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자와 남자
도서관에 가면 늘 앉는 자리가 있다.
2층 자료실의 창가 테이블.
창가 자리는 태블릿과 노트북 사용자들을 위한 자리다.
조명이 화면 각도에 정확히 떨어진다.
조금 불편하다.
그래서 좋다.
느지막이 도착해도 늘 비어있다.
창문을 마주하고 있어 고개를 들면 뒷산이 보인다.
계절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굴참나무 가지가 손 뻗으면 닿을 듯 가깝다.
아, 산새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서가의 빼곡한 책들이 특유의 중저음으로 말을 걸어온다.
문학의 물질세계에 발을 들인 기분이다.
예전에는 도서관 열람실만 들락거리며
자격증이나 어학 공부만 했다.
형광펜 자국과 밑줄, 기출문제.
나는 내게 돈을 벌어다 주는 책만 읽었다.
소설 같은 가상의 세계,
만들어진 감정까지 읽을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글쓰기의 꿈은 오랫동안 버려졌다.
다시 집어든 꿈은 나의 밑천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문장은 짧았고, 생각은 얕았다.
그래서 더 목이 말랐다.
"좋은 문장을 만나고 싶어."
하나의 책을 읽으면 또 다른 책으로 연결되었다.
도장 깨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신이 났다.
도서관은 열린 문이었다.
오늘은 평일인데 그녀가 아침 일찍 왔다. 요즘은 뭔가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고 발자국이 또렷하다.
저 멀리 창가 쪽에 한번 앉으면 웬만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책과 태블릿, 그리고 노트. 거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한 번쯤 돌아봐 주면 좋을 텐데.
옆자리 직원의 컴퓨터에 시스템 오류가 생겼다. 이런 간단한 문제도 내가 없으면 해결이 되지 않는다.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묻는 직원에게 일부러 큰 소리로 설명했다. 내 목소리는 분명 그녀의 뒤통수에 꽂힐 것이다. 이 정도 데시벨이면 돌아볼 만도 한데 데스크 앞쪽 소파의 어르신들만 나의 큰 목소리에 놀라 흘깃거린다.
책을 반납하는 것은 키오스크를 이용하더라도 대출할 때는 꼭 데스크를 이용했던 그녀가 요즘은 대출도 키오스크로 하곤 쌩하니 가버린다.
키오스크가 나의 연적이 될 줄이야. 참 씁쓸한 시대다.
점심시간. 지하 구내식당에서 그녀를 만났다. 식권판매기 앞에서 쩔쩔매고 있다. 그녀의 신용카드가 잘 읽히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미리 사둔 식권 한 장을 더 꺼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가끔 ic칩을 잘 못 읽더라고요. 여기 도서관은 건물만 낡은 게 아니에요."
그녀는 어리둥절해했다. 난처한 것일까?
"아... 그럼 제가 죄송해서요..."
"내일 식권 구매하셔서 식권으로 갚으시면 되잖아요. 2층 자료실 데스크로 오시면 됩니다."
"아~~ 사서 선생님!!"
그녀는 이제야 나를 알아본 모양이다.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이렇게 잘생긴 나를 기억도 못하다니.
"네.. 그럴게요. 내일 꼭 식권으로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멀찍이 앉아서 밥을 먹는다. 밥 먹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나는 절반도 먹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선다.
퇴식구에서 식판을 반납하며 잘 먹었다고 주방 이모님들과 밝게 인사한다.
그녀는 어쩌면 따뜻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책과 자료를 정리하고 자리에 돌아왔다.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음료수 하나가 내 자리에 있다. 어? 식권도 있네.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그녀였다.
의자를 뒤로 빼서 슬쩍 건너다보았다. 익숙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뭔가 신나고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