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궁전-폴 오스터

2부 : 사랑 (헤어짐)

by 글로리아

항상 노션에 초안을 쓴 다음, 티스토리에 이미지와 함께 업로드를 해본다. 모니터 상에 이미지와 글이 어떻게 보이고 읽히는지 확인한 후, 차곡차곡 모았다. 그리고 거기서 뒤적여 브런치스토리에 공개할만한 글을 찾고 다시 다듬는다. 알고 보니 브런치스토리에는 서랍기능이 있어서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글을 한 곳에만 저장해 두는 것은 왠지 불안하다. 여러 플랫폼을 거치면서 내 글을 읽고 또 읽는다. 고치고 또 고치고... 불과 몇 달 전의 글이어도 가슬거리는 부분이 너무 많다. 이러다 평생 고쳐야 될 것 같은데...


나는 완벽주의 성향이 아니다. 일단 저지르고 밀고 나간 후 수정하고 보완하는 쪽을 택한다. 사랑도 그랬던 걸까? 미리 계획하고 플랜을 짜고 아, 이 정도면 완벽해!라고 믿어지는 순간을 기다린 후, 밀고 나갔던 적은 없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순진했던 대가는 혹독하게 치러졌다. 강해지고 싶었다. 눈물과 상처는 나약함의 증거 같았거든. 한참 후 깨달았다. 상처받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는 게 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껏 사랑하고 모든 것을 탕진한 다음 빈손을 툭툭 털고 가던 길을 묵묵히 가는 것. 내가 원하는 강함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달의 궁전을 읽는 며칠 동안 새벽에 일어나 멍하니 식탁의자에 앉아 있곤 했다. 마르코가 지나왔던 사막과 호수, 그리고 바다... 왠지 익숙하다. 아, 내가 먼저 그 길을 걸었었구나. 나의 내면에 말 거는 방법을 몰랐고 글 쓰는 방법을 몰라 그냥 지나왔을 뿐이지 분명 내가 지나온 길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한기를 느꼈다. 지구에 혼자인 것 같았다. 무서워. 고독해. 사막의 바람만 느껴져. 지잉—귀 옆을 스쳐가. 내게서 나오는 소리도 없고 나를 부르는 소리도 없는... 귓바퀴 주위는 진공상태였다.


폴 오스터는 인생을 가로질러가면서 만났던 죽음과 사랑, 그 이후의 새로운 출발을 길게 늘어놓았지만 그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사랑'임이 분명하다.


밤새 내 삶을 뒤졌다. 사랑이 있긴 했어? 구원이 있었나?

지금까지 내가 했던 사랑은 뭐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잖아!

그럴 수밖에 없지. 그것을 늘 타인에게서 찾으려고 했으니까. 그러니 항상 무너지고 아팠던 것 같다. 나의 지적 허영심 때문이다. 나보다 이상이 높고,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 좋았다. 그런 사람과의 사랑은 늘 자존심이 상했고 비참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더 사랑했으니까. 사랑 아닌 망상. 나를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데려다줄 거라는 달콤한 열광. 나는 늘 낮은 위치에 있었다. 어느 날 내 사랑이 기만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용히 차갑게 감정이 식었다. 사랑이란 정말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지만 나를 갉아먹어가면서까지 지켜내야 할 것은 아니었다. 매달렸던 사랑을 내려놓았다. 그래, 나 자신부터 사랑해주어야 했구나.



"이젠 너무 늦었어. 난 이제 당신에게 마음을 열 수가 없어. 당신도 알 거야. 내가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다는 거. 난 그런 위험을 다시 겪을 수 없어."


"그렇다면 다른 남자를 찾아냈다는 거야?"


"벌써 몇 달 됐어. 당신이 마음을 정리하려고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을 동안 내가 뭘 하길 바란 거야?"


"당신 지금 그 자식하고 같이 침대에 있지, 그렇지?"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 아냐."


"그렇지. 안 그래? 얘기해 봐."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그렇진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에게 물을 권리가 있는 건 아냐."


"난 그게 누구 건 상관 안 해. 누구 건 달라질 건 조금도 없으니까."


"그만해, M.S., 난 참을 수가 없어. 한 마디도 더 들어줄 수가 없어."


"제발 부탁이야, 키티. 내가 돌아갈 수 있게 해 줘."


"그만 끝내기로 해, 마르코. 몸조심하고, 제발 몸조심하고."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키티는 그를 찾아다니고, 구조하고, 기다렸다. 늘 그녀는 기다리는 위치였다. 둘이 서로 거리를 두기로 했을 때조차 헤어짐을 말하지는 않았었다. 두 사람은 사랑의 마지막 잔해를 목격했고 더 이상 함께 할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키티는 울면서 말렸지만, 마르코는 떠났다. 그는 아마 아직도 그녀와 끝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키티는 그와의 관계가 끝났음을 알리고 전화를 끊는다.


