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법정
사랑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야. 느끼는 것과 하는 일이 모두 강렬해진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나에게 그 시간은 삶이 다른 데 가 있지 않았던 몇 번 안 되는 시간 가운데 하나야. 너는 나한테 언제나 아름다울 거야. 아침에 잠을 깨서 네가 옆에 있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잊지 못할 거야. 나는 너에게 계속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을 뿐이야. 천천히 상해 가는 모습만은 보고 싶지 않았어.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크리스마스는 혼자 보내거나 아니면 부모님과 함께 보내겠지. 윌은 곧 캘리포니아로 간다니 그렇게 되겠지. 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니까 그러지 마. 윌은 너를 무척 좋아하고 너를 엄청나게 존경하고 있어. 그 사람은 벌어진 일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일 뿐이야. 지저분한 편지 용서해 줘. 이 두서없는 편지를 보면 내가 너와 함께했던 방식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나겠지. 나를 용서해 줘. 너는 나한테 너무 잘해주었어. 우리가 계속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어. 내 모든 사랑으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클로이가 윌과 밤을 보냈다는 대목을 읽으며, 나는 놀라움보다 먼저 의문이 들었다. 사귀는 남자를 두고 그 남자의 직장 동료와 잘 수 있는 여자가 있다는 것에. 아니, 존재할 수 있다. 그럴 수 있지. 이혼전문변호사가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막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를 보면서 더 이상 감탄하지 않는 남자에게 서서히 사라져 가느니 내 존재를 경이롭게 봐주고 감탄해 주는 남자 쪽이 훨씬 끌리는 것은 사실이다. 나라도 윌에게 가고 싶다. 하지만 클로이처럼 갈 용기는 없다. 새로운 남자와 사귀기 위함이 지금의 사귐을 끝내는 이유가 되어선 안된다. 사랑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애도의 시간을 가지고 난 후, 새로운 인연을 맞이하고 싶다.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닌, 내 삶에 대한 예의다. 죄책감의 노예로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지금까지 사랑했던 기억들을 되짚어보면 '정말 사랑이었을까?' 의구심이 든다. 당시에는 진심이었다. 행복했었고, 헤어졌을 때는 마음이 아팠다. 지금은 그저 무덤덤하다.
아, 한 사람.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형태에 가장 가까웠던 사랑을 나에게 준 사람이 있었다. 여중, 여고, 여대를 졸업한 것은 나의 좁은 인간관계의 변명이다. 고되고 외로운 서울살이에 그는 빛이었다. 어수선하고 무질서했던 생각들이 정돈되었다. 내 안에 살고 있던 싸움닭이 온순해졌다. 편안했고 따뜻하게 여겼던 어느 일상의 오후, 그는 갑자기 떠났다. 이별했지만 사랑은 끝나지 않았고, 그게 나를 아프게 했다. 감기에 걸린 것처럼 열이 끓어올랐다. 나를 부숴서라도 증명하고 싶었다. 그 없는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아주 강한 무언가 필요했다. 그 '무언가'는 욕구로, 몸으로, 낯선 사람으로 나타났다. 그때 나는 미쳐있었다.
편지는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기억만 새롭게 할 뿐. 편지에서 그녀의 말의 억양과 악센트를 느낄 수 있었고, 그와 더불어 그녀의 얼굴 모습, 그녀의 살갗 냄새가 되살아났다. 그리고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도. 나는 그 편지의 최종성 때문에, 확인되고 분석되고 과거 시제로 바뀌어버린 상황 때문에 울었다. 그녀의 구문에서 묻어나는 의심과 양면성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메시지는 분명했다. 끝났다. 그녀는 끝난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사랑은 썰물이 되었다. 나는 배신감에 휩싸였다.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투자한 관계가 나의 느낌과는 관계없이 파산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느끼는 배신감이었다. 클로이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그렇게 주장했다. 새벽 4시 30분에 내 마음의 법정에서 그런 공허한 평결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가망 없는 짓인지를 잘 알면서도. 아무런 계약이 없었음에도, 마음의 계약밖에 없었음에도, 나는 클로이의 신의 없는 짓에, 그녀의 이단에, 그녀가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낸 것에 상처를 입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가능한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정말 통렬한 장면이다. 알랭 드 보통은 감정을 해부하면서도 그 고통을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나는 배신감에 휩싸였다.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투자한 관계가 나의 느낌과는 관계없이 파산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느끼는 배신감이었다."
특히, 이 문장. 사랑이 한 사람의 내부에서 얼마나 강하게 지속되고, 또 얼마나 한순간에 일방적으로 무너질 수 있는지 잔인할 만큼 정확하게 보여준다. 너무 현실적이다. 편지의 억양, 살갗 냄새, 목소리의 흔적, 그리고—"끝났다"는 결론. 거기엔 더 이상 감정을 두고 논의할 여지가 없다. 상대는 떠났고, 남은 사람은 그 빈 의자에 자기감정만 앉혀놓고 계속 대화하고 있다.
"마음의 계약밖에 없었음에도…"
이 대목에서 울컥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명시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향한 어떤 맹세는 분명 존재했다. 그 맹세가 깨질 때 느껴지는 건 '법적 배신'이 아니라 존재의 부정, 사랑의 배반이다. 그래서 편지는 위안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편지란 '이해한다'는 말로 '이젠 끝났어'를 포장하는 도구일 때가 많다. 냉정하고, 잔혹하게.
작가의 말이 너무 정확해서, 나는 오래된 기억 속 편지들을 들추었다. 결혼 한 달 전에 파혼 통보를 받았던 그때. 낡은 아파트에서 혼자 뒹굴며 울었다. 다 큰 어른이 아이처럼 소리 내서 엉엉 울었지. 그때 내 곁에 있는 거라곤 거실벽에 부딪쳐 되돌아오던 나의 울음 메아리밖에 없었다. [그날, 나는 죽었다]의 배경이 된 장소가 아마 그곳일 거다. 작은 노트 한 권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기를, 우리 사랑했던 순간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편지에서 일기가 되었다. 노트를 다 채울 때 즈음 나는 그를 보낼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 그 후엔 기타를 쳤다. 코드 지판을 일일이 손으로 그렸다. 몇 개 안 되는 피크가 닳을 정도로 연습했다. 하나님께 가 닿지 못하는 기도와 찬양은 결국 울음으로 끝났다. 우울증 약은 절망의 전원버튼을 일시적으로 꺼줄 뿐이었다. 뒤틀린 샤시창이 있는 베란다는 점점 빈 술병으로 가득 찼다.
알랭 드 보통의 글은 단순한 분석이 아니라 해체다. 그는 감정을 칼날처럼 정확하게 갈라놓는다. 그래서 읽다 보면 점점 화가 치민다. 내 상처가 너무 또렷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그때의 기억을 불러낼 만큼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내 마음의 법정에 세우지 못했다.
아니, 세우지 않았다.
나는 내 분수를 안다. 나는 재판장이 아니다. 슬퍼하고 절망하고 욕은 할지언정 사랑의 재판장에서 판결 내리는 자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살아오면서 나는 남겨진 자이기도 했고, 떠나는 자이기도 했으니까.
그들이 나를 떠났다고 악역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계속 반복되는 질문은 하나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사랑은 길이가 아니라 강도의 문제다.
알랭 드 보통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내 기억 속 편지와 상처가 다시 깨어난다.
배신과 애도의 순간, 그리고 질문—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