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쫌, 지금 생각 중이니 잠깐 기다리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대표님한테 확인 잘하라고 했잖아요!!!”
2019년 10월, 언제나 화창한 인도네시아 발리 뚤람밴 근처 해변, 그러나 그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카랑카랑한 한국어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문장들 역시 발화자와 수신자의 관계를 고려하면 썩 현명하지 못한 톤과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발화자는 마케팅 에이전시 INMD 션 대리였고, 수신자는 아티슨 앤 오션 대표님이었다.
#프로젝트 다이브로이드
2019년 초, 당시 내가 재직 중이던 INMD에 한 회사가 본인들의 제품 영상을 찍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의뢰한 회사는 ‘아티슨 앤 오션’. 이 회사는 ‘다이브로이드’라는, 휴대폰을 넣어 카메라로 사용할 수 있는 스쿠버 다이빙 하우징 제품을 만들고 있었고, ‘다이빙 하우징 제품’의 프로모션 영상을 제작할 수 있는 회사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INMD에서 이전에 삼성 카메라와 제작한 영상을 보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여행+다이빙+영상이라는 내가 좋아하는 삼종 세트를 다 모아 놓은 이 기가 막힌 프로젝트에 나는 속으로 ‘아싸라비야 콜롬비아’를 불렀는데, ‘닭다리 잡고 삐약삐약’까지 부르지 못한 이유는 이 프로젝트의 예산이 프로젝트의 스콥을 고려했을 때 꽤나 아쉬운 금액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회사님에는 미안하지만, 나는 ‘응 난 그냥 월급 받는 회사원이니까’ 모드로 들어갔고, 굉장히 기대되는 마음으로 2019년 10월 6일~18일 총 13일이라는 긴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 발리로 ‘다이빙 출장’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영상을 찍을 줄 아는데 다이빙까지 할 줄 알았던’ 나는 당연히 해당 프로젝트의 영상적 실무를 담당할 적임자로 꼽혔고, 나처럼 물이라면 환장을 하는 우리 그룹장님과 함께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기획과 출장 계획을 짰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10월 6일, 6명의 스텝으로 이루어진 INMD 팀과 아티슨 앤 오션 개발자 1명은 인천공항에서 카메라와 수중 촬영용 쇳덩어리 장비들과 다이브로이드 제품으로 가득 찬 짐덩어리 들을 비행기 배때기에 쑤셔 넣으며 인도네시아 발리를 향해 출발했다. (아티슨 앤 오션 대표님은 일정 때문에 중간에 합류하셨다)
#문제는 (너가 맛이) 간 때문이야
당시 우리 팀은 13일이라는 기간이 전혀 충분치 않은, 정말 물리적으로 달성이 어려워 보이는 어마무시한 양의 영상을 찍었어야 했다. 6명의 인원은 지상 팀/다이빙 팀으로 나눠져 있었고, 지상 팀은 주로 다이브로이드 제품 샷과 핸드폰 앱에 대한 샷들을, 다이빙 팀은 수중 하우징과 다이빙 컴퓨터 다이브로이드 미니의 기능을 보여주는 샷들을 담당했다. 나는 당연히 다이빙 팀 소속이었는데, 다이빙은 할 줄 알지만 수중 영상까지 찍는 기술까진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 팀은 발리 현지에서 살고 있는 스위스인 수중 영상 작가 ‘레미’를 고용했다.