처음.


처음으로 그녀가 단절을 선택했다. 그녀의 단절이 무서운 이유는 먼저 사랑했고, 항상 기다리는 것은 그녀 쪽이었기 때문이다. 마르코는 그녀와 살던 집을 나섰지만 마지막 혈육인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정말 이 세상에 혼자 남겨졌구나 느꼈을 때 그녀가 생각났다. 돌아가고 싶다. 회복하고 싶다. 나를 온전히 안아주고 기다려주는 사랑은 그녀뿐이다. 하지만 그날 새벽의 전화 통화는 사랑의 끝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키티에게는 유산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어서 자기가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겪었던 일에 의기소침해졌고 기운이 빠져서 마치 초상을 당한 사람처럼 침울하게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나는 그녀를 위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극복할 힘조차도 끌어낼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앉아서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또 어떤 때는 내가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그녀가 저지른 짓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그것이 가장 지독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마침내 나의 내면에 숨겨진 추악함과 잔인성을 보았을 때, 나는 겁에 질려 나 자신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제는 더 이상 그래도 있을 수가 없었다. 나라는 인간을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키티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한심하게 나약한 나 자신과 내 바뀐 모습의 괴물 같은 반영밖에는 보지 못했다.


-중략-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심지어 우리는 싸움이 가장 격렬하고 비탄스러울 때에도 이쯤에서 그만두자거나 사실을 부정하거나 우리의 감정이 바뀌었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문제는 우리가 이제 더 이상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같은 언어로 말하지 않는 연인.

말이 통하지 않는다.

답답하다.

그의 말은 나의 가려운 곳을 긁지 못하고 다른 생채기만 내고 있다. 음성언어는 허공에서 서로에게 살을 날린다. 벽과 부딪쳐 돌아오는 소리는 내 목소리뿐이다. 어느 순간 혼자 말하고 있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한다. 그렇게 지쳐간다.


사람은 실수한다. 실수가 있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상처를 주기도 하고 고개를 돌려 외면하기도 한다. 상대에게 그 죄를 추궁한다. 재판자가 되어본다. 가해자 주제에 판을 벌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실수를 판결하고 죗값을 정하고 그 값을 치르게 한다. 대부분의 이별은 그렇게 시작된다. 상대를 벌주면서 본인 또한 고통받는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내가 고통받을지언정 당신에게 반드시 벌을 주겠다는 결심을 한다. 나였던 너를 잃는 고통. 그렇게 청춘을 허비한다.


마르코가 왜 그렇게 자신의 아이에게 집착을 했는지 알 것 같다. 갖지 못했던 것에 대한 염원. 마르코는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가족의 중심이 되어 울타리이자, 보호자가 되는 문턱에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외삼촌에게 잠깐이었지만 느꼈던 행복, 사랑받는다는 느낌, 어쩌면 긴 방황을 끝낼 수도 있다는 희망까지...... 그 모든 것은 손에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나는 아버지가 되기를 원했고 이제 그런 기회가 눈앞에 다가와 있는데 그 기회가 날아가 버린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아기는 내 어린 시절의 외로움을 보상할 기회, 가족의 일원이 되어 나 자신보다 더 큰 어떤 것에 속할 기회였다. 그때까지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기에, 아기를 잃는다는 생각이 종잡을 수 없는 절망의 분출로 터져 나왔던 것이다. 나는 키티에게 소리치곤 했다.


"만일 우리 어머니가 이성을 가졌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거야."


그러고 나서는 그녀가 뭐라고 대거리를 할 틈도 없이 밀어붙였다.


"내 아기를 죽인다면 그건 나도 같이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우리에게는 시기가 좋지 못했다. 단 몇 주일 내에 결정을 내려야 했고,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압박감이 더 심해졌다. 우리 둘 사이에는 다른 어떤 화젯거리도 없어서 우리는 끊임없이 아기 문제를 가지고 때로는 한밤중까지 갑론을박 말다툼을 벌이며 말의 홍수 속에서, 배신에 대한 맥 빠진 비난 속에서, 우리의 행복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중략-


다음날 아침 우리는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왔지만 사정은 결코 예전과 같지가 않았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지나간 일은 잊어버릴 수 있다고 자신을 설득했음에도, 예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을 때는 그 삶이 더 이상 거기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인'과 '연'을 믿는다.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간절해도 연결되어 있던 '연'이 끊어지면 '인'은 그 힘을 잃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우리 사랑은 시간을 다했다. 주섬주섬 나의 잔해물을 주워 담고 떠나야 한다. 내가 사라진 후, 사망자의 유류품처럼 내 조각들이 그를 괴롭히지 않기를. 그것이 나의 마지막 배려다. 난 조용히 내 흔적, 내 향기, 내 이름조차 지우고 그 자리를 떠난다. 사랑했던 한 시절에게 안녕을 고하면서.




달의 궁전-02.png image by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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