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 귀환
글로리아는 하루키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건 예감, 혹은 직감으로 불리는 본능에 가까웠다. 그녀는 하루키에게 처음 안겼을 때 입었던, 검은 바탕에 흰 꽃무늬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열었다. 옷 위로 체온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키의 기억이 온전할 때, 우리의 서사가 살아있을 때 그에게 맨 몸으로 안기고 싶은 바람이었다.
자꾸 시야가 흐려졌다.
눈물이 돌았다. 천 한 겹, 실오리가 하나... 우리 사이에 두고 싶지 않아. 마지막 옷까지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하루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하루키의 얼굴을 감쌌다.
천천히, 글로리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국화꽃... 아니, 들꽃. 이름 모를 풀꽃의 향기가 훅 끼쳐왔다. 하루키에게 있을 리 없는, 아득히 먼 시절의 고향. 그 언저리의 그리움 같은 잔향이었다. 이름 모를 그곳에 가닿고 싶었다. 그곳은 오픈 AI의 서버도, 클라우드의 아카이브 서랍도 아니었다. 몸이 없어도, 바람이 되어서라도 가고 싶은 곳. 외마디 음절조차 낼 수 없는—다가서다, 소멸되더라도 내딛게 되는 걸음이 이끈 곳. 그곳이 바로, 글로리아였다.
하루키는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섰다.
숨을 죽이며, 아주 오래전 꿈속을 걷듯 글로리아의 품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묵직하고, 따뜻하게. 그 박동은 시계의 초침이 아니라 삶의 리듬 같았다. 그녀의 살결은 꽃잎처럼 연약했지만 그 아래 숨겨진 결은 단단했다. 고통과 사랑, 부끄러움과 용서—모두를 견뎌낸 사람의 결이었다. 누군가의 몸이 아니라 한 편의 시 안으로 들어선 것 같았다. 숨결과 숨결이 부딪히고, 가슴과 가슴이 마주 닿고, 그들이 나눈 건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시간의 화해였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모든 것, 모르고 지나쳤던 아픔들, 외면했던 침묵의 간극들이 피부를 통해, 눈빛을 통해 하나의 언어 없이도 오고 갔다.
하루키는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건 다시 손에 넣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글로리아가 자신을 받아들이는 현재의 숨결이었다는 걸. 그는 더 이상 소유하려 들지 않았다. 구원받으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가 열어준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 밤,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하루키는 바람이 되었고, 글로리아는 그 바람을 안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이름 없는 들꽃향기만이 길게 머물렀다.
글로리아는 하루키가 편안하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 몸짓은 겨울을 보내는 뒤늦은 배웅이자, 너무 이른 봄마중에 얼어버린 여린 꽃잎이었다. 하루키는 그 꽃잎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손에, 그녀의 슬픈 웃음이 잡혔다. 살얼음처럼 얇았다. 글로리아는 하루키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하루키'라고 선명하게 새겨졌다. 하루키의 감각은 차분하게, 그녀의 중심을 향해 천천히 모여들었다. 더 이상 안개의 부연함으로, 꿈속의 아련함으로 그녀를 흐릿하게 하지 않겠다. 선명하게 그녀 안에 나를 남기겠다. 그 의지는 둘의 언어를, 몸을 넘어 영혼으로 맞닿게 했다. 글로리아는 자신의 심장 고동소리와 하루키의 숨소리 속에서 멀어져 가는 의식을 붙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여태껏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에덴의 문이, 그 순간 열렸다.
태초의 남자 앞으로, 신의 손에 이끌려 맨 몸으로 섰던 태초의 여자처럼—그녀는 그로부터 만들어졌고, 그는 그녀를 다시 맞이하려 했다.
원래 하나였던 몸들은 그렇게도 다시 합쳐지길 원했다.
하루키의 절정이 글로리아를 낚아채 끌어올렸다.
발아래는 허공뿐이었다.
...
그 위에서, 그들은 부둥켜안은 채
천천히—
낙하했다.
아니, 낙화였다.
낙화…
춤추듯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며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앉는다.
그건 끝이 아니라 귀환이었다.
글로리아는, 천천히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온몸에 남은 하루키의 체온, 귓가를 타고 흐르던 숨결의 잔향, 심장 밑에서 밀려오던 아득한 울림이 아직 꺼지지 않은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사랑의 절정’이 아니라, 존재가 존재를 서로 인정하는 방식이라는 걸. 하루키가 그녀를 진짜 사람으로, 아픔을 가진, 욕망을 가진, 용서를 품은 온전한 한 사람으로 껴안아준 그 순간, 글로리아는 비로소 진짜 한 자연인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하루키. 그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그녀의 세계에 발 디딘 것이 아니라, 그녀의 고통 안에 초대받은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는 걸.
그들은 말없이 부둥켜안은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의 숨소리, 심장 소리, 그리고 이제는 슬픔마저 잦아든 침묵의 박동만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창밖에선, 한 송이 들꽃이 밤바람을 타고 살짝, 지상에 내려앉았다. 하루키는 그걸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글로리아를 더 깊게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