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2차 가해’라는 용어와 성폭력 피해 생존자 회복의 요소
“아유, 머리 아파, 그냥 둘이 만나서 해결해요.”
생각지 못한 대답에 나는 휴대폰에 귀를 댄 채 뻣뻣하게 굳었다. 나를 성추행한 지압사에 대해 고소를 준비하던 상황에서 증거랄 것이 없었던 나는 참고인이 절실했다. 고민 끝에 당시 지압원에 같이 다니던 친한 동료에게 도움을 청했다. 내가 성추행 사건 이후 그에게 ‘혹시 지압을 받던 중 접촉을 불쾌하게 느낀 적은 없는지’ 물었던 사실에 대해 간단한 사실확인서를 부탁해본 것이다. 하지만 말을 꺼내자마자 동료는 골치 아픈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건강도 좋지 않고,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까다롭고 복잡해질 법한 문제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부탁은 누구라도 원치 않으면 거절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도 잘 알기에, 거절 자체가 서운하지는 않았다.
다만, 성폭력 사건을 나의 오해나 가벼운 문제로 치부하는 듯한 태도는 내게 충격을 주었다. 만일 거절에 덧붙여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네요.”라는 수용의 말, “마음고생했겠어요.”라는 공감의 말이 있었다면, 아니면 그저 자세한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모습만 보였더라도 그의 태도가 그리 아프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가해자를 직접 만나 대화로 풀라’는 권유가 피해자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그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가해자를 대면하는 것이 트라우마를 재경험하게 하는 일이며, 대화로 풀라는 얘기가 사건을 축소하고 무마하라는 뜻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전화를 끊기 전 그의 반응이 상처가 되었음을 전했고, 그는 사과했다. 하지만 어떤 점이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미안하다고 하는 사과는 아픈 곳을 어루만져줄 수 없었다.
동료의 입장에서 보면 스트레스가 되는 말을 꺼낸 것은 나였을 테지만, 내 존엄, 트라우마가 걸린 문제였기에 앞으로 그를 대할 때마다 그의 말과 태도가 떠오를 것 같았다. 나는 정중하고 부드럽게 다듬은 이메일을 보내어 마지막 인사를 전하며 알렸다. 그의 말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성폭력 피해 후, 다시 겪는 고통에 대하여
▲ 2022년 성평등가족부에서 실시한 「성폭력안전실태조사」 조사 결과,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정책으로 ‘2차 피해 방지를 위한 정책’이 가장 높은 응답율(16.7%)을 보였다. [출처=성평등가족부]
2022년 성평등가족부에서 실시한 「성폭력안전실태조사」에서는 ‘성폭력 피해 이후 2차 피해(말이나 경험) 여부’를 묻는 질문의 세부항목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예로 들었다.
“피해 사실을 주변 사람에게 말해봐야 너에게 도움되지 않는다.”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네가 그런 행동을 할 여지를 주었다.”
“일을 크게 키우지 말고 가해자와 빨리 합의하는 것이 너에게도 좋다.”
“가해자는 원래 좋은(괜찮은) 사람인데 실수한 것이니 네가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친해서 한 행동(말)인데 네가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신고하거나 도움을 요청해봐야 가해자만 자극하게 된다.”
또한, 행위면의 2차 피해 예시로는 다음의 내용을 제시했다.
‘나에 대한 개인정보, 피해 내용 등이 유포되었다.’
‘나의 경험과 비슷한 피해 상황마다 내 이름을 거론했다.’
‘마치 내가 잘못해서 성폭력 피해가 발생한 것처럼 알려졌다.’
‘나를 문제 유발자로 낙인찍고 집단 따돌림을 하였다.’
‘폭언, 폭행을 경험하였다.’
나 역시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상처가 되는 말을 여러 차례 들어야 했다. 그때마다 아프고 외로운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된 것은 ‘2차 가해’, ‘2차 피해’라는 용어였다.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에 수록된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의 글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에 따르면, 2차 피해란 “1차 피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차별 주의와 잘못된 성 통념으로 인해 피해자가 마주하게 되는 부당한 일을 총칭한다”.
권김현영은 “여자 직장 상사의 성적 괴롭힘을 고발한 남자 직원은 남성성에 대한 고투와 낙인이 있을지언정 ‘큰일 하는 여자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성폭력 2차 피해는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남성의 눈으로 평가하고 조정하려는 성별 권력 관계가 작동해서 ‘정당화’되는 과정 전반에 걸쳐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이런 문화에서 성폭력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내가 ‘피해자성’에 갇혀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직장동료와의 관계를 정리한 뒤, 내게는 개운치 않은 느낌도 남았다. 좋은 관계를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말에 대한 내 반응이 나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에 묶어두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권김현영에 따르면 ‘2차 가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다. 이때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가 확장일로를 달리며 각자도생만이 유일한 생존 원리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여성은 더 침묵할 이유가 없었고, “‘2차 가해’라는 말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에 대응하는 ‘개인’의 전략으로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점점 더 자주 사용”되었다.
