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결혼과 출산에 대한 이유를 대라 하면, 이박 삼일도 모자랄 판이다. 나름의 이유를 돌고 돌아 서른아홉 출산, 사십 대가 되어서야 육아생활의 막이 올랐다.
육아 그까짓 거,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혹독한 직장생활도 벌써 십 수년을 넘게 버텼는데 아이 하나쯤이야, 세상 사람 다 키우는데 나라고 못할까, 그까짓 거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동안 쉽지 않았던 삶의 굴곡들을 떠올려 보며, 육아쯤이야 라고 생각했다. 니가 힘들어 봤자 얼마나 힘들겠냐는 식이었다. 언젠가 끝나는 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이었나 보다. 육아를 즐겨보겠다는 초보엄마의 삶이 초토화되고 금세 겸손해지게 된 이유는 모두가 그렇듯, 독박육아의 늪이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크지만, 하루 종일 에너지가 철철 넘치는 아이와 붙어 있으니,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보았던 눈은 점점 흐려지고, 나의 고통과 외로움, 남편과의 불평등한 육아환경에만 마음이 쏠리게 되었다.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육아라는 육체적 감정적 노동을 여성에게만 강요하고 떠넘기는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나도 힘없는 피해자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사십 대는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좀 더 여유롭고 어딘가 엘레강스해진 내 모습이었지, 육아스트레스에 찌든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왠지 나만 억울한 심정을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인생에서 이렇게 즐거운 시기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이 시간 또한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힘들긴 하지만,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에 잡생각이 없어지고 나도 어느새 즐겁게 놀이에 빠져 들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아이와 함께하는 단순한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 다시 맛보게 되었다. 숨바꼭질을 하고,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맛있는 것을 먹고 기뻐하고, 물장난을 하고, 놀이터에 나가 그네를 타고, 처음에는 왠지 어색했던 아이와의 놀이에 조금씩 집중하다 보니, 어린아이 시절의 삶을 다시 한번 새롭게 사는 기분이었다.
20대나 30대 초반에 결혼과 출산을 마치고 40대가 되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자녀를 키우고 있는 친구들이 제법 많다. 마치 숙제를 다 끝내고 여유 있게 시간을 즐기는 듯한 그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언제쯤 이 고통의 시간이 지나갈까 머릿속으로 따져보기도 했다. 인생에는 모두 때가 있다고 말하지만 각자의 때는 저마다 다르다. 각자의 인생의 시계는 서로 다른 속도로 느리거나 혹은 빠르게 흘러간다. 내 인생의 시계는 약간 늦은 것 같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잘 보내고자 한다. 당분간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향 좋은 커피와 브런치를 먹으며 어른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은 잠시 포기해야겠지만, 나이가 들었기에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작은 행복들까지도 나는 꼼꼼하게 찾아 따먹을 생각이다.
육아는 언젠가 끝이 난다. 물론 아이가 자람에 따라 다른 방식의 돌봄이 필요하겠지만,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치우고 놀아주고 재우는 손이 많이 가는 일들은 언젠가는 끝이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릴 때가 가장 예쁜 때라고. 처음 걸음마를 시작할 때, 처음 엄마 아빠를 부르기 시작할 때, 처음 유치원에 가기 시작할 때… 어떤 때는 아이가 어서 커서, 육아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다가도, 이 시간이 조금 천천히 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하루 다르게 커가는 아이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내 눈에 오래 담아두고 싶어 진다. 아이는 금방 자라고, 지금 아이가 주는 기쁨도 유한하다. 늦둥이를 보는 부모들은 그렇게 아이를 예뻐한다던데, 늦둥이라서가 아니라 이런 이치를 깨닫게 되어서가 아닐까. 육아의 현실은 너무도 힘들지만, 그로 인해 아이가 주는 기쁨을 놓쳐버리는 실수를 범하고 싶진 않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늦깎이 육알못 초보엄마지만, 젊은 엄마들보다 체력은 부족할지언정, 사랑은 넘치도록 줄 수 있는 마음이 성장한 엄마라는 사실에 스스로의 어깨를 토닥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