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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보살과 민바람 Aug 19. 2024

1화 여름 이불

최장 열대야에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


 집에 에어컨이 없다고 하면 친구들이 놀란다. 이 날씨에? 괜찮아? 동남아에서 2년 넘게 살았던 나로서는 열대야를 버티는 게 익숙한데, 한국에서도 더워서 힘든 때가 있긴 있었다. 예를 들면 온실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안보다 바깥이 더 시원하던 5층 집에 살 때. 본가에서 독립한 후로 한여름이면 늘 본가에서 가져온 넓은 삼베 천을 깔고 잤다. 맨살에 닿는 까끌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그런데 땀냄새가 잘 배는 만큼 자주 빨아야 했고, 그렇게 8년이 지나니 구멍도 뚫리고 천이 닳아 부들부들해져 버렸다.     


 이불 부쳐줄까? 이불이 필요하다 얘기한 적도 없는데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엄마가 물었다. 이불집에서 일한 적이 있는 엄마는 유독 이불을 섬세하고 정갈하게 챙겼다. 나는 늘 집에 이불 많아, 안 필요해, 하고 대꾸했지만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이제 그 삼베 천으로 여름을 버티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엄마는 오랫동안 아껴온 얇은 이불을 내가 사는 집으로 부쳐주었다. 본가에서 잘 때면 가끔 깔아주던, 인견으로 된 색동 누비 이불이었다. 이거 비싸게 산 거야. 좋은 거야. 엄마는 네가 쨍한 색을 싫어하니 하얀 부분이 위로 오도록 뒤집어 깔라는 말을 덧붙였다.      


 별생각 없이 받아서 깐 이불은 여름밤을 나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삼베 천보다 더 까끌한 데다, 가는 줄누비로 되어 있어 땀이 나도 몸에 붙지 않았다. 씻고 나온 알몸에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이불 위에 온몸의 근육을 던져놓고 살갗을 부비면 어떤 집도 어떤 순간도 부럽지 않았다. 숨 막히는 열대야에도, 등을 대고 몇 초만 지나면 뜨끈해지는 냉매트보다 적당한 온도가 유지되는 그 이불이 더 유용했다. 엄마가 보내준 이불 너무 좋아. 덕분에 잘 자. 여러 번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내심 멋쩍었다. 엄마의 개입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면서도 도움이 되는 건 또 기쁘게 받아들이는 게 모순이 아닌가 싶어서다.     



 엄마가 나를 챙기는 습관은 걱정과 배려를 넘어 간섭과 통제의 영역에 넓게 걸쳐 있다. 얼마 전 엄마는 앞으로 내 일에 관심을 갖지 않겠다고 말했다. 연락도 잘 안 할 거야. 더 너를 힘들게 안 해야 되니까 우선은 그 방법이 최선이야 나에겐. 그동안 나를 통해 불안을 해소하려는 엄마의 말들에 나는 복합외상후스트레스 장애(화병이라는 쉬운 말도 있지만 일상적인 트라우마도 트라우마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병명을 적는다) 증상을 앓았다. 가족은 물론 타인의 비슷한 언행에도 심한 불안과 분노를 느끼며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었다.  


 거수일투족에 관련된 아주 사소한 것까지 남의 기준으로 결정해야 하는 일상을 40년 겪으면 사람은 자기자신을 믿지 못하게 된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은 어른의 삶에서 정말 많은 문제를 파생시켰다. 이런 얘기를 할 때는 조심스러운 것이,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보다 낫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 의식이 되어서다. 어쨌거나 분명한 건 건조함도 과습도 식물을 죽이는 건 똑같다는 것이다.


 증상이 심해지기 전부터 나는 엄마의 말과 행동에 내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해 왔다. 엄마는 아주 조금씩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해 갔지만 매번 자신을 통제하는 데 실패해 성큼 선을 넘었다. 괴로움을 호소하면 엄마가 사과하고 곧바로 반복하는 패턴이 오래도록 반복되었다.     


