋은 과제 1~2개 (예: 새 글 초고 A4 1장 쓰기, 참고도서 5개 꼭지 읽기)

- 간단한 잡일 1~3개 (예: 빨래 돌리기, 세무서에 전화해서 처리 결과 묻기)

- 하고 싶은 일 1개 (예: 소설책 읽기나 드라마 한 편 보기)


나는 의욕 유지를 위해서 실천 순서와 우선순위를 다르게 두고 있다. 아침에 빨리 끝낼 수 있는 잡일을 먼저 해서 성취감과 추진력을 얻고 중요 과제로 들어간다(일어나서 약을 먹고 1~2시간 후이니, 약을 먹던 때는 이때가 약효가 제일 좋을 시간이기도 했다). 중요한 일을 잘 마치면. 나에게 주는 보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그리고 기운이 차려지면 ‘해두면 좋은 과제’로 들어간다.


하루 할 일을 쓸 때도 결과가 아닌 행동 중심으로, 머릿속에 그려지도록 쓴다. ‘연재 초고’라고 쓰기보다 ‘연재글 시간관리편 초고 A4 2장 쓰기’라고 적으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감이 와서 손을 대기 쉬워진다. 한눈에 쓸모를 알 수 있는 물건처럼 말이다.


하루가 끝나면 그날 지운 것들을 보면서 흐뭇해하고, 남은 과제는 슬쩍 다음날로 옮겨 적는다. 내일의 나는 언제나 완벽하니까. "진정한 효율성은 속도가 아니라,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쓰느냐에 달려 있다." 책<불렛저널>에 나온 말이다.


기록과 친하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는다면 다를지도 모른다. 책 <불렛저널>은 주의력 결핍 장애(ADD)를 가진 저자 라이터 캐롤이 기록으로 일상을 관리하는 기술을 안내하는 책이다. 일반적인 스케줄러 작성과도 비슷하지만 자신만의 아이콘(불렛 bullet)을 만들어서 경제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점, ‘맞춤형 컬렉션’으로 일상의 모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점, 색인 기능을 이용해 원하는 곳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점이 좋았다. 나도 요즘은 너덜너덜해진 다이어리를 놓아두고 불렛저널식으로 수첩을 쓰고 있다.


<불렛저널> 126쪽



내가 '읽개미'로 사는 법


나는 책 안 읽는 작가지망생이었다. 생업에 짓눌려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백수가 된 후에도 읽는 즐거움보다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집중해 있었다. 새해를 맞으며 세운 목표는 1년에 100권 읽기.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반 년 만에 목표치를 달성하게 됐다. 도파민 추구 성향과 산만함을 이용한 덕분이다. 요령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참고가 되실지도 모르니 적어본다.


나는 동시에 15권 정도 되는 책을 돌려 읽는다. 질리면 언제든지 다른 책으로 바꿀 수 있게 여기저기 책을 둔다. 책장 말고도 책상 위, 침대 앞, 식탁 위, 행거 아래, 핸드폰 속에 책무더기가 있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되 목적을 가지고 주력해서 읽을 책과 기분전환용으로 읽을 책을 구분한다. 보통은 글을 쓸 때 참고하는 책이 주력 도서가 된다. 한 권이라도 다 읽었다는 성취감이 없으면 의욕이 식을 수 있으니 주력하는 책은 대충이라도 끝까지 본다.


전자책은 지역 전자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돈이 안 들고, 눈으로 보기와 귀로 듣기를 오가면서 흥미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 나는 오디오클립이나 영상을 1.5~2배속으로 들어야 정신이 흩날리지 않는데, 전자책에 속도조절 기능이 있는 점도 다행스럽다.


전자책이나 오디오북은 활동하면서 읽을 수 있어 덜 지루한데, 종이책은 진도를 빼기 어렵다. 그래서 종이책에도 ‘목록 지우기’ 방식을 적용한다.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면 목차를 보고 관심 가는 꼭지부터 골라 읽고, 읽은 꼭지는 목차에 표시한다.



