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기동의 오르막길을 올랐다.
누군가를 기다려야 했다.
초봄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대학 내 구내서점으로 향했다.
세상은 연일 불황이라고 시끄러웠지만
그곳은 활기가 가득했다.
맥 빠지고 주눅이 들었다.
이런 대학에 오려면 수능을 몇 점이나 맞아야 하는 거야.
IMF의 칼바람은 지방대를 간신히 졸업한 내 등에만 꽂혔다.
학생회관의 계단을 올랐다.
서점 안은 따뜻했다.
깔끔한 판화 꽃그림이 찍힌 책에 눈이 갔다.
법정스님의 책이었다.
훗, 나 교회 다니는데?
스님이 쓰신 책을 읽어도 되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책들은 무거운 주제였다.
글자도 많았다.
가뜩이나 무거운 어깨 위로
무게를 더하고 싶지 않았다.
뭐 어때? 책을 펼쳤다.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책먼지를 품은 빛공기가 떠올랐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른 눈이 떠졌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윤곽마저 보였다.
거듭거듭 버리고 떠나라는 메시지는
낡은 생각을 버리고, 낡은 습관을 버리고,
자기답게 사는 삶을 선택하라는
울림으로 안겨왔다.
산사 뜰에 서 있는 나는
이미 또 다른 나였다.
다른 내가 깨어난 순간이었다.
아… 이제는 어렵겠구나.
적당히 타협하며,
계산하고,
회피하고,
비겁하게 사는 일은.
저 녀석이
그런 삶을
가만히 두지 않겠구나.
그 후 나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엎치락뒤치락
살아가고 있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자기가 살던 집을 훌쩍 나오라는 소리가 아니다. 낡은 생각에서, 낡은 생활 습관에서 떨치고 나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눌러앉아서 세상 흐름대로 따르다 보면 자기 빛깔도 없어지고 자기 삶도 없어진다. 자주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남의 장단에 의해서, 마치 어떤 흐름에 의해서 삶에 표류당하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자기답게 거듭거듭 시작하며 사는 일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생명은 늘 새롭다. 생명은 늘 흐르는 강물처럼 새롭다. 그런데 틀에 갇히면, 늪에 갇히면, 그것이 상하고 만다. 거듭거듭 둘레에 에워싼 제방을 무너뜨리고라도 늘 흐르는 쪽으로 살아야 한다.
홀로 있는 시간 p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