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버스는 13분 후에 도착이었다. 걷기로 했다.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고 패딩 모자를 뒤집어썼다.
지하철역 삼거리를 지나면 바로 탄천이다.
시야가 탁 트이면서 차갑고 투명한 겨울 하늘이 펼쳐진다.
걸으면서 어떤 책을 빌릴지 고민했다.
원래의 보물지도 순서대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선택할 차례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과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도 읽고 싶었다.
나는 한동안 하루키를 읽지 않았다.
『1Q84』 1권을 읽고 나서,
아, 이제 그는 변했구나—라는 막연한 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변했다기보다,
아마 내가 변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그를 떠나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했던 작가를 더 이상 찾지 않는다는 건
실망이 아니라 졸업에 가깝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모든 책을 그렇게 대하지는 않지만,
나는 읽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다.
아오마메의 역습은 강력했다.
하루키의 책은 그 후 읽지도, 찾지도 않았다.
첫사랑을 일부러 피하듯이.
그러다 오늘,
다시 그를 집어 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하루키가 주연, 감독, 시나리오를 맡은 영화를
어린 시절에 보고 동경하다가
성인이 되어 감독 하루키의 인터뷰를 보는 기분이랄까.
왜 그 인물을 선택했는지,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했는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
읽고 싶어진다.
이건 재열독이 아니다.
재회에 가깝다.
다시 사랑하겠다는 뜻도 아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은 자리에 앉히겠다는 마음이다.
—기껏해야 십 년 정도입니다. 그 기한을 넘어서면 두뇌의 명석함을 대신할 만한 좀 더 크고 영속적인 자질이 필요합니다. 말을 바꾸면, 어느 시점에 '날카로운 면도날'을 '잘 갈린 손도끼'로 전환하는 게 요구됩니다. 그리고 좀 더 지나면 '잘 갈린 손도끼'를 '잘 갈린 도끼'로 전환하는 게 요구됩니다. 그 같은 몇 가지 전환 포인트를 제대로 뛰어넘은 사람은 작가로서 한 단계 거물급이 되고, 아마도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을 것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27
소설가는 어떤 종류의 물고기와 같습니다. 물속에서 항상 저 앞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서는 죽고 마는 것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28
책을 펼치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절이나 변심이 아닌, 목숨을 건 갑각류의 탈피였어.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