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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만 Oct 22. 2024

북두칠성이 되면 좋겠어요

#7

갈등이 난무한 채 쌓여있는 이곳에 더 이상 있을 자신이 없었다.

아이와 나를 안고 있던 손을 놓은 남편이 다급히 걸어가더니 서랍장 위의 차 키를 집어 든다. 

"나가자. 짐 싸서 어디라도 가자"

그도 답답한 모양이다. 앞뒤 생각할 여유가 없는 나는 간단하게 잠옷과 갈아입을 옷 한 벌, 세면도구를 챙겨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코로나를 피해 도피여행을 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코로나가 무서워 어쩌지 못하고 따라갔다면 이번에는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대한 회피이자 아픔의 치유를 찾아 떠나는 도피여행이다. 상처를 준 자와 그 상처로 아파하는 자가 온전히 낫지 않은 상태로 같은 공간에 있는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모른다. 이 길을 뚫고 지나가야 새 날이 펼쳐지겠지만 잠시 다른 공간에서의 쉼이 필요할 만큼 상처는 아직 날 것이고 그 범위는 무한대로 깊다.


차를 몰아 가까운 가평으로 향했다. 다같이 차에 올라타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더구나 그의 옆자리에 앉려니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없다. 첫째에게 조수석에 앉으라고 할 참이었는데 벌써 뒷자리를 차지하고는 빨리 타라고 성화를 부린다.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겨우 집어넣고 앉아 최대한 창가 쪽에 몸을 붙였다. 차가 속도를 내자 창문밖으로 시시각각 달라지는 장면이 연출된다.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면서 한편으론 속이 후련해졌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을 달리니 우리가 정한 목적지에 도착했다.


숙소 로비는 리모델링되었지만 룸은 오래된 연식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돈을 내고 이런 곳에서 자야 되나 불평이 나올 수도 있지만, 상처와 아픔이 곪아터진 곳에서 탈출했다는 것만으로 환기가 되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을 진짜 다시 믿어도 될까? 혼자 새 출발하는 것이 더 나은 것 아닐까?

내가 이렇게 아픈데.. 내 고통은 누가 책임져주나? 이 아픔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고민들을 잠시 내려놓고 오늘만큼은 봄내음 가득한 자연에서 얼굴을 들어 하늘에 푹 담가 마음껏 숨 쉬고 싶다. 초록잔디 위에 노란색 체크돗자리를 펴고 누워 책을 보다가 살짝 낮잠이라도 들면 정말 꿀맛일 거 같다.


룸은 좀 아쉽지만,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놀 수 있는 놀이터와 산책길은 마음에 쏙 들었다. 나무로 만든 의자에 칠해진 원색의 페인트, 가로로 누운 소나무 위에 놓인 아기자기한 새집들, 나무 위의 오두막 그리고 오두막과 연결된 하늘다리는 아이들이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땅굴로 기어들어가게 하는 회색빛 콘크리트에서 파릇파릇한 생명이 가득한 자연으로 나오자 내 목에 메인 증오의 밧줄이 풀리고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놀이터에서 나와 계곡으로 가는 산책을 따라 걸었다. 나는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걷고 있는데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냅다 뛰었다. 평소 같으면 움직이지 않을 아빠가 애들 뒤꽁무니를 쫓느라 나를 제치고 빠르게 걸어갔다. 여러 개의 나무로 만들어진 흔들의자와 벤치가 산책길을 따라 놓여있었고 흔들의자에 앉은 나는 아직 차가운 계곡물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잔소리를 해댔다.


"얘들아, 감기 걸려. 그리고 옷 젖으면 안 되는데.."

"엄마, 여기 물고기 있어! 나 물고기 잡을래."

아이들은 흥분을 해서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물고기 잡을 도구를 찾는다고 야단이다. 그러자 남편이 리조트 들어오는 입구로 차를 타고 나가서 투명창이 달린 네모진 뜰채바구니를 사 왔다. 다슬기 잡는 도구라는데 아이들은 빨간 뜰채에 얼굴을 박은 채 물고기를 찾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는 언덕 위 흔들 다리에 앉아 하늘을 한번 보고 아래로 아이들을 한번 보고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배가 등에 달라붙도록 길게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기를 반복하니 나뭇잎들이 내뱉는 신선한 공기가 폐 속을 지나 오장육부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 같았다.


