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하리
열여덟 번의 이사를 했다. 경남의 작은 시와 군 단위를 옮겨 다녔다. 채 1년을 채우지 못했던 적도 있었고, 적응하려고 할쯤 또 이사를 갔다. 어릴 적 기억나는 친구는 딱 두 명인데 한 명은 미현이, 한 명은 지금 같이 글을 쓰는 세리다. 바닷가 마을의 미현이는 양 볼에 주근깨가 있었고 입을 오물거릴 때 햄스터를 닮아보였다. 귀엽고 예쁜 친구라 학교에서 인기도 많았다.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친했던 것은 확실하다. 미현이 집에 놀러가서 미현이 동생이랑 팩 게임도 하고 군것질도 했다. 나는 친구 집에 놀러 갈 수 있으면 친한 거라고 생각한다. 뭐 미현이가 우리 집에 온 적은 없었지만.
바닷가 마을에서 1년 여 시간을 보내고 갑자기 부산으로 왔다. 엄마가 내일 바로 가야하니까 미현이에게 말하고 오라고 했다. ‘미현아 나 전학간다’ 라고 했다. 미현이는 언제 가냐고 물었고, 나는 ‘내일’ 이라고 답했는데 미현이가 울기 시작했다. 우니까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또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몰라서 일단 편지를 쓰겠다고 하고 집으로 왔다. 항상 남아있는 역할은 나였다. 날 떠났다가 돌아왔다가 또 떠나는 것은 엄마와 아빠의 몫이었다. 이런 논리라면 미현이가 우는 것에 대해 더 마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함께 울기보다 외면하고 피해버리는 것이 편했다. 내가 볼 수 있던 건 내 마음이 아니라 어른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걸 배우고 말았다. 나는 누군가의 갑작스런 부재에 울었지만, 나의 부재는 개의치 않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경험은 계속 이어졌고 떠나는 것과 남겨진 것에 대해 무뎌져갔다.
내가 사는 곳과 사람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누군가와 헤어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일을 하거나 연애를 할 때도 그랬다. 일에 적응할 때쯤이 되면 항상 다른 일을 찾아 떠났다.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것도 항상 나였다. 여기서의 삶이 채 익기도 전에 또 다른 열매를 맺어보려 다니던 여정. 그 덕에 영글지 않은 열매는 주렁주렁 달렸지만 수확할 수 있는 것은 없기도 했다. 서른이 넘은 시점에도 풋향이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속도에 맞추지 못했고, 뒤늦게 깨달은 후에도 그 궤도에 오르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