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사회교리의 기본 원리 - 보충성의 원리
가톨릭 사회교리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의 4 가지로 요약된다:
l 보충성의 원리
l 연대의 원리
l 공동선의 원리
l 인간 존중의 원리
앞서 살펴본 (사회)회칙에서는 위의 4 가지 주요 원리가 반복되어 언급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가톨릭 사회교리의 기본원리는 보충성의 원리, 연대의 원리 그리고 공동선의 원리이다. 이 원리들은 기본적으로 그 근본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를 담고 있다. 달리 말하면, 3 가지 기본원리는 인간 존엄성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 발표(1986년)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인 “자유의 자각 Liberatis Conscientia”에서 사회교리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www.cbck.or.kr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황청 문헌).
“보충성의 원리와 연대의 원리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토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첫째, 연대의 원리에 따라 인간은 그 형제들과 더불어 모든 차원에서 사회의 공동선에 공헌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리는 온갖 형태의 사회적, 정치적 개인주의에 대하여 반대한다. 둘째, 보충성의 원리에 따라 어떤 국가나 사회도 결코 그 자체로서 개인과 집단이 기능할 수 있는 차원에서, 개인들과 중간 집단의 창의와 책임을 대체할 수 없다. 또한 어떠한 국가나 사회도 개인과 중간 집단의 자유에 필요한 공간을 제거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회교리는 모든 형태의 집단주의에 반대한다. 이 두 가지 원리는 인간 존엄성의 실현을 위한 기본원리이다. 연대의 원리는 정치적 개인주의에 반대하고, 보충성의 원리는 정치적 집단주의에 반대하는 원리로서 사회구조의 상황, 그리고 사회체계가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프랑스 경제학자 미셸 알베르(자본주의 대 자본주의, 1993)에 따르면,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는 정치경제적 자유주의와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로부터 차용한 질서 개념을 결합한 것이라고 한다. 독일의 재통일을 이룬 콜 총리와 메르켈 총리를 배출한 기독교민주연합(CDU)이 가톨릭의 이념을 계승한 정당이고, 뿌리를 더듬어 보면, 이 이념에 따라 1대 총리인 아데나워와 에어하르트 경제장관(2대 총리)에 의해 사회적 시장경제가 전후 독일의 기본 경제정책으로 채택되었다.
독일의 기본법(헌법) 제 1조 제 1항은 이렇다: “인간의 존엄성은 불가침이다. 이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책무이다.” 1950년에 체결된 유럽인권협약의 제 1조도 인권 존중 의무를 체약국에 부과하고 있으며, 유럽연합기본권헌장 제 1조도 “인간의 존엄은 불가침이다. 인간의 존엄은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과 보호는 유럽 각국의 사회가 만든 모든 제도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유럽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유럽에 진출하고자 하는 기업은, 더더욱 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모든 인사제도의 바탕에 이러한 이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데, 우리 기업이 평소에 가진 마인드로 유럽에서 (현지)법인을 운영한다면 필연적으로 낭패를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
연대의 원리와 공동선의 원리는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만, 보충성의 원리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사실 이 두 가지 원리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지만,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생략한다. 다만 연대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운동의 투쟁과 너무 붙어 있어서 자칫 좁게 해석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는 점만 지적해 두고 싶다.
보충성의 원리 The principle of subsidiarity에 대해서는 저 유명한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40 주년 Quadragesimo Anno"을 인용해야 겠다.
“규모가 작은 하위 조직에서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을, 규모가 큰 상위조직이 스스로 침해하는 것은 불의요, 중대한 해악이며, 바른 질서를 교란하는 것이다.”
가톨릭의 사회교리에 따르면, 보충성의 원리는 인간이 만든 모든 조직 안에서 준수해야 할 중대한 원리이다(유럽 각국의 제도는 이를 계승하고 있다).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의 연방정부와 주정부(또는 모든 조직 내에서)는 정확하게 이 원리를 준수하고 있다. 1995년에 본격적으로 시행된 우리나라의 지방자치제도가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여부의 잣대는, 우리의 지방자치제도가 이 보충성의 원리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지방정부의 일은 철저하게 지방정부가 알아서 처리해야 하고, 다만 지방정부 차원에서 행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경우에, 그것도 지방정부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만 중앙정부가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기업 조직처럼 집단(조직)으로 일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보충성의 원리가 필요하다. 개인이 스스로 더 많은 책임을 지도록 유도하려면 항상 보충성의 원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경영사상가 찰스 핸디 Charles Handy는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수평조직 Flat Organization의 비결은 보충성의 원리에 따라 조직을 단순하게 정비하는 것이다. 작업팀 또는 개인이 각자 책임지고 있는 일을 임의대로 처리할 수 있도록 적절한 수단을 확보해 둔 상태에서 중앙은 전체적인 목표를 정할 뿐이고,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할 지는 중앙에서 일일이 규정할 필요 없이, 각 작업팀이 자체적으로 협의해서 정하고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130 여년 전에 프레데릭 테일러가 분리했던 기획(planning)과 실행(doing)이 다시 결합되어야 한다는 반테일러리즘 Anti-Taylorism도 보충성의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고, 2000년 9월 밀레니엄 정상회의 개막 연설에서 “우리가 20세기에서 배운 게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중앙통제체제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던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의 말도 보충성의 원리가 지배적인 조직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기업뿐 아니라, 학교,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보충성의 원리는 시민의식과 공동체에 관련된 모든 개념에도 불가결하게 적용되는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운용원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매일매일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정치, 사회, 노동, 기업, 학교, 가정 등 많은 조직(공동체)들의 곪아 터진 문제들이 비로소 원만히 봉합되고, 해결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라고 믿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대립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모든 조직은 내부의 모순적인 관계로 인해 항상 갈등상태에 빠지게 된다. 원래가 그런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곪아 터져 우리 사회가 나락으로 빠지기 전에, 가톨릭 사회교리의 기본원리, 특히 보충성의 원리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운용원리가 되었으면 한다. 참고로 필자는 천주교인이 아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