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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만 Oct 19. 2024

돌이킬 수 없는 상처

#4

"신랑은 신부를 아내로 맞아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합니까?"


컷, NG!!!

다시 갈게요.


'와,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새끼고양이가 있는 가평숙소에서 아이들은 나뭇가지를 하나씩 찾아들고 고양이와 놀기 위해 필사적으로 야옹거린다. 겨울햇살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곳에 자리 잡고 앉은 나는 치에 대어 앉았다가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쉬이 잠들지 못했던 어젯밤 나는 몇 번을 남편과 결혼하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갔는지 모른다.

12년 전 그 순간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내 인생을 말아먹을 사람인 줄도 모르고 백년가약을 맺은 그 순간을 NG컷을 잘라내듯 깜쪽같이 지워버릴 방법이 없을까?


"엄마~이거 봐봐. 고양이가 나랑 장난쳐."

아이들은 놀다가도 수시로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살핀다. 나는 아이들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 곳에 앉아서 굳어버린 입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눈으로 대답을 한다. 정신적 충격을 받아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운 지경이지만, 아파하며 마음대로 울 수 있는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 게 바로 엄마의 자리였다.


"띠링"

문자 알림이다.


00 초등학교입니다. 전국적으로 코로나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코로나는 호흡기로 옮기는 바이러스에다 전파력이 매우 빠르게 확산되고 있어 저희 학교는 2주간의 휴교를 결정했습니다. 안전에 유의하시고 3월 개학일정은 추후에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휴교라..

그렇다면 더 이상 서울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휴.. 그럼 서울로 돌아가서 정리를 해야지. 다시 부산으로 가는 걸 첫째에게 어떻게 설명하지?..'

아들을 이해시켜야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얘들아, 고기랑 소시지 사 왔어."

그때 마트에 갔던 남편이 돌아왔다. 고기 굽는 건 다른 사람에게 양보 못하는 남편이 저녁으로 바비큐를 할 모양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쏟는 열정은 최고인 사람이라 날씨가 영하인데도 숯불바비큐를 하며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한다.

 

"아빠~지금 굽는 거야? 맛있겠다. 지금 배 엄청 고파."

오늘 이 밤이 지나고 서울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기다리고 있을 이별을 모른 채, 아빠 곁에서 쫑알대고 있는 첫째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진다. 참으래야 참을 수 없는 눈물이 마구 쏟아져내렸다.

"엄마, 왜 울어?"

 어느새 곁에 왔는지 멋모르는 둘째가 내 눈물을 보고는 휴지를 가져와 닦아준다.

"아니야. 우는 거 아니야. 밥 먹으러 가자."





주일 아침이다. 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숙소를 나오니 남편은 근처에 시골 작은 교회를 찾아놨다며 그곳으로 우릴 데려간다. 매주 교회를 가는 우리 가족이었지만 낯선 여행지에서 예배드릴 곳을 찾아주는 남편의 친절은 꽤 어색했다.


차에서 내리니 코 끝을 싸하게 하는 차갑고 신선한 흙내음이 폐 안을 가득 채운다. 옹기종기 몇 가구가 붙어사는 마을은 여기에도 코로나가 올까 싶을 만큼 작고 조용했다. 다행히 교회에 계신 분들은 외부사람에 대한 경계 없이 아이를 보며 반갑게 웃어주셨다. 나무로 만든 여러 개의 장의자 중 오른쪽 제일 뒷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출처 unsplash


예배가 시작되고 피아노가 없는 시골교회에서 녹음된 메마른 찬양반주가 낡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어쩌면 이리도 내 맘 같을까

가사를 따라 부르려고 앞쪽 스크린을 봤지만 이내 물기로 시야가 흐릿해진다.


"마음 심히 슬프니 나를 위로하소서

의지 없이 다니니 나를 위로하소서"


니스칠이 벗겨진 나무의 작은 단층교회 안으로 겨우 열명남짓 되는 예배자의 찬양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연신 눈을 위로 치켜뜨며 물기를 없애보려던 내 눈에서 결국 톡 하고 떨어진 눈물 바싹 말라버린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를 누가 눈치라도 챌까 봐 일부러 몸을 숙여 신발을 고쳐 신는 시늉을 해대며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닦다. 빨리 곡이 끝나면 좋으련만 4절까지 계속된 찬양 12년 동안 꾹꾹 눌러만 놨던 감정의 깊이만큼 길고 길게 이어졌다.




서울로 돌아오자 몸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부산까지 아이들과 짐을 끌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자신이 없어 시부모님께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아빠, 아빠는?"

같이 가는 게 아니냐고 묻는 첫째에게 남편은 일 때문에 가지 못한다고 말다.

"너희도 개학하면 와야지. 그때까지 재미있게 놀다 와."

놀다가 다시 오라는 말에 안심이 되는지 첫째는 그제야 차에 올라탄다.

남편은 트렁크에 짐을 싣고 아이들을 앉힌 채 벨트를 채웠다. 별스럽게 벨트를 꼼꼼히도 확인하 채워주는 모습을 나는 뒷자리에 앉아 멀건 눈으로 보다 고개를 휙 돌렸다. 시동이 걸리고 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안녕, 서울.

다시 올 일 없을 아파트.

정말 안녕.'


작아지는 아빠의 모습에 끝까지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보며 힘없이 두 눈을 감았다.

"얘들아, 엄마는 좀 잘게."

간신히 말을 하고 우는 것을 들킬세라 겉옷으로 얼굴을 덮었다. 마치 내 인생이 다신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나락에 빠진 기분이었다.



불청객처럼 내게 찾아온 코로나 덕분에

아연실색한 채로 떠나게 된 도피여행은 학교의 휴교 결정으로 일단락되다.


이젠 끝이라는 마음으로 부산에 내려지만 따로 살 집 보증금 생활비도 마련할 수 없는 냉정한 현실 앞에서, 또 아빠를 계속 찾아대는 아이 앞에서 내 굳은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책 없이 시간은 흘러갔고 아이의 개학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나는 남편의 배신이 던진 증오의 올가미에 걸려 시름시름 앓느라 나만의 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찾아오셨다.

"이러다 큰일 난다. 얘야, 제발 부탁이니 서울 가서 상담 한 번만 받아보렴. 일단 집에 가서 애들 학교도 보내면서.. 잠시 상담받을 동안만이라도 거기서 지내고 결정을 해보는 게 어떻겠니?"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래, 나가야 되면 그놈이 나가야지 왜 내가 나가? 가서 내가 그 집을 차지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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