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유명한 책이어서 대체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은 책을 덮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모래 구덩이에 머리만 넣고 안전한 도피처라고 생각하는 타조가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앉은뱅이가 콩대를 꺾으러 밭을 기어 다니는 장면에서 어찌나 놀랐던지. 멀쩡한 다리를 가진 나는 한 번도 그들의 이동방법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나의 일이 아닌 것에는 이렇게 무지할 수 있구나.
이 작품은 현실에서 꿈으로, 마당에서 환상으로 마구 넘나들었다.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피투성이 현실을 그렸다. 서정적이면서도 잔혹한 이중구조가 섬뜩했다. 차마 끝까지 읽지 못했다. 하지만 '지상에서는 시간을 터무니없이 낭비하고, 약속과 맹세는 깨어지고,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라고 했던 지섭의 말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내 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문장은 삶이 순조롭지 않을 때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흘려보낼 때마다 문득 떠올라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여전히 지상에서 살고 있었고, 시간을 낭비했고, 약속을 어겼고,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들을 지나왔다. 그럼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날을 살았다.
오랫동안 외면했던 불편함은 글을 쓰면서 결국 만나게 되었다. 욕심이 생겼다.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정확히 드러내고, 가려운 마음을 시원하게 긁는 문장을 써낼 때의 쾌감. 그 기쁨을 갖고 싶은 욕심. 더 잘 쓰고 싶어. 더 정확하고 더 예리했으면 좋겠어.
나 자신에게 물었다.
궁극적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어떤 문체를 갖고 싶은지...
그 질문 앞에서 단 하나의 작품만이 떠올랐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설탕을 입힌 공진단 같은 글을 쓰고 싶어."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지만 공진단은 하루 만에 도착했다.
1. 윤호 : 다른 아이들/은희
"네가 말했었어. 그래서 내가 울었어. 나는 네가 아니면 싫었어." 그것은 윤호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작은 호텔로 가 다른 아이와 잠을 잤었다. 외등이 없어 어두운 골목 안 호텔에는 흠이 난 빨간 카펫이 깔려 있었다. 여자아이와 잔 다음 윤호는 늘 절망했다. 마음 깊이 절망했다. 한없이 어리석은 짓 같아서 자신의 존재까지 부정했다. 눈앞의 물체만큼이나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은희를 안으면 은희의 원피스가 겹쳐지며 바스락 소리를 냈다. 알몸의 은희는 윤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가슴에 댔다. 윤호가 두 팔에 힘을 주자 은희는 포옥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때 윤호는 어떤 도덕적인 핵심과 맞부딪쳤다. 그래서 이제 끝내야지,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은희를 안고 있는 윤호의 머릿속에 까만 기계들이 들어차 있는 은강시가 떠올랐다. '단체를 만들자. 그 사람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야.' 그날 호텔을 나서면서 윤호는 생각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윤호는 다른 아이들과 잤을 때는 절망했고, 은희와의 하룻밤 이후에는 각성했다. 왜 그랬을까?
절망은 욕망의 쓰레기장에서 피어난다. 다른 여자와의 관계 이후, 윤호는 자기혐오에 빠졌다. 하지만 그는 그 어리석음을 고치지 않았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관계에서는 무너져도 상관없다고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이다.
은희는 달랐다. 말없이 찾아와 앉아 있다 돌아가던 존재. 무언의 애정, 무언의 신뢰. 은희는 윤호를 '사람'으로 되돌려 놓는 거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은희를 품은 순간, 죄책감과 각성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이제 끝내야지." 그날 밤 윤호는 난장이 아들을 도울 단체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은희와의 바스락은 쾌락이 아니라 전환점이었다. 윤호는 은희를 안고 있는 동시에 은강시가 떠올랐다. 육체의 교감이 사랑, 연민, 사회적 의무로 연결되었다. 윤호는 세상의 슬픔과 책임감을 동시에 껴안기로 마음먹었다. 두 세계에 양다리를 걸치던 그가 드디어 방향을 정한 순간이었다.