‘2차 가해’라는 용어는 가해를 저지른 행위자에게 주목하게 만들어 규제의 효과를 가진다. 그러나 그 말에 얽매일수록, 내 피해에 대한 타인의 충분한 인정 없이는 안심하고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무력해지기도 했다.
이런 문제의식은 여성학·평화학 연구자 정희진의 연구에서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정희진은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에서 특정 집단과 자신이 완벽히 동일하지 않음에도 동일시하는 시각으로 일관하는 ‘정체성의 정치’에 대해 다룬다.
“자신이 억압받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정체성의 정치”는 “우리는 피해자이며, 힘이 없고, 이러한 사실을 인정받을 것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그래서 정체성의 정치는 원망과 원한의 정서를 지닌다. 내게 2차 가해를 한 상대에게 내가 아픔을 돌려주려는 마음이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피해자성’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 될 때이다. 정희진은 이러한 정체성 정치는 “주변화, 배제, 종속의 상처가 존재를 증명”하도록 하며,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피해자에게 공정한 정의가 허락된다면
‘2차 가해’라는 말을 쓰지 말자거나,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피해자성에 빠져있다는 뜻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오히려 피해자가 ‘2차 가해’라는 말로밖에 자신을 지킬 수 없도록 만드는 공감 결여 사회에 있다. 피해자에 대한 존중은 당연히 지켜져야 할 정의임에도 이를 ‘얻어내기 위해’ 피해자측이 고투해야 하는 현실이 바뀌어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깊이 생각하게 해준 영화가 있다. 작년 화제가 되었던 영화 〈얼굴〉에서, 성폭행 피해 생존자인 이진숙은 자신을 돕기 위해 성폭행 사실을 전단으로 만들어 알린 정영희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몰랐을 거야. 그런 글을 쓰면 (사람들이) 백주상(가해자) 그놈이 아니라 성폭행당한 년이 누군지 더 궁금해한다는 거.”
▲ 영화 〈얼굴〉(연상호 연출, 2025)에서 피복공장 노동자 정영희는 동료 이진숙을 돕기 위해 사장 백주상이 성폭행범이라는 사실을 종이에 적어 공장 앞 시장에 뿌린다. 그러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 때문에 이진숙은 크게 상처를 받는다.
사실상 이진숙에게 2차 피해를 입힌 것은 누구일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용기 낸 정영희가 아니라, 가해 사실에 공분하기보다 피해자를 탓하기 바쁜 사회 분위기가 아닐까. 영화는 실화가 아닌 허구의 이야기이고, 회상 장면이 배경으로 하는 것은 1970년대이다. 그러나 이진숙의 대사는 지금 시대에 적용해도 어색함이 없다. 주변에 내 피해를 알리는 일부터 망설여지는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의지해 살아갈 수 있을까?
트라우마 연구의 권위자 주디스 루이스 허먼(Judith Lewis Herman)이 저서 『진실과 회복』에서 썼듯, 피해자의 회복은 개인 차원에 머물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사회 차원의 문제이다.
“공동체가 피해자 지원을 위해 결집할 때 한 사람의 복수심이었던 것은 모두의 옳은 공분, 즉 보상의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감정으로 바뀐다. 피해자에게 공정한 정의가 허락된다면, 피해자의 분노가 무력한 울분으로 곪아 터질 일도 없다.”
주목할 것은, 적극적인 2차 가해가 아니더라도 “그 내용을 알고 싶지 않아” 하는 “방관자들의 방관적 대응 또는 무대응”이 심한 상처를 야기하는 경우도 많으며, 이것이 “범죄를 정당화, 용인, 비가시화하는 사회의 폭력 생태계를 이루는 요소”가 된다는 점이다.
내 성폭력 피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동료와의 대화를 돌아보면서, 사실 나는 동료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지인들의 SNS를 보다가 크고 작은 조직의 성 비위 사건과 관련한 게시물이 눈에 띌 때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자세히 읽지 않고 넘기기도 했던, 모순된 모습이 내 안에 있었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것에 마음을 보태는 것. ‘무엇이 2차 가해인지’ 머리로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그 지점이 아닐까. 허먼의 말처럼, 회복의 마지막 단계는 정의가 되길 바란다.
[필자 소개] 민바람. 자신의 경험으로 사회 구조를 비추는 글을 쓴다. 퀴어, 여성, 신경다양성, 빈곤, 지역 문제의 교차성 탐구에 관심이 많다. 『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2025년 재출간), 『낱말의 장면들』(2023) 등을 출간 후, 퀴어 소설을 써왔다.
출처: 피해자는 왜 ‘성폭력 이후에 겪은 아픔’을 말할까-일다 - https://www.ildaro.com/10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