모든 다이브로이드 영상에 대한 기본 기획 및 스크립트를 내가 다 짠 덕분에 나는 부족한 영어실력에도 불구하고 레미와의 메인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해야 했다. 그래도 지상에서의 영어야 어떻게든 하긴 하겠는데, 수중에서 내 요구사항을 전달해야 하는 것은 정말로 고역이었다. 몇 차례의 불협화음+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다이빙 직전 브리핑을 통해 해당 다이빙 회차에서 찍을 내용들을 최대한 논의하고 들어가는 프로세스를 만들긴 했지만,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판타지 세계★’인 영상 촬영, 거기다 바닷속이라는 특수 조건은 촬영 중 온갖 희한하고 신박한 이슈들이 튀어나오기 딱 좋은 무대였다. 그리고 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나는 수중에서 손 짓, 발 짓, 몸으로 그리기, 모래 바닥에 쓰기, 눈동자로 말하기 등등 온갖 비언어적 정보 전달을 정말 창조적으로 수행했고, 덕분에 나는 출장 막판에는 영상 촬영 판타지계의 시스템 관리자가 어디선가 ‘당신은 판토마이머로 전직하셨습니다!’라는 팝업을 띄워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할 정도였다.
아무튼 어찌어찌하여 촬영은 약간의 딜레이와 함께 순조롭게(영상 촬영에서 딜레이는 당연한 일이다) 진행되었으나, 기획 단계에서 간과한 부분이 있었으니 촬영 시작 후 일주일 정도가 지나기 시작하자 나를 포함한 모든 스텝들의 피로도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스케줄은 인간이 짰지만 정작 인간은 그 스케줄을 감당하지 못하는 웃픈 상황이 발생한 것인데, 하루 최소 4번의 다이빙을 위해 새벽 5시 기상이 필요했고, 일몰 이후엔 당일 촬영본 확인 및 명일 계획 미팅 등으로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최소 11시 이후였기에 그러한 체력 고갈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10월 14일 촬영 10일 차, 그날은 스쿠버 다이빙뿐만 아니라 프리 다이빙을 위한 기능까지 갖고 있던 다이브로이드의 프리 다이빙 기능에 대한 촬영일이었다. 때 마침 의사결정의 핵심이신 그룹장님은 중요한 제품샷 감독을 위해 지상 팀으로 가셔야 했고, 몇몇 우리 팀원들은 또 다른 프로젝트를 위해 한국으로 귀국을 했기에 INMD의 다이빙 팀은 달랑 나 하나였다. 더불어 아티슨 앤 오션 팀도 개발자는 다른 일정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대표님만 남아있었으니, 다이빙 팀은 나+대표님+레미로 이뤄진 아주 단출한, 다시 말하면 뭔가를 놓치기 딱 좋은, 아주 적은 인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래는 다이빙 전 브리핑을 하는 동안 다른 팀원들이 장비 점검을 해주기 때문에 나는 그룹장님과 레미와 연출 계획만 세우면 되었지만, 그날은 내가 모든 장비들을 준비하고 점검까지 해야 했고, 더욱이 당시 다이브로이드는 아직 개발 단계였기 때문에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브리핑 와중에도 자꾸만 장비를 점검했고, 장비 점검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입수 시간이 점점 늦어지자 레미는 스위스인이기 이전에 인간답게 짜증을 내며 채근하기 시작했으며, 그러자 그런 나를 안쓰럽게 여긴 대표님이 몇몇 장비를 대신 점검해 주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화근이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지자 다이빙 하우징에 핸드폰을 넣었는지 핸드폰에 다이빙 하우징을 넣었는지,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인 나와 대표님, 레미는 보트에 올라 예정된 프리 다이빙 포인트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현지에서 살고 계신 한국인 프리다이빙 강사님과 또 한 명의 외국인 프리 다이버가 대기 중이었고 우리는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일단 몇몇 장면을 찍고, 다음은 다이브로이드 하우징 안에 들어있는 다이브로이드 앱의 프리 다이빙 모드를 촬영할 차례였다. 해당 장면에서 필요한 하우징을 꺼내서 핸드폰의 앱이 정상 작동하는지 확인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앱 모드가 프리 다이빙 모드가 아닌 스쿠버 다이빙 모드로 되어있던 것이다! 그러나 바다 위에서 하우징을 열어서 세팅을 바꾸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물이 한 두 방울이라도 하우징에 들어가게 되면 외부와 수중의 높은 온도차로 하우징 안에 쉽게 습기가 차게 되고, 그런 하우징으로는 촬영이 불가능했다.(‘방수’ 하우징 안에 습기가 찬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래서 보트에 타기 전 지상에서 깨끗이 마른 손으로 하우징에 물이 단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게 해서 모든 세팅을 마치는 것이 중요했다) 그 실수는 대표님이 날 도와주면서 발생한 것이었는데, 내가 이것저것 장비 체크하고 동시에 브리핑도 진행하느라 정신이 없던 차에 대표님이 “이렇게 (스쿠버 모드로) 세팅해서 하우징 닫으면 되죠?”라는 질문에 어련히 (프리다이빙 모드로) 잘 세팅했겠거니 해서 체크하지 않고 대충 끄덕끄덕했던 것이다.