 자꾸만 화가 났었다. 십 년 동안 말해온 내 문제에 여전히 진심으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말해도 곧 잊혀지고 흩어져 버리는 것만 같아 결국 아주 오래 참아온 말을 해 버렸다. 엄마, 그건 사랑이 아니야. 연락을 하지 않는 건 나를 위해 엄마가 선택한 마지막 방법이었다. 속이 시원할 법도 한데, ‘너를 힘들게 안 해야 되니까’라는 말이 씁쓸하고 안쓰러웠다.

  

 오래전부터 나를 대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사랑이 뭔지 생각했다. 사랑한다는 말과 일치하지 않는 관심의 방향을 볼 때, 그런 건 자신이나 자신의 역할을 향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다. 상대방의 세계를 생각지 않고, 전해오는 목소리를 듣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걸 주는 건 자기만족이 아닐까 냉정하게 생각했다.           


사랑은 상대방이 갈망하는 게 뭔지 궁금해하는 것. 내가 너의 목소리를 최대한 온전히 들어주는 것(전승민, 《허투루 읽지 않으려고》, 핀드, 35쪽.).  나를 보지 않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모순.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어른이 되어 사랑을 하며 의심도 했다. 나 역시 내가 주고 싶은 것만을 주려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여전히 나는 잘 모른다. 고결한 사랑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어쩌면 사랑에 대한 환상일지도. 내 욕구가 상대의 욕구를 앞질러 갈 때, 상대의 욕구가 내 욕구를 앞질러 갈 때, 그 모든 과정을 그저 버텨주는 마음 자체가 사랑이라는 게 오늘에 가까운 생각일까.     


 우스운 건, 내가 엄마와 똑같은 행동을 사귀는 사람에게 했었다는 점이다. 그와 같이 살 때 당장 쓰지 않는 이불들은 내 방에 있었고, 그는 환절기마다 이불을 바꾸지 않고 추우면 추운 채로 더우면 더운 채로 버티는 일이 많았다. 나는 그게 너무 마음에 걸려, 그가 귀찮아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며 이불을 갖다줄까 묻곤 했다. 필요하지 않을 때는 귀찮아 보이기도 했지만 막상 이불을 바꾸고 편해지면 너무 좋다며 고마움을 전하던 그의 모습도 나와 닮아있다.     


 날이 점차 더워지는 동안, 나는 그가 같이 살던 집에서 나갈 때 여름 이불을 챙겨가지 않은 것을 자주 떠올렸다. 어떻게든 하나는 넣어줄걸. 전투하듯 함께 여름을 나던 5층 집에서 더위에 뒤척이던 밤이 떠올랐고, 뜨거운 요 위에서 억지로 잠을 청하고 있을 모습이 상상되어 안부라도 묻고 싶었다. 그가 원치 않을 것을 알기에 아무 말도 보내지 않았지만.      


 엄마가 먼저 묻지 않았다면 나는 이불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여름을 났을 것이다. 관성대로 더위를 견디며 잠을 청했을 것이고, 깔깔한 여름 이불이 주는 이 행복은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곳을 같이 바라봐주는 게 사랑이지만, 내가 미처 보지 못하는 곳을 봐주는 것도 사랑이지 않을까.     


 그 사람이 편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사랑이라 생각한다. 꺼내놓아 상대방이 불편해질 걸 알아서 꺼내놓지 않는 마음도 사랑이라 생각한다. 그러려고 애쓰다 자신도 모르게 꺼내놓고야 말 때, 그 능숙하지 못함도 사랑이 아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사랑의 모습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애쓰는 마음 역시 사랑일 것이다. '못나고 부족한 엄마라서 미안해. 앞으로 각자 잘 살자♡' 엄마는 잘 살자는 말 옆에 하트를 붙였다. 어떤 구멍처럼 아리고 깊어 보이는 부호였다.


          

민바람


<건재하는 마음>
이제는 괜찮아, 싶을 때쯤 삶은 또 힘들어지곤 합니다. 그게 삶이니까요. 소중한 존재들과의 이별,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가족 간의 갈등, 잘 나아지지 않는 반려병 등. 어려움과 동행하면서 매번 다시 일어서는 마음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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