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평소 한국이란 사회에서 조금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육체는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늘 어딘가 이국적인 장소를 향해 있었다.
유년 시절을 호주에서 보냈기 때문일까. 낯선 언어, 낯선 공기, 낯선 시선 속에 있을 때, 난 오히려 나다웠다. 그래서일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윽고 슬픈 외국어』를 읽었을 때, 그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나와 같은 마음의 구조를 가진 친구처럼 느껴졌다.
이 책은 하루키가 『태엽 감는 새 1~4』의 집필을 위해 머물렀던 미국 생활 4년 반의 체험과 자신의 내면 이야기 재밌게 담아낸 책이다. 하루키는 이 책에서 "나는 조금이라도 일본이라는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일본어적인 것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적인 것에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 그 모순과 방황은 고스란히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한국 소설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도, 나는 여전히 국내 소설을 멀리한다. 내게 독서란 감각의 사유이며, 일상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를 능동적으로 탐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연장선처럼 느껴지는 서사를 읽는 건, 마치 여행지에 도착했는데도 여전히 사무실 메일함을 확인하는 기분이다.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가 사회적 압박을 이기지 못해 호주로 떠나는 장면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나의 현실과 지나치게 닮아 있는 서사 때문에 오히려 책을 덮고 싶어진다. 소설마저도 현실이 될 때, 숨 쉴 구멍이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난 독서하는 순간만큼은 현실에서 잠시 떠나고 싶다. 적어도 문장 안에서는, 내가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
외국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능하면 한국인이 없는 곳을 찾는다. 그들을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들과 마주쳤을 때 거울처럼 반사되는 나의 무리적 속성이 불편하고 어색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지인들과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시는 순간, 나는 더 편해진다. 그 속에 섞여 무해한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 그 고요한 거리감이 내겐 어떤 해방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보다, 그의 에세이에 더 끌린다. 그의 소설은 세계를 상상하게 만들지만, 그의 에세이는 '어떻게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고 살아갈 것인가'를 말해준다. 그리고 그 거리감 속에서 나 역시 숨을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