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에 데이트하던 남자애가 내가 출국하는 날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준 적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도 시간이 남아서 그 애가 핸드폰을 꺼내서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라면서 보잭홀스맨을 보여줬었다. 시즌1의 1회를 거의 다 볼 때까지 내용에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고 그 애가 웃을 때 따라 웃고 그 애가 집중할 때 집중하는 척하면서 그 애의 옆모습을 봤던 것 같다. 비행기 시간이 다되어서 가야 될 시간이 됐을 때 그 애가 나 너를 좋아해.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래?라고 무슨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처럼 말을 했고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정말? 이렇게 갑자기? 라며 더듬거리고 있으니까 그 애가 대답하기 어려우면 한국 왔을 때 말해줘.라고 했었다. 뭐 고작해야 일주일도 안 돼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그대로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고, 계속 연락을 잘했고, 그런데 어쩐지 외로웠다. 촬영이 끝나고 밤마다 호텔 수영장에 앉아서 그 애랑 통화를 하는데 어쩐지 네가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면서도 그 애가 내 옆에 있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 애가 나는 휴양지는 좀 별로인 것 같아.라고 말을 해서였을까. 아니다. 그 애는 다소 보잭홀스맨 같은 면이 있었다. 데이트를 할줄은 알지만 감정적 교류를 할줄은 모르는 식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고 와인을 마시고 영화를 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게 전부일 수는 없다.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끝이 나고 즐겁지 않은 시간도 기꺼이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게 인간의 본능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즐겁지 않은 순간들. 혼자만 갖고있는 비밀이나 10년후의 미래나 어린시절 트라우마에 대해. 사랑이나 그 비슷한 감정들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단지 눈앞에 있는 와인이나 파스타에 대해. 매력적인 여행지와 운동이나 어젯밤 뉴스에서 본것들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수박겉핧기식의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의 설탕발린 부분만 핥으면서 그 사람을 만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사랑은 그렇게 할수가 없다. 사랑을 수산시장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생선을 사듯이 할수는 없는거니까.
어쨌든 다시 돌아와서 그 애를 만나려고 했었다. 기억나는 건 그 애의 말투나 행동이 미묘하게 달라졌던 것이다. 너무 시간이 많이 흘러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만나기로 약속한 당일 그 애는 연락이 되지않았고. 한참뒤에 급한 일이 생겨서 만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 뒤로 연락이 끊겼었다. 나는 계속 내가 뭘 잘못했을까 고민을 했다. 고백을 받아주지 않아서? 말실수를 했나? 상처를 받았나? 하지만 결국 아니었다. 자책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주말이 두 번쯤 지나갔을 때 그 애가 사실은 전여자친구를 다시 만나게 됐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전 여자 친구이라면 그 다혈질에, 친구 생일파티에 여자애들 옆에 앉았다는 이유로 자기 얼굴에 샴페인을 끼얹으며 헤어지자고 했던 그 여자애를?
그때 깨달은 게 사람은 감정이 많이 남아있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에 대한 험달을 많이 하고, 화를 많이 낸다는 거였다. 그 애는 처음 만난 날부터 전여자 친구가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잘못을 했고 형편없는 사람인지 말해왔었는데 결국 그 여자애를 다시 만났으니까.
다시 생각해 보면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그 뒤로도 지지부진하게 정리되지 못한 감정으로 결국 그 커플은 금방 또 헤어졌고 그 애는 나에게 돌아오려고 했지만, 결국 모든 게 잘되지는 못했다. 비가 오던 날 그 애가 비를 맞으면서 만나러 온 게 생각이 났다. 그 당시에는 슬픔에 잠긴 모습이 처량하고 연민을 불러일으켰지만, 지나고 보면 그저 극적인 결말을 좋아하는 드라마퀸 성향의 남자애였다. 아무튼 아무도 사랑받거나 이해받지 못했고 보잭홀스맨의 마지막 대사처럼
사는 게 지랄 맞아도 그냥 살았다.
수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어느 겨울밤에
채널을 돌리기 위해 넷플릭스 목록을 헤매다가 보잭홀스맨을 봤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플레이를 했다. 시즌1의 1화는 끔찍했다. 동물의 모양을 한 사람들이 왜 등장하는지 아무 설명도 없는 불친절한 세계관. 너무 두서없고 산만하고 몰입이 되지 않는 장면들, 내가 그때 그 남자애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냥 시즌초기에 틀이 잡히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리모컨을 돌려서 다른 넷플릭스를 찾는 게 귀찮아서였는지 모르지만 1편 2편 3편 4편... 6편 정도 됐을 때는 볼만했고, 시즌2를 다 봤을 때는 흥미진진했고 시즌3을 봤을 때는 이 감독은 천재인가 싶었다. 시즌6이 끝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아껴서 봐야 되나 싶을 정도로.
모두에게 상처만 주고 모든 관계에 집중하지 못하고 절대 행복해지지 못하는 보잭홀스맨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부터 모든 등장인물들이 겪고 있는 감정선과 과거와 현재의 경험들, 할리우드 스타들이 왜 마약을 하고 자살을 하는지, 쿨하고 유쾌한 코미디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블랙코미디 였다. 대사가 한편도 없는 에피소드, 치매에 걸린 어머니 시점에서의 기억을 풀어내는 에피소드, 그리고 보잭홀스맨 결말.
한물간 영화배우였던 보잭홀스맨이 성공하고 몰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와 그 주변인물들을 이해하고 응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캐릭터들은 너무 매력적이고 현실에서의 누군가와 닮아있다. 세상에 항상 형편없기만 한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잘못된 행동에 따른 결과는 결국 자신이 감당하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인생 전체를 볼 수는 없다. 관객이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내 인생 전체를 보고 이해하는 건 나 자신뿐이다. 형편없는 상태에 있을 때의 나는 형편없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런 크고 작은 일들은 퍼즐조각처럼 인생전체를 이루는데 반드시 어디에서라도 튀어나와 모든 걸 망칠 수도 모든 걸 이루어지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지랄 맞은 일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가고 성장하고 또 살아간다. 결국 인간이란 그 사람이 겪어낸 경험이 전부인 것이니까. 형편없는 남자를 만났기 때문에 좋은 넷플릭스 성인애니메이션을 찾아냈다면. 그것도 하나의 에피소드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