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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r 22. 2021

[뚜벅뚜벅, 다시 제주] 땅 밑에서 바라본 제주

(셋째 날 #01) 비 오는 날 만장굴 걷기

어제 점점 먹구름이 끼더니 역시 셋째 날에는 어김없이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미 충분히 비가 올 걸 예상했기 때문에 우산도 챙겼고 바람막이는 어느 정도 방수가 되는 걸로 준비했다.

바지도 흙탕물이 튀어도 문제없게끔 검은색이고 짭 크록스도 챙겼다.

짭 크록스는 지난 제주 여행 당시 갑자기 비가 많이 오는데 신을 신발이 없어서 하나로 마트에 가 급하게 샀는데 너무 질기고 튼튼해서 진짜 크록스를 살 기회를 안 준다.

어쨌거나 나는 이미 비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했고, 비 오는 날의 코스도 짜둔 상태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첫 번째 목적지인 만장굴로 항했다.




만장굴은 비가 오면 내부에 물이 고이기도 하지만 안을 걷다 보면 비를 맞을 일은 없다.

그래서 비 오는 날 가기에 제격이다.

다만 요즘은 코로나 방역을 위해 하루 600명까지로 입장객을 제한하고 있다.

숙소에서 만장굴까지 30km 정도, 약 한 시간이 걸리고 입장 제한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를 마쳤다.

빨간 버스를 타고 쭈욱 가다가 김녕 환승정류장에서 초록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그런데 환승지 직전에 기사님이 어떤 승객이 벨을 누르자 성을 냈다.

"어디서 내릴 건데요?"

다음 정류장 이름을 말하자 기사님이 왜 이렇게 빨리 누르냐며 방금 전 정차한 정류장에 내린다는 줄 알았다고 언성을 높였다.

이미 출발하고 좀 지나서 눌렀는데 뭐가 문제지?

알 수 없었지만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김녕 환승정류장 전에 벨을 눌렀다.

그러자 다시 호통. 이번에는 더 성이 나셨다.

"어디서 내릴 건데요?"

"김녕 환승정류장이요."

"그럼 안내 방송이 나오고 눌러야지. 이게 마을버스도 아니고 아무 때나 누르면 어떡해요."

아저씨는 점점 언성이 높아져서 계속 다그치기 시작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제주 버스는 서울 버스랑 다른가 보네 하고 생각했다.

"죄송해요. 주의할게요."

다행히 아저씨는 더 이상 화내지 않았다.

환승정류장에 내리고 나서 초록 버스를 타면 가장 좋겠지만 아쉽게도 초록 버스 배차 간격이 만만치 않다. 한 시간, 한 시간 반?

되도록 버스를 타려 노력하지만 모든 배차 시간에 맞춰 일정을 짜기는 쉽지 않다. 거기서 만장굴까지는 5.3km 정도라 택시를 타기로 했다.




동굴에 뭐 볼 게 있나 싶을 수도 있다.

실제로도 동굴에 재미난 오락거리는 없다.

하지만 제주는 지질학적으로 우리나라의 다른 곳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서 그 안을 들여다보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다.

만장굴은 이름처럼 아주 긴 동굴인데,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세계에서 12번째로 긴 용암동굴이라고 한다.

만장굴의 전체 길이는 7.4km, 최대 높이 25m, 최대 폭 약 18m에 달한다.

그중에서 일반 관광객이 둘러볼 수 있는 구간은 1km 남짓으로 내부에 조명을 밝혀두어 어렵지 않게 길을 찾을 수 있다.

다만 곳곳에 불을 밝혀도 어두운데 옛날에는 이렇게 길고 큰 동굴을 어떻게 돌아다녔을까 궁금했다.

옛날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동굴을 탐험하며 이곳에 얽힌 설화들을 풀어내지 않았을까?

깊고 고요한 공간에서 혼자 걸으며 이런저런 상상을 했는데 알고 보니 만장굴이 최초로 발견된 건 1948년 경이라고 한다.

수십만 년 전에 생성되어 근래에서야 사람의 발길이 닿았다니 신비로운 곳이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형태의 동굴생성물을 볼 수 있다.

벽면을 따라 생긴 용암유선, 밧줄 구조, 용암 종유석, 용암발가락.

그중에 거북이처럼 생긴 거북바위는 만장굴에서 가장 유명한 바위라고 한다.

마지막 구간에는 용암석주가 있는데 총 7.6m로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한다.




만장굴을 둘러보고 나오니 여전히 비가 내리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얌전히 매표소 근처에 앉아 있다.

사람 손길이 익숙한 건지, 비를 별로 싫어하지 않는 건지 이런 날씨에 가만히 앉아 있는 고양이가 신기해서 다가갔다.

일견 도도해 보였는데 쓰다듬어주자 고롱고롱 거리며 치댔다.

주변 나무에 스크래치도 하면서 사람들 귀여움을 잔뜩 받는 사랑스러운 고양이를 보자니 김녕 미로공원을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녕 미로공원에는 원래 고양이를 보러 가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갈지 말지 고민하던 차였다.

얘도 비를 별로 안 피하는 것 같은데 지금 가도 고양이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장굴 앞 정원에 활짝 핀 동백꽃과 멋스러운 나무, 화산 생성물을 구경하다 김녕 미로공원으로 향한다.

김녕 미로공원까지 약 1km, 도보로 걸어가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all photos taken with the X10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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