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써야지, 2주는 넘기지 말아야지, 생각하다가 어느새 20일 가까이 지나고 말았다. 마지막 글을 올린 뒤로 말이다. 9월과 10월 두 달 간 여러 일이 겹쳐 한 시도 쉴틈 없이 지냈는데, 그러고 나니 일주일 정도는 확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몸이 안 좋아서 골골대다가 또 정신 없이 시간이 갔다. 번아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번아웃이었던 것 같다. (혹시 제 글을 기다리신 분이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9-10월은 나름대로 프리랜서의 생활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고3 학생의 대입 자기소개서를 첨삭했고, 전자책 편집디자인을 했고, 인터넷신문사에서 기사 요청이 여러 차례 들어와 기사를 기고했다. 오전에는 영상 관련 교육 과정을 들었고 주말에는 평소처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 두 달만 놓고 보자면 (적어도 평일에는) '독립근로자로 생활한다'는 목표를 달성했다고도 볼 수 있을 법하다.
와, 그러고 보면 정말 나는 운이 좋다. 늘 알음알음 일이 들어와, 완전한 백수가 되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그런데, 왜 지나고 보면 가끔 일을 한 것이 득인지 실인지 헷갈릴까?
자발적 을의 자세, 현실적인 건지 비현실적인 건지 헷갈린다
오랫동안 한국어 강사로 일한 덕에 자발적 '을'의 자세에 익숙하다. 이런 점이 초보 프리랜서(이하 '독립근로자'로 칭합니다.)로서 존버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된다. 내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웬만해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억울한 마음도 안 들고, 일을 위해 어느 정도 금전적인 희생이 있더라도 투자라고 생각해서 아무렇지 않다.
자소서 첨삭이라고 하면 큰 돈을 받을 수도 있는 분야이지만, 나는 학교 차원에서 요청이 들어온 학생들의 글을 컨설팅 회사를 통해 받아서 첨삭한다. 그리고 원체 같은 일을 해도 시간이 훨씬 많이 드는 유형의 사람이라서, 시급으로 계산해 본다면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똑같거나 밑돈다. 전공 분야이고 경력도 꽤 있어서 이 사실을 생각하면 가끔, 아주 약간.. 슬프다.
그래도 매년 가을에 감사히 일을 받는 것은,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컨설팅과 상담 과정은 내가 담당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 학생과 학부모를 대하지 않고 순전히 텍스트만 놓고 고민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같이 일해온 지인분들의 회사라 소통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 나에게는 임금보다 중요하다.
전자책 편집디자인은 다른 의미로 감사히 일을 받고 있다. 나는 인디자인 초보인데다,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다. 경력도 실력도 없이 '성실'과 '센스'(이것도 주변 2명의 의견일 뿐이지만)만 가지고 덤비는 상태인데, 일을 맡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어디인가 싶다. 시간이 많이 드는 것도 당연하고 시급을 따질 주제도 아니다.
열정페이도 대환영하고 열정근로는 필수로 삼는 자세가 독립근로자로서 일단 뭐라도 해 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일단 이 일이나 저 일이나 무한책임제로 시간을 들이다 보면 내 생활을 챙길 여유가 없다.
당장의 결과물은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건강이라는 밑천이 없어진 후에는 일 자체를 지속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벌써 반 년간 늦게 자고 늦게 깨거나, 늦게 자고 일찍 깨는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먹는 음식의 질도 굉장히 들쭉날쭉하다.
일을 주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일을 하는 내 문제다. 일이 많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지만(일이 몰리는 것은 자소서뿐인데 그래봐야 1년에 1달이다),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물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에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벌이는 습관이 더해지니 늘 '일 위주의 생활'로 돌아간다.
내가 나의 가치를 낮추고 있는 건 아닐까
고민 끝에 생활수칙을 정하는 방법밖에는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가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기로 마음 먹었다.아무리 바쁠 때라도, 9시부터 6시까지만 일을 하는 것. 남은 일은 다음날로 미룬다. 성격 상 발 뻗고 잠들기가 영 쉽지 않지만, 유연해질 때까지는 유튜브로 최면을 들으면서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 보기로 했다.
이렇게 하다 마감 기한을 넘길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정한 시간 안에 더욱 집중하고, 하나의 일감 안에서도 꼭 필요한 작업과 내 욕심에 추가하는 작업을 구분해 가며 우선순위를 정하기로 했다. 아직은 거절해야 할 만큼 일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런 정도로 일을 늘릴 생각도 없기 때문에 습관만 잘 들이면 마감을 지키면서도 생활 패턴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수칙을 지키는 게 잘 되겠냐고 물으신다면, 순순히 '아니요'다. 한 번에 잘할 자신은 더욱 없다. 자주 맘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독립근로자 하겠다며? 독립근로자의 자산은 '나'인데, 장사 밑천을 다 끌어다 쓰면 정말로 어떻게 살 건데? 글 쓰겠다며? 그렇게 해서 글 쓸 힘은 남겠니?
이제부터 또 지난한 시행착오가 예상된다. 그 과정을 줄이기 위해, 생활 패턴보다 먼저 바꾸어야 할 것이 있었다.
직장을 나온 후 나는 쭉 독립근로자가 아니라 독립근로자 '지망생'이라고 생각했었다. 지인을 통해 외주를 조금 받게 되고 어쩌다 보니 신문사에 기고를 하게 되었을 뿐, 고정 수입이랄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생각은 맞지 않다. 나는 소속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길을 만들어 나간다는 점에서, 돈이 되든 안 되든 이미 독립근로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지망생'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두는 것은 머릿속에서 자신의 가치도 제한하는 자기암시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경력이 있는 분야조차 여전히 자격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늘 쉽게 죄송해하고, 뭔가 더 묻거나 요구해 보고 싶어도 자체 심의에서 걸러내곤 했다.