다시 아래를 보니 물고기를 잡겠다는 일념 하나로 딱 붙어있는 엉덩이 두 짝이 보였다. 하늘로 치솟은 엉덩이가 씰룩거리며 잠시 떨어지더니 각자 물고기만 보고 쫓는 바람에 다시 꽝하고 쓰러질 듯 위험하게 부딪혔다. 나는 그 모습에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너네 그러다 넘어진다."

웃고 있는 나 자신이 신기했다. 피투성이가 된 가슴을 부둥켜 앉고도 웃을 수 있다니. 어안이 벙벙한 채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사랑스러운 아이들 덕분이었다. 또 아빠로서 이미 실격이지만 그 자리를 구멍 내지 않고 다시 채우려는 남편이 있기에 내 마음의 무게가 어느 정도 가벼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 없이 사는 삶이야말로 최고의 불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앞으로 그렇게 살아야 하나.

'그건 아니야. 정말 끔찍해.'

나는 도리도리 머리를 저으며 아무리 아이들 때문이라도 끔찍한 사람과 평생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다시 살게 된다면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픔을 다 털어낸 뒤 용서의 관문을 지나야 하겠지. 그러니 참 상처를 이겨낸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긴 하루가 끝나고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여태껏 본 적 없던 부모의 싸움에 충격받았을 아이가 걱정되었다. 아이들 잠자리를 봐주러 방에 들어가 불을 끄고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여느 때처럼 하루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누는 도중 슬그머니 째가 묻는다.

"엄마, 나는 있잖아. 오늘 여기 방에 누워서 생각했어. 우리 가족만 이런가?

저기밖에 불 켜진 다른 집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다 행복한데 우리만 불행한가? 그런 생각을 했어."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티 내지 않고 태연하게 그랬냐고 대답하며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빠가 말할 때 엄마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응?"

제발 부탁이라는 듯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들이 보기엔 내가 입을 닫는 게 그 나름의 문제 해결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그래.."


아이가 불안해한다. 내가 분노로 이성을 잃은 탓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은 나와 여기에 불을 붙이는 남편, 부모의 기분이 어떤지 눈치를 보며 불안해하는 아이들, 그야말로 위기의 가족이다. 지울 없는 상처를 가진 채로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이 길을 가보는 게 과연 옳을까?


첫째는 그렇게 한참을 창 밖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두 손을 동그랗게 웅크렸다. 동그라미 모양을 한 두 손으로 긴 망원경을 만들고는 자신의 오른쪽 눈앞에 가져다 댔다. 깜깜한 밤하늘에서 뭔가를 찾고 싶은 건지 왼쪽 눈은 질끈 감은 채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무언가 결심했다 듯 똑 부러지게 말했다.


"엄마, 난 우리 가족이 북두칠성이 되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있게 밝게 빛나는 북두칠성말이에요."

하늘의 별에서 희망을 찾기라도 한 듯 목소리에 힘이 잔뜩 실린 아이의 눈은 달빛을 머금고 반짝이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다.

'아, 너의 간절함이 그렇게 크구나.'

아이 말을 들으며 뭉클해진 내 가슴에 별들이 새겨지는 듯하다.


위기를 맞은 부부가 다시 함께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입장이기에 언제든 갈등은 빚어지고 다툼은 '터지기만 해 봐'라는 식의 매서운 위험으로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툭 던지는 한 마디 말이 언제 불꽃의 씨앗이 될지 모를 일인 것이다. 살얼음 위를 걷듯 긴장하고 또 긴장해야 한다. 이 불편한 긴장감은 12년을 같이 살았지만 여전히 서로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였고, 함께 있는 것이 자연스럽고 즐거울 수 있도록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절실했다.


'아들아, 부족한 엄마가 더 새겨들을게. 아직도 분노와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 나오진 못했지만, 일어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게. 우리의 선택이 옳았다 말할 수 있게 지금은 엉망진창인 것 같은 이 삶을 견디며 나아가 보자. 너의 소망이 우리 가족의 소망이길!'




"우리 가족이 북두칠성이 되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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