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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만 Oct 20. 2024

손안에 든 칼자루

#5  


그렇게 다시 돌아온 서울첫날이다.




2020년 2월 27일

경기도 양평


상담시간이 다 되어 도착한 곳은 꽤나 널찍했지만 다행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을 따라 영혼 없이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고 있을 때 키가 아담하고 통통한 여자 직원분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오셨다.

"이지유씨?"

예약을 확인하려고 이름을 묻는 직원분에게 나는 말 대신 몸을 돌려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건네주는 서류를 체크하고 나자 직원분은 눈가가 주름지게 웃으며 왼손을 앞으로 뻗어 보였다. 내 입은 살짝 열렸다 닫히는데도 아무 소리가 나질 않는다. 또각거리는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회색빛 노출 콘크리트 복도엔 그다지 밝지 않은 전등이 매달려있었다.


"하아"

노트북을 자신의 무릎 위에 얹은 채로  스토리를 받아 적던 상담사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굴곡진 인생사와 뼈아픈 상처에 관한 이야기는 이골이 날 만큼 많은 들은 상담사겠지만, 내담자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참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숨은 제대로 쉬어지세요?"

상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심장이 조여와서.. 자다가 깨길 반복해요."

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종잇장 같은 얼굴로 눈만 깜빡이며 대답했다.


상담 뒤로 보이는 차분한 베이지색의 페인트 벽과 앙상한 나뭇가지가 보이는 작은 창 앞에 놓인 은색 십자가 조각상,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무 선반 위의 오래된 책들은 내가 처음 내담자가 되어 깊은 상처를 털어놓기에 적당한 온도를 건네고 있었다.


"힘든 와중에 여기까지 나와줘서 고마워요. 시어머니께서 상담 요청하셨는데 알고 계세요?"

"네"

"오늘 남편분은 오후에 상담이 예약되어 있어요. 혹시 개인상담이 여러 차례 진행된 뒤에 남편분과도 같이 상담받을 의향이 있으신가요?"

뒤이어 나올 대답을 기다리는 방 안에는 얄궂은 바람소리만 휘잉거렸다.


상담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편은 절대 이혼을 안 한다고 저렇게 버티니 혼자 상대하기는 힘들 거예요.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고 해도 잘못 살아온 시간이 적지 않기 때문에 바로 잡으려면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부부상담을 받게 되면 상담마다 사이에 쌓여있는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과 각자가 느끼는 상처에 대해 탐색해 나갈 거예요.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지유씨가 남편으로 인해 받은 상처로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남편분도 제대로 알아야 되고요."

나는 싸늘하게 아래로 깔고 있던 눈을 들어 상담사를 똑바로 응시했다.


"만약 중간에 더 이상 상담을 받고 싶지 않다고 의사를 표해주시면 지유씨 뜻을 존중해 중단할 겁니다. 최종적인 선택은 지유씨의 몫이니까요. 저를 믿고 한번 부부상담받아보시겠어요?"

나의 눈을 응시한 채 호소하는 상담사의 진심 어린 조언에 무감각했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이혼할 때 하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게..'

눈동자가 흔들리며 고민하던 나는 가벼운 고갯짓을 하고 말았다.

 



"안방은 내가 쓸 테니까 당신은 저기 현관문 앞에 제일 작은 방을 써."

다시 만난 남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멀찍이 거리를 두고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존심과 고집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남편인데 큰 소리로 반항 한번 없이 베개를 챙겨 들고는 맥없이 걸어 나간다.

'고분고분 간다고?'

그의 행동에 놀란 마음을 들킬세라 뒤돌아 멈춰 서서 벌어진 입을 두 손을 모아 가렸다.


옆을 스치기도 싫은 사람을 안방과 가장 먼 곳으로 유배 보내고 나니 속이 뻥 리며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다. 홀아비 냄새가 베인 안방의 창문을 모두 활짝 열어 환기시키고 영역의 표시로 화장품과 옷가지들을 꺼내놓는데 그만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흥얼거린다. 조금 전 집에 들어올 때와는 달리 만면에 가득히 미소가 지어졌다. 안방을 차지한 자의 여유가 이렇게 달콤한 것인가!


정리가 끝나자 문을 쾅 열어젖혔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여전사처럼 양손을 허리춤에 둔 채 의기양양하게 안방 문 앞에 서서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이거 왠지 재미있어지는 걸?'


나는 오랜만에 온몸에 엔도르핀이 도는 것을 느끼며 버려진 시간만큼 엉망진창이 된 거실을 무엇부터 치울지 빠르게 스캔한 후 바닥에 내팽개쳐진 옷가지들부터 손에 쥐기 시작했다.


'손안에 칼자루가 쥐어졌다는 게 이런 거군!'

나는 눈빛을 반짝이며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에 돼지우리가 되어버린 이곳을 아늑한 거실로 변신시킬 요량으로 부지런히 집안을 쓸고 닦았다.


출처: 유튜브 민지영 TV- 러시아 볼고그라드 《승리의 여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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