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고향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후략)
정지용, <향수>
정지용의 <향수>는 선선한 날씨에도 땀을 줄줄 흘리면서 해가 노랗게 저물어 갈 때까지 친구 서넛과 공을 차며 느릿하게 흘러가던 하루가 떠오르게 합니다. 20년의 시간은 얼룩백이 황소 없이도 그 날 운동장의 정경에 세피아 필터를 끼웁니다. 세월에 빛바랜 사진 같이 물빠진 노란색,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그리움의 몫입니다.
깊은 그리움은 노래가 됩니다. 이동원, 박인수의 가곡 <향수>에서 처럼, 그리움은 속삭이는 듯 하다가도 어느새 큰 울림이, 전설 바다의 금빛 발물결이 됩니다. 가슴은 파도에 덮혀 먹먹해지고, 팔다리는 무게를 더해가고, 감은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눈물로 흐릅니다.
해 저물녘 기우는 석양에 드리운 그림자가 사물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기억이 빚어낸 그리움은 때로 본모습보다 더 큰 향수로 남아 연인을 붙잡고, 재회의 불씨가 되곤 합니다.
정지용 시인이 마주한 고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 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정지용, <고향>
그리던 고향은 아니었습니다. 말라버린 입술에 남은 쓰디쓴 풀피리, 높푸른 하늘처럼 선명한 실재의 모습에 마음은 구름 따라서 머언 항구를 떠돕니다.
시인이 마주한 고향이 그러했듯이, 재회는 때로 빛바랜 사진이 아닌 선명한 현실의 강물을 마주하는 일입니다. 그리움이 빚어낸 그림자가 걷히는 순간, 우리는 마음의 뱃전에 새긴 낡은 칼자국을 좇아서 이미 흘러간 인연의 물길 속을 헤매며 과거의 그 사람만을 찾는 각주구검의 우를 경계해야 합니다. 흘러간 강물처럼, 세월 속에서 그 사람도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했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만남을 위해선, 과거의 상대를 현재에 투영하기 보단, 함께 새로운 오늘을 엮어 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