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매
40여 년 전 겨울, 잔두리에는 방문에 발려진 창호지를 덜컹거리게 하는 추운 겨울바람이 있었다. 그 바람은 코끝이 빨갛게 될 정도로 차가웠고 아이들 손등조차 사포처럼 거칠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추위는 동네 아이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날씨가 따뜻해져 미나리 깡에 언 얼음판이 녹을까 걱정하는 아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겨울만 되면 꽝꽝 언 미나리 깡이 제 집 마당인 양 하루 종일 얼음판을 점령했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개선장군처럼 어깨에 손 썰매 하나씩을 메고 당당히 미나리 깡으로 몰려들었다. 미영이는 뾰족한 못 침이 박힌 썰매 꼬챙이를 양손에 들고 오빠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향숙이 역시 남동생과 함께 미나리 깡을 찾아왔다. 모두 하나씩 무슨 소중한 보물이나 되듯이 썰매를 메고 나타났다. 식이는 그 모습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식이에겐 썰매가 없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아들이 없었다. 식이 아버지는 썰매는 남자만 타는 것이고,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겨울이 돼도 딸들에게 썰매를 만들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식이는 조금 야속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썰매를 타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좀 속상하고 번거롭지만 빌려 타면 됐다. 단 마음껏 타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크긴 했지만 말이다.
윤하 오빠가 아주 날렵하게 생긴 외발 썰매를 들고 미나리 깡에 나타났다. 썰매 꼬챙이도 다른 아이들의 2~3배 길이쯤 되는 길쭉한 것이었다. 외발썰매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두발 썰매와는 타는 방식이 달랐다. 외발썰매는 양발을 딛고 서서 타거나 안장에 앉아서 타는데, 상대적으로 두 발 썰매보다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또 방향 전환이 자유로웠다. 하지만 숙달되지 않으면 중심 잡기가 어려워 기술을 요하기도 했다. 외발썰매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썰매를 자유자재로 잘 타는 오빠들이 주로 탔다. 오빠는 긴 썰매 꼬챙이를 양손에 잡고 타기도 하고 꼬챙이를 다리 사이에 넣고 얼음을 찍어가면서 새처럼 빠르게 날갯짓하듯 타기도 했다. 그때 오빠의 모습은 김연아 선수가 스파이럴 하는 모습처럼 아름다웠다.
썰매 타기가 시들해질 즈음이면 각자 주머니에 넣어온 팽이를 꺼내 얼음판에서 팽이치기를 했다. 깨진 얼음조각이 축구공이 될 때도 있었다. 매끌매끌한 얼음조각은 얼음판에서 잘 도 굴러다녔다. 비단 얼음조각만 구르고 미끄러지는 것은 아니다. 얼음 축구를 하던 아이들도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쑤였다. 넘어져도 즐겁고 미끄러져도 신나는 겨울 놀이였다. 하루 종일 아이들이 미나리 깡을 못살게 구니 꽝꽝 얼었던 얼음이 얄팍해지기도 했다. 아이들이 많이 타고 지나간 자리는 얼음이 녹아 물이 생기고 쑥 꺼지기도 했다. 그래도 썰매 타기를 포기하지 못한 아이들은 살짝 꺼진 얼음판에서 메기를 잡기도 했다.
이런 겨울놀이는 겨울다운 추위가 있어 가능했다. 엄동설한의 추위였지만 겨울만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었다. 요즘처럼 이상 기온에는 감히 꿈조차 꾸지 못할 일이다. 눈썰매장은 인공 눈으로 대체하고 얼음썰매장은 인공으로 얼려야 가능하다. 그나마 올해는 코로나로 집안에서 꼼짝을 하지 못한다. 춥다고 하는 날씨도 얼음이 얼 정도의 추위가 아니다. 지구의 이상 기온은 겨울을 겨울답지 못하게 했다. 누가 아이들의 겨울 추억을 빼앗아갔을까. 겨울철 꽁꽁 언 한강물을 잘라 여름에 사용할 얼음을 보관했다던 동빙고와 서빙고의 유래를 이야기하면 믿을 수 있을까. 처마 밑 고드름을 따 칼싸움을 하던 놀이는 아스라한 추억이 되었다.
자연이 내어준 노천 얼음판은 환경을 오염시킨 대가로 돈 내고 들어가는 실내 스케이트장이 대신하고 있다. 이상 기온은 꽃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겨울에 봄꽃이 피어 제철을 잃고 헤매고 있다. 잔두리의 겨울은 아이들 볼을 얼게 하고 손등이 갈라터지게 했다. 귓불은 뜨거운 불이 붙은 냥 빨갛게 얼었고, 손발이 시려 호호거리고 동동거렸다. 학교를 오가던 신작로의 추운 겨울바람은 눈물을 그렁거리게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겨울이 싫지 않았고, 그 겨울에 얼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만물이 꽁꽁 어는 추운 겨울이면 잔두리의 미나리 깡은 하루 종일 시끌벅적했다. 동네 어른들도 아이들이 시끄럽다고 야단치지 않았다. 어쩌다 미나리 깡 옆을 지나가면 “이놈들 너무 심하게 타지 마라. 밤에 이불에 오줌 쌀라.” 하면서 허허 웃으셨다. 잔두리에는 차가운 겨울을 즐기는 아이들과 겨울이 있었다.
1. 잔두리: 지명
2. 메기(를) 잡다
「1」 예상이나 기대와는 다르게 허탕을 치다.
· 참 재수도 없지. 우리는 늘 메기만 잡는다니까.
「2」 메기를 잡노라면 옷이 젖고 진흙투성이가 된다는 점에서, 물에 빠지거나 비를 맞아 흠뻑 젖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어디서 메기를 잡았느냐? 옷이 그 지경이 되어 돌아오게. (출처: 표준국어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