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에서 밝혔듯이, 저는 순우리말 연구가는 아닙니다. 글에 좋은 낱말을 더 찾아 쓰려고 애쓰는 작가일 뿐입니다. 하지만 순우리말은 예스러운 문맥이나 연구의 영역, 외래어와 한자어를 모두 배제한 문장에서만 쓰이는 게 아니라, 누구든지 필요할 때에 자유롭게 꺼내쓰는 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년 봄, 기사로 연재하던 성인 ADHD 글(<우아한 또라이로 살겠습니다>로 출간된 글)을 읽고 서사원 편집팀장님께서 출간제의를 주셨습니다. 그때 우.또.살.은 이미 계약이 된 상황이어서 죄송스럽게 고사를 했는데, 차기작을 같이 내자고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브런치에 잠자고 있던 <순간과 낱말의 맛>을 보여드리고 곧 계약을 하게 되었습니다.그때는 훨씬 글이 길고 문장도 거칠었는데 편집팀장님께서 정말 '시작하는 사람'이었던 저를 전적으로 믿어주신 덕분에 나올 수 있었던 책입니다.
책의 반은 올해 새로 쓴 글이고, 반은 3년 반 전 쓴 글을 수정해서 실었습니다. 올해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많아서 글이 너무 무겁고 어둡게 나오는 게 아닐까, 쓰면서 걱정이 됐어요.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진중한 느낌으로 가는 게 나쁘지 않겠다고 팀장님께서 말씀해 주셨고, 불필요한 부분들을 가려낼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신혜림 사진작가님과의 협업도 편집팀장님께서 제안해 주셨는데, 처음에 사진을 싣자는 제안을 들었을 때는 '경험 얘기와 순우리말이 얽혀 있는데 사진까지 들어가면 복잡해 보이는 건 아닐까?' '순우리말과 내 글의 분위기가 한국적인 느낌이 많이 들 텐데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사진을 넣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팀장님이 생각하시는 방향을 듣고 납득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신혜림 작가님의 아름다운 사진 덕분에 글의 느낌을 더 감각적으로 전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에 맞는 사진을 찍는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글과 잘 어우러지는, 글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진을 담아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표지 역시 신혜림 작가님의 사진 중에서 골랐습니다. 표지 후보로 예쁜 것들이 많았지만, 지금의 이불 사진이 '마음이 뒤척일 때마다 가만히 쥐어보는 다정한 낱말 조각'이라는 부제에 잘 어울리는 느낌이라 무척 마음에 듭니다.
글을 쓰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초고를 보낸 뒤 팀장님과 상의하고 조율해 가는 과정은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순우리말에 대한 설명을 어느 선까지 넣을 것인가, 본문에서 시각적으로 순우리말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부록에는 순우리말을 어느 정도로 넣을 것인가, 부록의 제목은 뭘로 할 건가, 부제에 들어가는 부사를 '오롯이'로 할 것인가, '소롯이'나 '가만히'로 할 것인가 등... 본문 문장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고민해 주시는 게 느껴졌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마음이 잘 맞아 같이 많이 웃었습니다. ^^
제목은 브런치 매거진 제목이었던 <순간과 낱말의 맛>보다 어울리는 제목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팀장님께서 후보로 뽑으신 여러 제목 중에서 '낱말의 장면들'이라는 지금 제목이 마음에 확 꽂혔습니다. 유행하는 긴 제목보다 차분하면서 섬세하고 감각적인 느낌이 드는 제목이길 바랐는데 마음을 읽어주신 듯해 여러 모로 '자기 만족'이 최대치로 충족되는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
출간을 준비하면서 제가 인복이 많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글을 쓰는 건 외로운 과정인데, 내 글을 진심으로 좋아해주고 같이 깊이 고민해 주는 사람과 함께한다면 든든하고 따뜻한 과정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제 글이 마냥 밝고 명랑하지는 않다는 점을 많이 신경 쓰는 편입니다. 글을 쓸 때 가장 염려하고 힘들어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전작인 <우아한 또라이로 살겠습니다>에서는 유머가 돋보인다는 얘기도 듣긴 했지만, 그게 제가 노력하지 않고도 얻는 제 글의 특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에세이스트 분들의 책을 읽으면 '무거운 이야기도 이렇게 가볍고 재미있게 쓸 수 있구나' 하며 새삼 놀라고, 제가 갖지 못한 능력들이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글이, 솔직하게 자기 안에 침잠해 보는 과정이 필요한 분들에게는 어쩌면 적절한 책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을 거쳐야 그게 웃음으로 승화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낱말의 장면들>은 지금 계절에 잘 어울리는 책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ㅎㅎ)
출간을 준비하고 있을 때 <페르시아어 수업>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에서 유대인 ‘질’은 독일군 장교 ‘코흐’에게 엉터리 페르시아어를 가르칩니다. 질이 살아남기 위해 페르시아인으로 속인 것을 모르는 코흐는 그가 가르쳐주는 낱말들을 날마다 열심히 외웁니다. 둘은 어느새 가짜 페르시아어로 일상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당연하게도 코흐가 만들어내는 문장은 오로지 질만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순우리말을 익혀 나가는 동안 묘하게 외로운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열심히 익힌 낱말들을 마음껏 사용하고 싶었지만, 듣는 사람과 읽는 사람에게 설명 없이 통하지 않는 말이 많아 말과 글에 자유롭게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자주 쓰지 못하니 잊어버리기도 쉬웠고요. 순우리말이 영화 속 가짜 페르시아어처럼 고립된 말, 죽은 말이라고 생각하니 서글프고 아까웠습니다. 이 책을 읽고 순우리말을 암호가 아니라 '산말'로서 같이 누릴 수 있는 분들이 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