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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와 세리 Mar 30. 2020

이유 없이 다 때려치우고 싶은 기분이 든다.

글쓴이, 세리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불쑥, 아무 일도 없는데도 갑자기, 모든 걸 다 때려치우고 싶고 그만두고 놔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난 꽤 열심히 살고 있다. 타고난 본래의 성격이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름 열심히 살고 있다. 아마 그 시작은 한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인 것 같다.


 몇 년 전 구직활동을 하던 당시 내 스펙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토익 점수는 800점대. 상경계 치고는 높다고 볼 수 없는 그냥 그런 점수. 경력은 있다고 하기도 부끄러운 1년. 1년이라는 경력은 오히려 첫 직장을 견디지 못했다는 낙인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퇴사하자마자 호주 워홀을 다녀왔으니 누가 봐도 도피성이었다. 최악의 스펙은 나이였다. 전공을 살리려고 다시 구직활동을 시작했을 때가 무려 서른이었다. 1년을 채우자마자 달아난 첫 직장에서, 나보고 끈기가 없고 근성이 없다며 어디에 가서도 못 견딜 거라는 얘길 했었는데.. 내가 못 견딜 거라는 것 조차가 과대평가였다. 견딜지 못 견딜지, 나를 증명할 기회를 잡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겨우 구직에 성공한 곳은 모두가 알만한 외국계 기업의 계약직 자리였다. 2년짜리 계약이었으나 1년 후 성과에 따라 상황이 바뀔 수 있는, 이름하야 1+1의 계약 조건이었다.

 첫 해는 적응하느라 바쁘게 보냈다. 일을 잘 해내고 싶은 의욕과 나대는 철부지를 싫어하는 상사들과의 마찰이 잦았다. 성희롱과 조롱을 오고 가는 대화 주제는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다들 왜 그렇게 내 몸무게와 결혼 계획에 관심이 많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적당히 받아주고 넘어갈 넉살도 없는 나는 매일 부딪혔다. 그리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이민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부지런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이민에 필수인 영어 성적을 만들기 위해 매일 영어 공부를 했다. 하루에 짧게는 30분, 길 게는 몇 시간씩 전화로 외국인과 통화를 했다. 일주일에 세 번은 일본어를 배우러 학원에 다녔다. 나처럼 가진 것 없는 사람은 뭐라도 머리에 집어넣어야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영어는 기본이고 제2 외국어도 해야 될 것 같았다. 체력도 필수일 테니 운동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수영장에 가서 한 시간씩 발차기를 했다. 주말에도 영어시험을 대비한 학원에 다니면서 몇 시간 씩 수업을 들었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월세를 내고 학원비를 내고, 온갖 대출금들을 갚고 나면 몇 푼 남지 않았지만 다 투자라고 생각했다.


 노력의 결실도 있었다. 몇 번이나 비싼 응시료를 내긴 했지만 원하던 영어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히라가나 글자 받아쓰기부터 시작했던 일본어는 기본 초급과정을 모두 마쳤고 몇 마디 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영은 어린이 풀장에서 발차기부터 시작했다가 다이빙을 하는 연수반까지 올라갔다.

 종종 직장 동료들이 힘들지 않냐고, 어떻게 매일 학원을 가고 주말에도 공부를 하냐고 묻곤 했다. 몸은 피곤했으나 마음이 편해서 견딜 수 있었다. 내일을 생각하고 미래를 떠올리면 매일 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고만고만한 내 삶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대로일까 봐 늘 불안했다. 그런데 공부를 하는 동안은 그 불안을 잊을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성과도 있었다. 미미하지만 그 변화들이 나의 머리에서 불안을 잊게 해 주었다.





그런데 불현듯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걸까. 유치하고 원초적인 질문이 하루 종일 머리를 헤집고 다니는 그런 날이 있다. 이런 노력들이 뭘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싶다. 옆에서 나를 위해 다정한 말을 해주는 사람도 다 성가시고 멀게만 느껴지는 기분이 든다. 아무리 나를 헤아려주고 배려해주어도 결국은 그들은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게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어차피 이 불안은 영원히 나 혼자만의 몫이라는 생각.


열심히 살아가고는 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열심히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이루는 사람들을 보면 막연히 불안해진다. 내가 하는 일들이 내 삶의 목표가 아닌, 다른 이들의 목표에 비등하게 맞추려는 노력의 일환이기 때문일까. 노력할수록 허무해진다. 그저 피곤하고 지쳐서,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서라고 치부하고 넘기는 날이 벌써 일주일을 넘기고 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책을 펴고 공부를 한다. 편히 누워 쉬는 것도 마음이 불편해서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로 핸드폰으로 현실도피만 하고 있다.


이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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