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루리 글·그림, 비룡소, 2020)
루리 작가의 첫 그림책으로 2020년 제26회 황금도깨비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짐작했겠지만 이 그림책은 <브레멘 음악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한 작품입니다.
작가는 이미 제목에서 '그들이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라고 전제를 하고 시작합니다.
그들이 브레멘에 가지 못한 이유는 뭘까요?
택시 운전사였던 당나귀 씨는 어느 날,
“당나귀 씨는 이제 운전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요.”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바둑이 씨는 일하던 음식점이 이사를 하게 되면서 일자리를 잃는데요.
편의점에서 일하던 야옹이 씨는
“그런 얼굴로 손님들 다 쫓아 버리려면 당장 그만둬!”라는 말을 듣고 쫓겨납니다.
꼬꼬댁 씨는 길에서 두부를 팔다 단속에 걸려 팔지 못하게 됩니다.
동물들을 내쫓는 기득권자들의 표정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당당하지 못한 걸까요.
일방적인 해고 통보에도 동물들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위축된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이 모든 장면이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해 속상하기도 합니다.
일자리를 잃은 당나귀, 바둑이, 야옹이, 꼬꼬댁 씨는 우연히 같은 전철을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데요.
분할 구성으로 된 이 장면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서로 다른 역에서 각자 타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지요.
사람들의 무표정한 모습에서 삶의 묵직함이 느껴지는 건 왜인지요.
이 장면에서 박민규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현대인의 무거운 삶, 씁쓸함의 농도가 닮아있는 듯합니다.
구일과 구로를 지나 신도림으로 이어지는 선로의 어둠 속에서, 나는 늘 흔들리며 생각했다. 조금씩, 열차는 흔들렸고, 조금씩, 마음도 흔들렸다.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중에서
전철에서 내린 당나귀, 바둑이, 야옹이, 꼬꼬댁 씨는 전철에서 내려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데요.
목적지가 따로 있는 걸까요.
아니면 그냥 하염없이 걷다 보니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요.
이들은 계단을 오르고 밤이 되도록 걷습니다.
말없이 걷던 이들이 멈춘 곳은 ‘꿈고개로 61번지’ 팻말이 붙은 집이었습니다.
그 집은 도둑들이 사는 집이었지요.
넷은 창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제는 못된 짓도 쉽지가 않아.
이제 뭐 하고 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열심히 살걸 그랬네.
- 본문에서
그러니까,
당신들은
열심히 살았는데도
할 일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열심히 살아도 소용없네.
- 본문에서
열심히 살았는데도 일자리를 잃은 동물들.
열심히 살지 않아 현재가 막막해진 도둑들.
이는 열심히 살고 살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까요.
여섯 컷으로 분할된 장면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동물들과 도둑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현대인들의 현실이 오버랩되는데요.
사회의 약자, 소시민들이 아무리 발버둥 치며 열심히 살아도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일수도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선한 권력, 제대로 된 사회 시스템 등이 작동되어야겠지요.
도둑들과 당나귀, 바둑이, 고양이, 꼬꼬댁 씨는 열심히 살아도 할 일이 없어진 것에 한탄을 합니다.
이때 누군가의 ‘꼬르륵’ 소리를 듣고 밥을 먹기로 합니다.
각자 가지고 있던 두부, 김치, 참치 캔 등을 모아 김치찌개를 끓이는데요.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본문에서
모두 함께 하는 ‘오늘도 멋찌개’라는 식당을 상상합니다.
오늘도 멋찌개
그림책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는 듯하지만 뒷면지가 한몫합니다.
이 그림책은 면지를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앞면지와 뒷면지 모두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꼭 그림책을 펼쳐보기를요.
이 그림책을 보면서 허수경의 시 한 편이 떠올랐어요.
시로 말하는 '브레멘'은 어떤지 만나볼까요.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 허수경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죽음을 당하기 전에
브레멘으로 가면 뭐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곳에 가면 음악대에 들어갈 수는 있다고
늙은 나귀가 말했지
브레멘이라고 들어봤어?
그곳은 어디에 있나?
그곳이 있기는 하나?
더 이상 죽음 없이 견딜 수 있는 흰 시간은 오지 못할걸
이 세계에서 빛이 가장 많은 곳에
가장 차가운 햇빛은 떨어지고
죽음보다 조금은 나은 일들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네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이 세계에는 없는 곳으로 가는 거야
나귀와 개, 고양이와 수탉이 되어
주야장천 붉은 음악에 몸을 흔들면서
없는 곳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다가
도둑의 집 그 심장 속에서
음악을 허겁지겁 집어 먹으며
물어보는 거야
아니, 브레멘이라는 곳은 도대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허수경, 문학과지성사)
Q. 이 그림책의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을까요?
당신의 브레멘은 어디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