프리 다이빙 모드에 대한 촬영은 그날 하루로만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시점에 발생한 이슈는 굉장히 크리티컬 했다. 더군다나 그 촬영은 우리끼리만 할 수 있는 게 아닌, 프리 다이버가 꼭 필요했고, 그 프리 다이버는 다른 스케줄로 그날만 촬영이 가능했다. 3년이나 지나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도 다시 생각해 보니 또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그 당시의 나는 오죽했을까? 어쩌면 나는 그때 처음으로 ‘패닉 상태’를 경험해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참고로 두 번째 패닉은 미국 신혼여행 중 잠시 쇼핑몰에 갔다 왔더니 렌터카 뒷유리가 박살 나있고 도둑놈들이 그 안에 있던 내 카메라+노트북+4개월치 여행 사진이 보관된 외장하드를 통째로 들고 나른 것을 발견했을 때였다) 그리고 마침내, 뭔가를 보고 있지만 뭔가를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 패닉의 표면장력 상태의 나에게 대표님이 마지막 물 한 방울을 떨어트리고 말았으니 - “대리님, 이거 어떡하실 거예요? 우리 시간 없잖아요.” 나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아 쫌, 지금 생각 중이니 잠깐 기다리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대표님한테 확인 잘하라고 했잖아요!!!”
비록 대표님이 나보다 꽤 어리긴 했지만, 그는 엄연히 이 프로젝트에 돈을 내고 있는 클라이언트에, 심지어 한 회사의 대표였다. 자신이 일을 의뢰한 곳의 동등한 직급이나 직책도 아닌 듣보 대리의 일갈에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진 그의 혼도 잠시 뚤람벤 산책이나 가버리셨고, 두 코리안의 심상치 않은 코리안을 들은 레미는 본인도 아침에 나를 재촉한 죄를 아는지 침묵을 선택하…진 않고 또 뭐라 뭐라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스위스인은 보통 침착하고, 상대방을 존중하기로 유명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 레미는 분명 스위스인이었는데, 그때 레미는 불 같은 한국인들과 너무 오래 같이 있어 동화가 되었는지 거의 네이티브 부산 싸나이처럼 굴고 있었다.
아무튼 몇 분간 진짜로 맛이 가버렸던 나는 문득 내가 한 실수+빠른 대처를 위해 정신을 차렸고, 다시 지상 베이스캠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지상으로 돌아가는 10분 동안 우리 둘은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했고 레미는 일관성 있게 계속 투덜거렸다. (그가 10일 간 얼마나 체력적으로 힘들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지상 베이스캠프에서 장비 재점검과 10분 전 일어난 유쾌하지 못한 사고에 대해서 약간 정리를 한 우리들은 다시 프리 다이빙 포인트로 향했고, 다행히 시간 내에 계획했던 촬영 분량을 모두 찍을 수 있었다. 그날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나는 다시 한번 해당 사건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드렸고 대표님도 받아들이긴 하셨지만, 남은 출장 기간 동안 속으로 많이 불쾌하셨을 것이다. 이 기회를 빌려 아티슨 앤 오션 대표님께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드립니다.(꾸벅)
아무튼 그런 큰 일(?)을 겪은 것에 비해 다이브로이드 촬영 출장은 꽤나 성공적이었고, 그 결과물도 상당히 괜찮았어서, 아티슨 앤 오션은 당시 준비하고 있던 킥스타터 펀딩을 성공적으로 종료하게 된다. (그러나 몇 달 뒤에 코로나가 터진 건 입틀막…) 다행히 최근 여행 업계가 다시 살아나고 있어 아티슨 앤 오션도 숨통이 트여가는 것 같긴 하다.
