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급은 없다
시간은 수직적이지도 않고 끊임없이 흐르지만, 우리 인생에서는 그렇지 않다. 늘 시작이 있고, 마침이 있다. 2023년 한 해도 시작점이 있고, 마침점은 며칠 남지 않았다. 한해를 뒤 돌아보며 올 해는 어떻게 살았나 머릿속에서 지워졌던 기억들을 다시 소환해 내어 잘했는지 혹은 못했는지를 기억해 본다. 매월 월계부를 쓰고 있는데 열두 달 치를 모아 연계부를 작성하는 것도 빠지지 않는 한 해를 보내는 루틴이다. 쓰다 보면 급여는 그대로인데 씀씀이만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인다. 내년엔 어떻게 살지 하는 고민만 가득 낳게 된다. 근데 올해는 이런 마감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마치 한 해의 성적표를 스스로 발급하는 것과 같았고, 나는 좋은 성적표를 내게 줄 만큼 스스로에게 너그럽지 못했다. 스스로 만든 고문에 매질을 당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이 못되고 오래된 습관은 쉽게 고쳐지질 않았다. 매년 후회와 패배감을 나에게 선물하며 그해의 마침표를 찍곤 했다. 나쁜 성적표를 받는다고 그다음 해가 더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스스로에게 도움도 안 되는 이 짓을 왜 하는 걸까 하는 자조가 내 안에 흘러넘쳤다.
고민 끝에 이 습관을 고치지 못한다면, 습관의 방식을 약간 비틀어 보기로 했다. 질문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뭘 잘했고, 뭘 못했고, 스스로 다짐하고 약속한 것을 얼마나 이루었나, 다이어트에 성공했나, 돈을 얼마나 모았나 이런 질문은 과감히 던져버렸다. 대신 “나는 2023년 한 해 동안 언제 얼마나 어떻게 왜 누구와 행복했나?”라는 질문으로 바꿔보았다. 흘러가는 일상에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어 리스트를 뽑아 보기로 했다. 사실 5가지 정도는 쉽게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3개로 줄이게 되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꽤나 긴 시간 동안 한 해의 기억을 뒤적이게 되었다. 사진첩도 뒤적여보고, 메모들도 뒤적여보고, 돈 쓴 카드 내역서도 여러 번 훑어 보았다. 행복했던 기억을 찾는 게 이리 어려운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왜 나는 이렇게 황폐하는 사는가 라는 질문이 꼬리가 달려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행복했던 기억을 쥐어짜 내어 적어보니 행복했던 순간들이 몇 가지 흘러나왔다. 지극히 개인적인 행복감이라 부끄럽지만 한번 펼쳐 놓아 본다.
1. 새벽운동을 시작했다. 이런저런 현실적인 상황으로 매일 실천하고 있지 않지만,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은 확실하다. 처음엔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90이었지만, 삶을 조금 더 밀도 있게 살려는 노력에 첫걸음이 되어 주었다. 새벽에 눈을 뜰 때, 여전히 힘들지만, 새벽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은 힐링 그 자체이다. 그때만큼 오직 나에게 집중할 수 있고 마음이 평온한 순간은 찾기 힘들다.
2. 아이들과 잠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들. 아직 수면 분리가 되지 않아 한침대에서 아이들과 같이 잠을 자고 있다. 물론 잠자리에 드는 과정이 수월하지 않다. 계속 장난치고, 주방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어떻게 든 잠자는 시간을 미뤄보려는 아이들과 매일 같은 전쟁을 치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오늘 하루 어땠는지,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나쁜 일이 있었는지 잠깐이지만 얘기를 나눌 때에는 아이의 마음이 성장하는 것을 엿볼 수 있어서 어떤 때에는 기특하기도 사랑스럽기도, 안타깝기도 하는 여러 가지 마음이 드는 시간이다. 정말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아이의 마음이 내게 활짝 열린 것이 느껴져 마음이 늘 따뜻했다. 앞으로 수면분리를 해야겠지만 이 시간은 꼭 지켜 나가고 싶다.
3. 브런치 작가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언젠가는 써야지 하며 글 쓰는 일을 미루기만 하다가 지난가을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아직 여러 면에서 부족함이 많고, 지속적으로 쓰는 일이 어렵긴 하지만, 시작했다는 점에서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글쓰기는 운동과 같아서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근육을 기르는 게 중요하답니다.” 이런 브런치 알람을 받게 되면 다시 한번 정신 차리고 글을 한 번 더 쓰게 된다. 아직 운동처럼 루틴으로 내 삶에 녹여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 삶이 이로 인해 더 단단해질 거라 믿는다. 오늘도 실을 뽑듯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 본다.
질문 하나 더, 올 한 해 가장 후회했던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 가지만 간단히 쓰기로 했다. 쓰다 보면 너무 많아 다시 성적표로 돌아갈 것 같다. 답은 고민할 것 없이 금방 머리에 떠올랐다. 남편과 아이에게 왜 나는 더 친절하지 못했을까? 왜 더 사랑을 주지 못했을까?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면서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더 소홀하고 더 무례했다.
마지막 질문은 내년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사실 이 질문은 매년 하면서도 매년 답을 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빠듯한 살림살이와 늘어나는 생활비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직딩의 운명으로 내년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마치 천 원 주면서 새우깡에 소주까지 사와 하며 장난치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느껴져서였다. 수동적인 삶의 사는 자의 비애라고 할까. 무언가 계획하는 것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올 해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새벽 운동을 시작해서인지 무엇이든 까지는 아니어도 작은 일에는 새롭게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에는 돈을 얼마를 더 벌어야지, 얼마를 더 모아야지 하는 물질적 가치를 확대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나 자신과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기로 마음먹었다.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해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글도 목표한 만큼 쓰려고 한다.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사교육에 발품 팔고 아이들이 뒤처지지 않을까 걱정하기보다는 아이들과 양질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한다. 워킹맘이라는 이유로 스스로 변명삼아 놓쳐버린 아이들과의 시간을 조금 더 밀도 있게 보내고 싶다. 그리고 남편을 더 사랑해 주어야지, 존중해 주어야지 매일매일 리마인드 하며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
24년 말에 이 계획들을 어떻게 평가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왠지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그동안은 꾸역꾸역 살아왔던 시간이라면, 이제는 인생을 사랑하는 것들로 차곡차곡 깊게 채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