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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만 Oct 21. 2024

배신이 낳은 의심

#6




2020.3월


탁하고 계란을 깨뜨려 프라이팬에서 구운 뒤 간장과 참기름을 두른 밥 위에 반숙된 계란을 얹는다. 잠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 밥을 먹이고 물병을 챙겼다.

"다녀오겠습니다. 엄마 알러뷰"

현관문을 나서며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는 첫째는 아들이지만 살갑고 사랑스럽다.

"둘째야, 우리도 유치원 버스 타러 가야 해. 얼른 옷 입고 가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둘째를 재촉해 신발을 신기는데 현관문 바로 맞은편 작은방에서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일어났나 보네.'

출근이 늦은 남편 호성의 기척에 느슨해졌던 내 신경이 벌떡 깨어나며 현기증이 났다.



아이를 보내고 들어오자마자 바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아들 둘이 사용하는 덕에 자칫 찌른내가 날 수 있는 화장실을 말끔히 씻어버리는 게 애들 등교 후 내 첫 일과다. 조용해진 거실을 걸으며 아이들이 벗어놓고 간 잠옷을 집어 들어 빨래를 돌려놓고 개수대 앞에 서서 몇 개 안 되는 그릇을 후딱 씻었다. 이제 바닥 좀 쓸어볼까? 청소기를 끌고 이 방 저 방 쓸고 다니는데 난데없이 가슴에서 이 말이 솟구친다.


'나.. 행복해. 뭐지? 지금 이 기분은?'

이상하게 말랑한 마시멜로우 같은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정말 그랬다. 이 단순한 일상을 누려보는 게 얼마만인지 가슴 가득 온기가 퍼졌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가정을 꾸리는 노동이 이렇게 감사한 일이었나?'

예전엔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천대받던 집안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름다운 꽃으로 변모해 나에게 온전한 기쁨을 안겨주고 있지 않은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금자리 맞이한 '아주 보통의 아침일상'이 건네는 안도감은 마치 괜찮아라고 위로하 것 같았다.


"쿵쿵 쿵쿵"

그때 작은 방 문이 열리고 복도를 걸어오는 남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와장창 하고 한 순간에 마음의 평화가 박살 났다.

'아뿔싸,  인간이 아직 집에 있었지. 면상과 부딪히고 싶지 않은데..'

거실로 나오는 그를 피해 안방으로 청소기를 끌고 들어갔다. 좀 전의 감사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얼굴빛이 잿빛으로 변했다.

'제발 빨리 나가라.'

청소기를 돌리며 혼잣말로 웅얼거렸다.




이렇게 한 달쯤 살았을 때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남편은 매주 상담의 미션을 잘 이행하며 가정 안에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제 다음 주면 처음 부부상담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퇴근시간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는 나의 불안증세와 요동치는 심장박동이었다.


그는 결혼생활 내내 퇴근 후 매일같이 술을 먹고 늦게 귀가했고 언젠가부터는 당연하다는 듯 내게 아무런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갈등의 원인 중  하나였던 이 문제는 여전히 고질병으로 남아 뿌리를 썩게 하고 의심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어제 어디 갔다 왔냐고."

아침부터 눈이 뒤집힌 나는 애들이 보는 앞에서 성난 황소처럼 그에게 돌격했다.

그의 지갑 위에는 00 초밥이라는 명함이 놓여있었다.

"당신 저기 간 거지? 누구랑 갔어? 누구랑 갔냐고!!"

눈이 커지다 못해 앞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상간녀의 SNS사진에 올라왔던 00 초밥이 스쳐 지나갔다.

'세상에, 아직도 나 모르게 만나고 있는 거야?'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심이 나를 감정의 소용돌이로 빠뜨렸다.

남편이라는 작자는 발작버튼이 눌러진 날뛰는 나를 보며 그저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제저녁에 대학동창 만나러 간다고 연락해 줬잖아. 미리 연락 안 한다 그래서 연락해 줬는데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거야?"

"흥,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나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쏘아붙였다.

"다시 잘해보겠다면서? 다시 잘한다는 게 이런 거야? 그러니까 봐봐 당신은 안 변해. 절대 안 변한다고!"

한 달간 자신의 노력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자 눈빛이 변한 그가 거칠게 내 팔을 잡았다.