<성인ADHD의 대처기술안내서>를 목록 지우기 방식으로 완독했다


이렇게 서너 개를 읽고 나면 나머지를 다 표시해 홀가분함을 느끼고 싶어진다. 이때부터는 전부 표시하는 것을 목표로 마저 하나씩 읽는다. 나는 한 꼭지를 읽으면서도 몇 번이고 남은 분량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어서, 아예 해당 꼭지 끝에 책갈피를 끼워 놓고 남은 장수가 줄어드는 걸 보면서 읽어나간다.


보통 발밑에 마사지볼을 놓고 굴리거나 실내자전거를 타면서 읽는다. 가만히 읽으려면 몸이 꼼지락거리고 딴 생각이 들지만, 아예 몸을 움직이면서 읽으면 집중이 잘 된다.


성과를 시각화하기 위해 독서기록 앱과 SNS를 이용한다. 나는 ‘북적북적’ 앱을 쓰는데 책 상태를 ‘읽은 책’으로 바꾸면 앱에 책 모양이 한 권 더 쌓이고, 캐릭터의 키도 자란다. 지금까지 읽은 책이 책장에 쌓인 것처럼 보여서 뿌듯하다. 책이 끝나갈 즈음이 되면 또 한 줄을 쌓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설렌다.


월말에는 그 달의 책 목록과 소감을 SNS나 블로그에 간단히 올린다. 스스로 기록을 남기면서 자랑도 하는 거다. 나 또 지난달만큼 했어요. 잘했쥬? 그 자체가 한 달 간 노력한 보상이 돼서 나도 모르게 실적을 유지하려 노력하게 된다. 영화, 전시회 보기 등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한 달의 수고를 기념하기도 한다.



사는 맛을 위한 기록


어려서부터 사람들 목소리를 테이프에 녹음하곤 했다. 친구에게 받은 쪽지는 껌종이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상자에 넣었다. 사진은 수시로 찍어 대서 주변 사람들이 진저리를 칠 정도다. 그러면서도 물건이나 파일을 시간 내서 관리하는 습관은 없기 때문에 이런저런 어려움이 좀 있다. 실토하자면 내 짐과 저장공간을 감당하느라 주변 사람까지 고생이다.


그래도 이런 약간의 저장 강박이 ADHD와는 궁합이 맞는다. ADHD는 (좋은 친구이기도 하지만) 내가 듣고 보는 것이 뇌로 들어오지 못하게 버티고 있는 심보 나쁜 문지기이고,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의 연결고리에 쉴새없이 톱질을 하는 빌런이기도 하니까.


‘적자생존’.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어느 전 대통령이 참모들과 회의하는 방식에서 나온 우스개지만 ADHD인에게는 진리나 다름없는 표현 아닐까. 원래 수업이나 회의에서 필기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같이 들은 내용도 나만 기억이 없는 경우가 많아 무조건 받아적게 됐다. 업무 범위가 방대한 일을 하면서 없는 가제트팔까지 꺼내쓸 때도 그나마 큰 사달이 없었던 건 순전히 기록 덕분이다. 요즘은 녹음 후 전사까지 해 주는 앱도 있으니 현대 사회가 ADHD인이 살기 힘든 세상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생활 속 거의 모든 일이 숙제 같았다. 어떻게 하면 안 힘들게 살아볼까. 고민에도 끝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취약점을 보완하는 길을 찾아 시도하고 결과를 지켜보는 과정이 때로는 흥미로운 실험처럼 느껴졌다. 궁지에 몰린 쥐가 뒤돌아서 고양이를 무는 것처럼, 어차피 망하고 있는 상태라면 나를 가지고 실험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을 할 수 있어서 버틴 날들이었다.


분명히 속 편한 소리겠지만, 나는 우리가 뇌세포에 스민 성과주의의 가스라이팅을 자기만의 ‘사는 맛’으로 밀어내며 살아가면 좋겠다. 다른 사람의 점수를 흘긋거리지 않고 1인용 게임에서 1점씩 쌓는 은밀한 즐거움의 맛을 잔뜩 누리면 좋겠다. 쌓은 스코어를 탕진하고 미로 속에 갇혀도 계속 답을 찾는 힘은 그런 데서 나오지 않을까.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볼 수 있는 것들이 남아있는 한 인생이 재미있어질 여지는 있다고 믿는다.


책에는 브런치보다 많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5232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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