사실 분야에 따라 개인적인 약점이 있더라도, 내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조건을 넘어서려 애쓸 만큼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서 만들고 있으니, 그런 면에서 오히려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독립근로자가 갖추어야 할 요건으로 '신뢰'와 '책임감'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할 때, 당당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나하나의 일에 책임감을 가지는 것만큼, 독립근로자로서 '나'라는 브랜드에도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말이다.
전자책 시집으로 예술활동을 증명했다
가을 동안, '지망생'을 떼어버렸다(?)고 할 만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m.kawf.kr)에서 예술활동증명 과정을 거쳐 '예술인'으로 인정받았다.
등단을 해야 등록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분이 계실 것 같다. 나도 당연히 그럴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학 분야의 책을 낸 것만으로, 심지어 전자책 시집인데도 예술활동증명이 되었다. (ISBN이 있는 책이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독립출판을 하신 분이라면 이 부분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술활동증명'은 예술인 복지법 상 예술을 '업'으로 하여 예술활동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제도이다. 예술활동을 업으로 하고 있으면 예술인이라니! 지당하고 반가운 말씀이었다. 이렇게 공식 '예술인'으로 인정받으면 당장 뭐가 달라지는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재단에서 주최하는 여러 지원 사업에 신청해 볼 수 있고, 생활을 위한 대출도 신청 가능하다. '후일'을 도모할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창작준비금 지원, 파견지원, 산재보험, 사회보험료 지원, 의료비 지원, 생활안정자금 융자 등의 사업이 있다)
그리고 속한 곳도 기댈 곳도 없이 예술이 '직업'이 되는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예술인입니다"라는 공적 선언은 그 자체로도 힘이 된다. 문화시설 이용 시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는 '예술인패스'도 나온다. 별로 쓸 일은 없지만 받고 보니 기분이 좋았다. 역시 '쯩'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은 어깨가 펴지는 일이다.
인정 분야는 문학/미술(일반, 디자인공예, 전통미술)/사진/건축/무용/음악(일반, 대중음악)/국악/연극/영화/연예(방송,공연)/만화 등으로 다양하다. 공개 발표된 예술활동 자료(책, 포스터, 영상자료 등) 또는 예술활동 수입 증빙자료가 있으면 증명을 신청할 수 있으니 해당 분야에 계신 분들 중 아직 이 제도의 존재를 모르시는 분이 계시다면 사이트에 방문해 보시면 좋을 것 같다.
승인될 때까지 오래 기다리기는 했지만, 신청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1. 재단 사이트에 접속해서 회원가입을 하고 로그인 후 '예술활동증명' 탭을 누른다.
2. 요청하는 개인정보를 기입하고 예술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등록한다.
3. 행정심의를 거쳐 부족한 자료가 있으면 문자와 메일로 연락이 온다.
4. 심의위원회를 거쳐 문자와 이메일로 결과가 공지된다.
신청 완료부터 승인까지 최소 4주에서 7주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나는 시집에 필명을 썼는데, 필명과 동일인물이라는 증빙서류를 첨부하지 않아서 3번에 쓴 과정을 거치느라 거의 7주쯤 걸린 것 같다.
예술하니 예술인이고요, 글 쓰니 작가입니다.
'예술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상당히 낯간지럽긴 하지만, 그 말에도 스스로 당당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 혹시 "예술하세요?"라고 묻는다면 반사적으로 "아이, 뭐 예술까진 아니고요..."하고 손사래를 치며 물러설 것 같다. 그런데 "문학하세요?" "글 쓰세요?" "작가세요?"라는 질문도 마찬가지이니, 이름을 날릴 정도가 아니라면 납작 엎드려야 잘난 척의 오명을 피해갈 거라는 생각이 아주 머릿속에 박혀 있는 듯하다.
'×작가' 등의 필명 또는 닉네임으로 활동하시는 분들을 보면, 부러운 동시에 신기한 마음도 있었다. '작가'라는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는 것이 좋아보이면서도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거부감부터 들었다. 오프라인에서 만난 분께서 "작가신지 몰랐어요!"하시는 말에 "아아, 작가 아니에요! 지망생이에요."라고 못 박아 대답한 적도 있다. 등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심리도 있다. 적당히 발뺌해서, 상대방이 내 글을 읽고 '에이, 별 거 아니네.'라고 생각할 여지를 미리 없애고 싶은 거다.
하지만 이렇게 책임지고 싶지 않은 마음은 글을 쓰지 않고 있을 때도, 공모전에 투고를 하지 못할 때도 스스로에게 면죄부가 된다. '나는 아직 지망생이니까.' '연습하는 중이니까.' '쓰는 습관이 덜 들어서 그런 거니까.' 그리고 내가 쓴 글에 대해 자부심보다는 부끄러움이 커지게 한다.
예술인복지재단의 공적 선언을 핑계 삼아, 나는 스스로 붙이던 '지망생'이라는 말을 버려 보려고 한다.실은 공적 선언까지 필요하지도 않다. 그림을 업으로 생각하면 화가이고, 글을 업으로 생각하면 작가이다. 남에게는 그렇게 대하면서 한 번도 스스로를 그렇게 대접하지 못했던 것이, 모르는 사이 겸손이 아닌 자기암시의 독이 되고 있을 수 있다.
나를 낮추는 습관 탓에 여전히 어색하고 민망하지만, '작가'와 '독립근로자'라는 단어에 나를 좀 더 내어줘야 할 것 같다. 내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에 한 발짝 다가가는 방법도 될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