"못 알아듣게 말하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

그는 표정이 굳은 채로 말했다.

"몰라서 물어? 부부상담이니 뭐니 다 됐고 그냥 헤어지자. 내가 또 당신 손 안에서 놀아날 줄 알았니?"

나는 원망이 가득 찬 눈으로 점점 언성을 높였고 분위기가 격앙되자 방으로 숨었던 첫째가 뛰쳐나왔다.

"엄마, 왜 그래? 엄마는 안 그랬는데 왜 엄마도 아빠처럼 큰 소리 지르는 거야?

엄마 싸우지 마. 제발."

아이는 내 옆에 서서 두 손을 빌어댔다. 아이가 좋아하는 아빠랑 같이 있게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결국 더 끔찍한 지옥을 맛보게 하고 있다. 불안해하는 아이를 보고도 분노로 차 오른 내 속의 불길한 에너지는 식을 줄을 몰랐다. 이 집에 다시 들어온 나 자신이 후회가 되면서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말하라고!"

참고 있던 인내심이 바닥난 그가 울고 있는 내게 버럭 큰 소리를 내질렀다.

"그년 다시 만난 거잖아. 당신 지갑 위에 있는 00 초밥. 내가 그년 SNS에 00 초밥 올라온 거 다 봤다고!"

"뭐? 하아.."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입을 떡 벌리고 날 쳐다보더니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너 아직도 그 SNS 뒤져보는 거야? 내가 다 끝났다고 했잖아. 언제까지 못 믿고 SNS뒤지고 있을래?

그래서 날 의심한 거야? 전화해 봐 지금 당장! 어제 만난 진환이한테 전화해 보라고!"

자신의 끌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그는 식탁 위에 책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아빠 안돼!"

연달아 컵을 집어드는 그를 향해 첫째가 달려들어 아빠를 끌어안았다.

나는 팔로 머리를 감싸 쥐고 울면서 벽에 기댔다.

"아악!!"

배신으로 인해 깨어진 신뢰사이에서 갈등하는 내면의 괴로움이 비명이 되어 내질러졌다. 나는 벽에 기댄 채 반복해서 머리를 저었다.

'다 틀렸어.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순간 자신이 없어졌다. 나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을지, 그가 노력하고 있어도 내가 그것만 바라보고 응원해 줄 수 있을지, 과거의 잘못을 더 이상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지, 이런 모습으로 온 가족이 함께하는 것이 정말 맞는지 모든 게 미지수였다. 나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넋을 놓았다.


"생각이.. 흑흑.. 자꾸 그쪽으로만.. "

나는 흐느끼며 말했다.

"자꾸 그렇게만.. 생각이 되고.."

울음 때문에 말을 이을 수 없다.

"끊으려고 해도.. 안돼. 미칠 것 같아."

이미 지난 상담에서도 그를 향한 의심이 끊이질 않는 이 문제로 괴로워하던 나였기에 울음은 통곡이 되었다.

"당신이 퇴근할 때만 되면, 어둠이 내려앉기만 하면 훅하고 혹시나 하는 생각이 치고 들어오는데 어해. 나도 너무 괴로워 미칠 것 같다고."

사정없이 악을 쓰며 속을 다 내보이듯 말하고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어쩌지 못한다.


어디론가 도망가 숨고 싶었다.

말 이 길의 끝이 있긴 한 걸까?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터널을 무엇에 의지해 빠져나갈 있을까?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내가 그리 잘못했을까?


아빠를 부둥켜안은 첫째는 평소 흐트러지지 않던 엄마의 와르르 무너모습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울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와이프의 정신 나간 모습에 얼이 빠진 채 서 있던 남편이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그를 안고 있는 아이와 벽에 기대어 울고 있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아니라고. 진짜 아니라고. 제발 좀 믿어달라고."

그가 손으로 내 머리 뒤통수를 힘 있게 감싸 쥐면서 내 얼굴이 그의 가슴팍으로 꽂혔다. 간절한 듯 말하는 그의 심장은 쿵쾅거렸고 이내 어깨가 떨리며 울음소리가 났다.

"내가 잘못했어. 다 잘못했으니까 한 번만 믿어줄래?"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콧물과 눈물이 섞인 채 오열했고 아이도 그도 가장 서러운 내 울음에 보태듯 울음소리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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