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덕션이 고장 났다고 퇴사까지 할 일인가
한 달간 요리를 하지 못하면 생기는 일
어느 날 혼자 사는 원룸에 인덕션이 고장 났다. 조리 중 문득 전원이 꺼지더니 이후로는 작동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회사 일로 바쁘다며 A/S는 나중으로 미뤘다. 이땐 몰랐다. 인덕션 고장을 시작으로 일상의 많은 부분도 함께 고장 날 줄은.
곧 인덕션을 고치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한 달을 방치했다. 그 핑계로 한 달간 요리를 하지 않았다. 마트에서는 전자레인지에만 데워도 먹을 수 있는 냉동식품을 주로 샀고, 전부터 냉장고에 있던 김치나 오이소박이, 무말랭이 같은 것만 먹었다. 음식을 새로 만들지 않고 있는 반찬만 꺼내 먹는 식의 식사는 금방 질리고 영양도 불균형했다. 그렇지만 퇴근 후 늦은 시간이나 주말에 집주인과 인덕션 문제로 연락하는 건 너무 귀찮았고, 회사에 가 있는 동안 A/S 기사가 나 없는 원룸에서 이것저것 점검하는 것도 신경 쓰였기에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았다.
사실 나의 올해 최대 취미는 요리였다. 연초에 요리 클래스를 몇 개 수강한 뒤 자신감이 붙어서 매주 카레나 파스타, 순두부찌개 등을 만들어 먹었다. 요리에는 신기한 쾌감이 있었다. 그동안 생각 없이 먹기만 했던 음식들의 조리 과정을 알아가는 것도 재밌고, 간단하더라도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든다는 뿌듯함도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나를 건강하게 먹여 살린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이 있었다. 책임감과 자부심이야 돈을 벌고 일을 하는 것으로도 느낄 수 있긴 했지만, 요리가 주는 기분은 조금 달랐다. 내 몸을 건강한 음식으로 채우며 스스로 돌본다는 점에서 새롭게 '어른'이 된 듯한 묘한 성취감이 있었다.
인덕션이 고장 나고부터는 이 모든 쾌감이 훌쩍 줄었다. 인덕션 하나 고장 났다고 일상까지 고장 날 일인가 싶었지만, 그럴 일이 맞았다. 나는 전에 비해 확실히 조용하고 생기 없었다. 그동안 요리를 통해 얻어왔던 일상의 소소한 재미와 뿌듯함, 책임감, 자부심, 성취감이 지워진 것이다. 뒤늦게 깨달았는데, 나에게 요리는 단순히 음식을 먹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다. 요리는 마음 에너지를 비축시키는 일이었다. 이따금씩 우울과 불안, 무기력에 휩싸여 곤두박질치는 마음이 다시 균형을 잡고 안정될 수 있도록 긍정적인 감정들을 미리 저장해두는 과정이었고 일상을 건강히 유지하기 위한 지지대였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 직장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나는 조직 변화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업무 환경은 자꾸 달라지고, 애를 쓰지만 성과는 불만족스럽고, 그래서 힘이 빠지지만 꾹 참고 계속 애를 쓰는 안타까운 사이클을 반복했다. 일에서 어떠한 의미도 긍지도 느끼지 못했고, 당연히 성취나 성장도 없었다. 난 그저 직장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만 했다. 그러다 인덕션 없는 무미(無味)한 일상과 열정 없는 회사 생활 모두가 에너지를 바닥 쳤을 때쯤, 그 최소한의 노력을 할 힘마저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퇴사를 결정했다.
지금에 와서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인덕션이 고장 나지 않아서 계속 요리를 했다면, 그래서 마음 에너지가 되는 긍정적인 감정을 소소하게라도 꾸준히 느꼈다면 어땠을까? 직장생활을 다시 잘해보려고 힘을 낼 수 있었을까?' 회사는 어차피 언젠가 나와야 했고 마침 그 시기에 인덕션이 고장났을 뿐인 건 알지만, 요리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 지금은 그 시간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인덕션 고장이 일상의 고장으로, 그리고 일상의 고장이 퇴사로까지 확신됐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한 비약일까? 어찌됐건 좀더 활력 있고 의욕 있는 나로 살기 위해서는 요리라는 일상의 루틴을 잘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퇴사를 결정하고 남은 연차를 소진하던 어느 날, 드디어 집주인에게 인덕션 얘기를 했다. 나로서는 집주인이 인덕션 업체에 연락을 하면 며칠 뒤 A/S 기사가 원룸에 방문해 이것저것 많이 뜯어볼 줄 알았는데, 이후의 과정은 의외로 간단했다. 집주인은 업체에 연락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콘센트가 달린 새 인덕션을 건네주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한 달이나 인덕션을 방치하던 과거가 떠올라 조금은 허무했고, 그래서 살짝 헛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이제 나는 퇴사를 했다. 한동안은 커리어도 멈추고 규칙적인 월급도 없다. 그래도 나는 나에게 먹일 음식을 만듦으로써 여전히 스스로를 돌보고 책임질 것이다. 때로는 미래를 알 수 없는 30대 백수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불안하겠지만, 그때마다 요리를 통해 마음을 안정적으로 지키는 힘을 얻어올 것이다. 일, 돈이 아니어도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나를 챙긴다는 그 소박하고도 분명한 사실이 한동안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으며, 백수의 하루는 오늘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