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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와 세리 Mar 12. 2020

성가시게 해서 미안타

글쓴이, 세리


 멀리 타지에서 일하는 엄마가 가족 단톡 방에 카톡을 올렸다. 겸사겸사 볼일을 보러 본가로 가게 되었다. 둘째(아들)의 생일이니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듯 보이는 카톡 메시지.

- 수고했어, 성가시게 해서 미안타.


둘째에게 연락해 무슨 일이냐 물어보니 항공권을 구매하지 못해 공항에서 수차례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일하는 데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이 별 것 아닌 일상적인 대화에도 나는 무거운 것에 짓눌리는 기분이 느껴졌다. 결국 별 다른 얘기도 하지 않고 가족 채팅방을 나와버렸다. 이제껏 내가 엄마에게 저런 인사치레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들 한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자기 손가락을 하나하나 다 깨물어 봤을까.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야 없겠지만, 하나가 죽을 듯이 아프다면 다른 하나는 참을만한 수준은 아닐까. 나는 그럼 몇 번째 손가락이었을까.


-


성인이 된 후 이따금씩 엄마가 내 생일을 기억하고 연락을 하곤 했다. 어느 날은 회사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차에서 엄마의 연락을 받았다. 생일 축하한다고, 미역국은 먹었냐고 묻는 문자에 어쩐 일로 기억했냐고, 고맙다고 답을 보냈다. 거기서 끝냈으면 서로에게 마음의 짐을 남기지 않았을까. 괜히 투정을 부리고 싶었는지 한마디를 더 보탰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말로만 축하하고 선물은 없냐는 문자. 그리고 받은 생각지도 못한 답장.

- 선물은 내가 줄 게 아니라 니가 줘야지, 이렇게 잘 키워줬으니 내가 선물을 받아야지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나와 형제들이 입버릇처럼 읊던 말은,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잘 컸다'였다. 그만큼 집에 아이들만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학교에 도시락을 싸가던 시절에도 내 점심은 잘해야 크림빵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하던 시기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식 셋을 내팽개치고 달아난 아비란 인간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늘 이렇게 혼자 마무리를 지었다. 이런 식으로 위안 삼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잊을만하면 이어지는 '보상'의 요구에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만 18세가 되었을 때, 남들이 대학을 가는 시절에 입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겠다며 무작정 서울로 갔다. 고시원 생활로 시작해 놀이공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돈을 모았다. 시급 3100원을 받으며 때로는 하루 13시간을 구두를 신고 웃어야 하는 생활이었다. 너무 힘든 날은 얼굴에서 경련이 나고 발을 딱딱한 구두에 만신창이가 되어 매일 밤 물집을 터트려줘야 했다. 이런 날들을 버텨내던 중 엄마에게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제 돈을 벌게 되었으니 내 명의로 자신의 차를 뽑아달라는 얘기를 했다. 잘 지내는 척하려고 월급을 많이 받았다고 한 것이 실수였을까. 시급 3100원으로 월 180만 원을 벌었다고 얘기했던 건, 얼마나 힘들게 오래 일하는지를 말하려던 거였는데.

 첫 직장 생활을 하며 타지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본인의 것뿐만 아니라 동생들의 것도 응당 내게 요구하곤 했다. 일 년에 한두 번 남짓 본가를 방문할 때면 '남동생 신발 좀 사줘라', '애들 맛있는 것 좀 사줘라'하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외가 친척들이 모두 모이는 가족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외삼촌과 이모, 숙모까지 모두 가는 자리였지만 어쩐지 엄마는 내게 숙소비를 구하곤 했다. 십시일반 모으는 외할머니의 요양비를 낼 차례가 와도 마찬가지였다. 니가 직장을 다니니 이 정도는 해줘라, 니가 좀 내라.

 이제는 잊을만하면 결혼 계획은 없냐고 묻는다. 내가 결혼하면 보태줄 돈이라도 있냐고 물으면, 펄쩍 뛰면서 무슨 소리냐고, 시집가기 전에 효도하는 뜻으로 자신에게 천만 원을 주고 가라고 한다.

엄마가 당연한 듯 요구하는 금액들은 단 돈 몇만 원에서 몇 천만 원까지 범위도 광활했다. 마치 선심 베풀듯이 그때그때 형편에 맞게 내면 되는 기부금 같았다.


-


 스무 살 때의 나는 내가 그런 돈이 어딨냐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잠들기 전 착한 딸이 되지 못한 죄책감에 악몽에 시달렸다. 서른이 넘은 지금의 나는 돈 얘기만 들어도 악소리를 낸다. 내가 지갑으로 보이냐고, 월세 내면 남는 돈도 없다고, 남들은 시집가면 딸한테 못해줘서 미안해하는데 엄마는 나만 보면 돈 달라는 소리가 나오냐고. 애써 지켜온 나 자신이 무너져 가는 걸 보면서 악소리를 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하는 답은 하나였다.

- 물어도 못 보냐, 왜 화를 내냐.


본인은 물어만 봤을 뿐인데 왜 소리부터 지르냐고 했다. 엄마는 10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고 똑같은 말을 하는데, 그 말을 듣는 나만 악에 받쳐 미친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면 엄마는 '싫으면 말아라'하며 별 꼴 다 본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뜨곤 했다. 그렇게 내가 내는 비명은 아무 곳에도 닿지 못하고 부서지곤 했다.

 몇 번쯤은 효도하는 마음으로 엄마에게 돈을 건네곤 했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200만 원, 할머니 병원비로 30만 원, 친구들과 놀다 오라며 20만 원. 학창 시절 나도 고시공부한다고 돈을 꽤나 까먹었으니 이 정도는 응당 해야 할 본분이라고 느꼈다. 며칠 전까지도 돈을 모아서 엄마의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형제들과 얘기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닿으면 한 번쯤은 고맙다고, 미안했다는 말을 들을 거라 기대했다. 비록 지금은 나에게 큰소리를 치지만, 원래 낯 간지러운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라 그렇겠지. 비록 나에겐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지만, 원래 기죽지 않는 성격이라 그런 것뿐이겠지. 속으로는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을까, 하는 동화 같은 생각을 했다. 한 번도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못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게 내 맘이 편했으니까.


그런 엄마가 남동생에겐 고맙다고 한다. 일하는데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이제껏 몇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던 내게 전화해 돈을 요구해도, 절대 아쉬운 소리를 한 적 없는 사람인데. 별 것 아닌 저 한마디에 내가 지켜온 성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쉽게 나올 말이라면, 왜 나는 여태 들어본 적이 없었을까.


혹시 엄마는 열 손가락을 중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하나 있는 건 아닐까. 다 퍼주고도 더 마음이 가는 손가락이 있고, 자꾸만 더 받고 싶은 손가락이 있는 건 아닐까. 미안하고 고맙게 여기고 있지만 표현을 못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말을 해도 어떤 요구를 해도 전혀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 손가락이 나였던 건 아닐까. 오늘도 답이 없는 질문만 계속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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