2. 두 세계 : 냄새/향기
큰 달이 방죽 한가운데 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이 집 저 집에서 울어 대었다. 그 동네에선 아주 이상한 냄새가 났다. 누가 방죽 한가운데로 작은 나무배를 저어 나갔다. 윤호는 발밑에 쓰러져 있는 술 취한 사람들을 밟지 않기 위해 다섯 번이나 껑충껑충 뛰었다.
-중략-
달빛 아래에서 이 공구들은 난장이를 닮아 보였다. 난장이 옆에서 난장이의 아들은 라디오를 고치고 있었다. 그는 라디오가 고장 나 방송통신고교의 강의를 받지 못했다. 난장이의 딸은 팬지꽃이 피어 있는 두어 뼘 꽃밭가에서 줄 끊어진 기타를 쳤다.
입구에 경비실이 있고, 경비원들이 차를 세워 동네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거리는 깨끗하고, 집들은 그림 같았다. 걸어서 이 저택촌을 드나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봄이 되자 동네는 향기로 가득 찼다. 겹벚꽃, 덩굴장미, 라일락, 백목련, 산철쭉, 가막살나무, 박태기나무 등이 꽃을 피웠다. 벌들이 잉잉 소리를 내며 날았다. 그 동네에서는 과거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난장이의 마을은 부패와 고단함, 생존의 냄새로 가득하다. 하수구, 곰팡이, 눅눅한 방, 기름때, 정체된 공기… 이건 사람의 삶이 견딘 시간의 냄새다. 난장이 집에 있는 두어 뼘 정도의 꽃밭에 피어 있는 팬지꽃도 시청이나 구청의 화단에서 몰래 뽑아 온 것은 아니었을까. 유일하게 그 집과 어울리지 않는 게 그 팬지꽃이었다. 애기똥풀꽃이나 제비꽃과 다르게 일부러 심지 않고는 피기 어려운 꽃이니까.
반면, 윤호가 사는 곳에는 겹벚꽃, 라일락, 백목련 등 이름을 가진 향기들이 등장한다. 이건 구매되고, 관리되고, 소비되는 향기다. 계급의 상징이자 윤택한 삶의 암호로 작용한다. 윤호는 그 두 세계의 경계에서 중심을 잃었다. 향기가 가득한 세계에 사는 윤호는 냄새나는 세계를 마주한 후에 죄책감을 느낀다. 이 둘을 동시에 품을 수 없으니 절망했다. 은희를 안는 순간 끝내야지 중얼거리고, 은강시와 ‘단체’라는 이름의 구원장치를 떠올리게 된다. 그 구원의 출발점에는 바로 은희의 ‘바스락’ 소리가 있다. 그것은 계급과 계급 사이의 마찰음이다. 책임감과 죄책감이 교차하다 끝내 울리는 비명이다. 두 세계의 경계를 넘어서겠다는 의지는 아주 작게 바스락거렸지만 또렷했다.
3. 꿈과 환상 : 윤호/영희
그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너무나 끔찍하다고 했다. 그의 책에 의하면 지상에서는 시간을 터무니없이 낭비하고, 약속과 맹세는 깨어지고,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눈물도 보람 없이 흘려야 하고, 마음은 억눌리고 희망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일 끔찍한 일은 갖고 있는 생각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일이다. 지섭은 다시 도도새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 윤호는 우주인이 창 밑에 와 유리문을 두드리는 꿈을 꾸었다. 벽돌공장의 굴뚝 위에 올라가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난장이의 꿈도 꾸었다. 다음 날 학교 수업을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벽돌공장 굴뚝을 허는 날 알았단다. 굴뚝 속으로 떨어져 돌아가신 아버지를 철거반 사람들이 발견했어.”