#아빠 어디 가? ㅠㅠ
이런 파란만장한 출장을 갔다 올 당시 나는 1년 9개월 된 아기가 있었다. 1년 9개월이면 이제 걷고 뛰고 엄마아빠 블라블라를 하기 시작한 아기인데, 이런 아기를 한국에 두고 아빠의 마음은… 솔직히 홀가분했다!(!!!)
지금의 션은 내 딸아이가 없으면 이 세상 하직하리라 할 사람이지만, 당시의 션은 막 아빠가 된, 당최 아빠라는 게 대체 뭔 지 모르겠는, 그나마 ‘저기 저 기어 다니다 걷기 시작한 친구는 내 딸이구나’, 하고 생각은 할 줄 아는, 머리로만 아빠가 된 사람이었다. 거기에 2년 차 육아의 길은 험하디 험하고 육아 전역의 길은 눈을 감은 것과 비슷한 시계를 보이고 있었기에, 마침 찾아온 몇 년만의 스쿠버 다이빙 기회는 와이프한테는 좀 미안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싸라비야 콜롬비아 닭다리 잡고 삐약삐약!!!’을 백만 번쯤 부를 수 있는 일탈이었다.
그러나 딸아이는 그런 철없는 아빠도 그리워할 줄 아는, 아빠보다 훨씬 사랑을 아는 존재였다. 다이빙 출장보다 더 오래 전인 2018년 겨울, 딸아이가 이제 겨우 돌이 되었을 때, 그때도 나는 다른 촬영으로 잠시 집을 비우고 있었다. 그런데 출장에서 돌아온 후 와이프가 딸아이를 찍은 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는데, “아빠 어디 갔을까? 아빠 보고 싶어?”라고 묻는 엄마의 말에 그 쪼꼬만 한 아기가 뭐를 아는지 모르는지 울먹울먹 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이다.
#YOLO, DDIYS!
임신한 직후부터 아기의 생명을 느낄 수 있는 엄마와는 달리, 몇몇 아빠들은 자신의 자식이 태어나도 이건 대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핏덩이인가,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경험한 엄마들 중에서도 자신의 아기가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다.(만약 이 글을 읽는 엄마들 중 자신이 그러한 부류라면, 그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니 자신을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나 또한 그런 부류였고, 그래서 딸아이가 태어난 후 약 3년 차까지는 마음속 깊이 내 아이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부족한 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닌 축적의 힘은 대단했고, 아기가 지닌 사랑의 힘은 더 대단해서 나는 이 위대한 존재의
러브 어택을 무수히 얻어맞고는 항복을 선언했고, 결국 이 아기의 ‘아빠’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결과는 내가 자식을 갖기 이전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엄청난 행복감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기에 전혀 후회되지 않는 결과이고 말이다.
나는 인생에 있어 이러한 충만함을 딸이라는 존재를 통해 처음 느끼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자녀가 없으면 이 지복을 느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영혼 깊이 무엇인가를 사랑할 때 이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다른 존재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는 더 배우고, 더 성장하고, 더 행복해진다. 그렇기에 나는, 보통 20~30대쯤 받게 되고 느끼게 되는 질문, 그렇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이에 대해 현실적인 대답을 주는– 나의 가슴을 따라갈 것인가, 머리를 따라갈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당신의 가슴을 따라가라!라고 강력하게 말해주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는 우리를 현명함으로 인도하지만, 우리의 가슴은 우리를 영혼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이 세상 모든 ‘머리와 가슴‘ 고민 중인 이들에게 이 말을 남기고 싶다.
You Only Live Once, so Dive Deeply Into Your Soul!
Epilogue - INMD X DIVEROID Project Trip Vid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