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모국어야.
엄마는 종이 한 장 허투루 버리는 일이 없었다.
아이가 울면, 가만히 식탁 의자에 앉히고
냉장고 위에 포장지 하나를 꺼낸다.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지는 호랑이가 되었다.
엄마는 접힌 종이호랑이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신기하게 호랑이는 꼬리를 움직이기도 하고
으르라앙거리며 울기도 했다.
종이 동물은 점점 늘어났다.
염소, 사슴, 물소.
그것은 종이로 만들어졌지만
원래 동물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물소는 간장 종지에서 텀벙거리다가
다리가 젖어 흐물거리기까지 했다.
종이 물소를 조심히 가져다 햇볕에 말려주었다.
검게 물든 다리는 쪼글거린 채 똑바로 걸을 수 없었다.
엄마는 웃으며 스카치테이프를 붙여주었다.
물소는 예전처럼 뛰어다니고 장난을 치지만
이제 간장 종지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마크는 잭의 종이호랑이를 찢어 구겨버린다.
종이호랑이 라오후는 더 이상 울지 못했다.
그저 구겨진 채로, 조용해졌다.
책을 읽던 나도 조용해졌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이구나.
미국인 아빠,
중국인 엄마,
혼혈인 잭.
그 장면은 단순히 한 아이의 장난이 아니었다.
한 문화가, 한 언어가, 한 사람의 뿌리가
아무렇지 않게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마크는 나쁜 아이였을까.
짙은 인종차별주의자였을까.
아닐 것이다.
그의 부모의 시선과 말을
고스란히 전해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은연중에 갖고 있는 편견과 사고방식은
시선과 말의 형태를 갖고 타인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그 정신을 찢는다.
이야기는 말한다.
변해야 하는 것은 엄마의 중국어가 아니다.
엄마의 문화도 아니다. 언어와 문화의 우위를 가리기엔 우리의 앎은 너무 얕다.
자국의 문화와 언어마저도 평생을 두고 배우지 않는가. 변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다.
잭은 엄마의 중국요리와 중국어가 싫어졌다.
“영어로 말해요.”라고 외친다.
아빠도 슬며시 잭을 거든다.
엄마는 말한다.
“사랑(Love)이라고 말하면 입술에서 느끼지만, 사랑(愛)이라고 말하면 여기서 느껴요.”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는다.
그 장면은 조용했지만 진하게 남았다.
모국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다.
살갗을 뚫고, 뼈를 지나,
심장을 움켜쥐는 감각이다.
한때, 나는 사랑을 고백했다.
“너는 나의 모국어야.”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모국어란 그런 것이다.
나를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틀려도 괜찮고,
생략하거나 비틀린 문장이어도 알아듣고,
침묵마저 이해하는 언어.
그 품 안에서는
나를 애쓰지 않아도 된다.
모국어란 그렇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자리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너는 나의 모국어야.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 심장이 생기기 전,
하나의 점이었을 때부터
나를 감싸고 있던 양수.
옹알이하던 나를 기다리고,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기까지
침묵조차 읽어내며
오래도록 꿈꾸던 존재.
그게 너야."
켄 리우는 마지막에 편지를 꺼내 든다.
어쩌면 예상 가능한 장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진다.
그 편지는 이야기의 결말이 아닌
이미 늦어버린 사랑이기 때문이다.
읽지 못했던 말들,
전하지 못했던 마음,
그리고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들.
책을 덮고 나서 이민자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여태껏 한 번도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간 적 없는
타국에서의 삶,
다른 인종, 혼혈인으로서의 갈등.
문학에서 드러난 그 삶에는
인간의 온기와 고통이 있었다.
그 고통은 여전히 사람을
한 걸음 더 자라게 한다.
간접적으로 겪는 내가
어찌 다 짐작할까 싶으면서도
시선이 한 뼘쯤 열린 것에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엄마는
종이동물들의 몸에 편지를 남긴다.
당연한 것일까.
영어가 아닌 엄마의 모국어로 쓰인 편지였다.
사회생활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
심장에서 나온 말을 기록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잭은 편지를 들고 거리로 나선다.
누가, 좀 읽어주세요.
그런 마음이었겠지.
대기근과 문화 대혁명 속에서
어린 나이의 엄마는 혼자 살아남았다.
홍콩에 불법으로 들어와 가정부 일을 하다가
시장 할머니의 권유로 국제결혼업체에 가입을 한다.
그래서 팔려오다시피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 것이었다.
잭이 태어나고
엄마는 잭의 얼굴에서
자신의 엄마, 아빠 얼굴을 본다.
자신에게 남은 쌀을 먹이기 위해
정작 본인은 흙을 먹던 엄마.
홍콩에서 사업하는 외삼촌 때문에
숙청당한 아빠.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그 모든 게 진짜였다는 증거가
아기의 얼굴이었다.
그래, 내 삶은 가짜가 아니었어.
모든 게 진짜가 되는 기적을 말하는
엄마의 편지를 읽고 잭은 고개를 숙인다.
중국인 관광객은 통역을 끝내고,
잭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가 놓는다.
잭은 그 편지에 답장을 쓴다.
간결하게.
그리고 접힌 선을 따라 다시 종이호랑이를 접었다.
종이호랑이 라오후는 가르랑거리며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