그런데—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다친 벌레처럼 모로 누워 있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두 손으로 가슴을 쳤다. 헐린 집 앞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버지는 키가 작았다. 어머니가 다친 아버지를 업고 골목을 돌아 들어왔다. 아버지의 몸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내가 큰 소리로 오빠들을 불렀다. 오빠들이 뛰어나왔다. 우리들은 마당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까만 쇠공이 머리 위 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날아갔다. 아버지가 벽돌공장 굴뚝 위에 서서 손을 들어 보였다. 어머니가 조각마루 끝에 밥상을 올려놓았다. 의사가 대문을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가 나의 손을 잡았다. 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울음이 느리게 나의 목을 타고 올라왔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난장이가 사는 마을에 다녀온 후 윤호는 꿈을 꾼다.
첫 번째 꿈. 우주인이 창 밑에 와 유리문을 두드렸다. 그 우주인은 윤호 자신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행성을 떠나 와 지구에 기웃거리는 생명체는 지상과 유리문 하나를 두고 격리된 채 아직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누군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는 존재이다.
두 번째 꿈. 굴뚝 위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난장이. 이건 윤호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외면했던 현실의 상징이다. 굴뚝은 노동과 생계, 종이비행기는 꿈, 희망, 메시지. 굴뚝 위에 올라선 난장이—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멀리 가지 못하는, 쉽게 찢어지는 나약한 종이 날개를 가진 비행기. 나는 과연 굴뚝에 올라서서 그 비행기를 날릴 수 있을까? 아니, 그저 난장이가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장면을 땅에 안전하게 발을 붙인 채 바라보고만 있다. 난장이는 벽돌공장 굴뚝에서 떨어져 죽고 그가 날린 종이비행기는 까만 쇠공이 되어 중력을 거슬러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그들의 빈약한 밥상은 여전히 조각마루 위에 올려진다.
그날 밤 꿈에서 보았던 쇠공은 일직선으로 나를 향해 날아왔다. 그것은 윤호의 것이었고, 지섭의 것이었고, 이제는 나의 것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을 수도, 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쇠공을 본 이상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고통 위에 지어진 지금의 삶이, 더 이상 안전하다고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땅 위의 내 발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으로 ‘변화’를 원한다는 신호였다.
4. 죄 : 사람들/신
그는 열처리 탱크가 터질 때 현장에 있었다. 젊은이의 몸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그는 하루에 천삼백 원씩 받고 일했다. 남편을 잃은 어린 신부는 목을 매어 죽었다. 어머니는 신부가 임신 중이었다고 말했다. 배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또 하나의 생명이 어머니를 울렸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랑 때문에 괴로워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살았다. 배운 사람들이 우리를 괴롭혔다. 그들은 책상 앞에 앉아 싼 임금으로 기계를 돌릴 방법만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우리의 밥에 서슴없이 모래를 섞을 사람들이었다. 폐수 집수장 바닥에 구멍을 뚫어 정수장을 거치지 않은 폐수를 바다로 흘려 넣는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나는 그것이 못마땅했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나의 생각을 수정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옳았다.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은강에서는 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우리는 ‘밥에 모래를 섞는 손’만을 가해자로 단정해왔다. 그러나 사실은 침묵한 자들, 고개를 돌린 자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우리 모두가 그 죄의 테두리 안에 있었다.
질문은 끝끝내 신에게 향한다.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 앞에,
당신은 어디에 있었느냐고.
왜 침묵했느냐고.
난장이의 작은 공은 내 안에서 뜨겁게 달아오른다. 나는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글을 쓸 테야."
"무슨 글? 어떤 글?"
"나도 몰라."
세상을 바꿀만한 힘을 가진 글을 쓰지는 못할 것이다. 예쁘기만 한 글, 유행가처럼 한번 휩쓸고 사라지는 글, 알맹이 없는 글만은 쓰지 말자. 비록 ‘바스락’ 거리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