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무명 상태도 중독이다

가능성이란 '무서운' 상태

by 하상인

참 부끄럽지만 지금까지 책을 쓰며 진심으로 내 책이 잘 될 거라고 생각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소재나 글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아니며, 그렇다고 무명인 상태가 좋아서 그런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리고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은 태도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기대를 하지 않았다. 왜 이런 마음 상태로 지냈는지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그저 하나 나름대로 계획해 열심히 만들면 거기서 만족했다.


좋은 작품이면 알아서 인기를 끌겠지란 생각 때문이었을까? 나는 나에게 좀 더 솔직해져 보니 그 이유가 가능성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게 편하기 때문이라는 답을 내렸다. 작가로서 가능성이 없다고 평가받는 것보단 '난 언젠간 잘 될 수도 있어'라는 약간의 가능성의 상태로 남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작품을 대중이 볼 수 있도록 내놓았다면 그에 대한 평가, 호불호는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한 일들이 두려웠던 것 같다.


'지금까지 9권이나 썼으면서 문장력이 좋지 않네.'

'그 정도면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나는 평가받아야 할 작품을 내놓으면서 희한하게도 그 평가를 오랜 시간 회피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초고를 쓴 시점에도 종종 나타났다. 난 책을 기획하고 초고를 쓴 후 준비한 책에 대해서도 다소 거침없이 가까운 친구와 이야기하는 편인데, 그런 대화에서도 나는 책이 잘 될 것 같진 않다고 먼저 말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 당연히 앞서 언급한 것처럼 두려웠기 때문이다.


무명이란 뭘까?

아직 유명세를 얻기 전이라는 말로는 불충분하다. 내가 생각할 때 무명이란, 언젠간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할 것 같지만 진지하게 기대하지 않는 상태가 무명이다. 그리고 이런 무명 상태도 중독이다. 중독이라고 할 것까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무명이니까 용서되는 일들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다.


'첫 책이니까 그럴 수 있어.'

'이 정도는 넘어가도 괜찮겠지.'


한 마디로 진짜 프로의 세계에선 절대 통용되지 않을 것들을 '무명이니까 그럴 수 있어.'라며 넘기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글을 쓰는 사람이 진정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절대적이라고 할 순 없겠으나, 글쓰기를 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좋은 작품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프로라고 생각하고 대가를 기대하며 쓰는 게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내가 오랜 시간 갖고 있던 무명이니까 괜찮겠지라는 식의 태도는 평가에서 자유롭다고 하지만 사실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다. 이런 태도에 대해 일침을 가한 좋은 문장이 있다. "웹소설 작가 서바이벌 가이드"(김휘빈 지음)라는 책에 나온 내용이다.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외피적인 태도를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회 수 100만 넘었으면 좋겠다.(하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지 하하)" 같은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작가 A처럼 인기 많았으면 좋겠다', '해외에도 출간됐으면 좋겠다' 같은 소망을 분명 가지고 있으면서 "내 주제에 무슨" 같은 말로 회피하지 말자.


정말 포기했다면 모를까 누가 비웃을까 봐 부끄러워서, 달성하지 못하면 상처받을까 봐 자기 마음을 배신하면서 아닌 척 눈을 돌려 봤자 괴로움이 덜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회피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상처도 더 깊게 받고 길게 간다. 정면으로 대하면 떼어 내기도 쉬운데, 정면으로 마주한 적이 없기 때문에 벗어나거나 떼어 낼 기회도 잡지 못하고 계속 주변을 맴돌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는 것은 이중으로 상처받는 지름길이다." - 웹소설 작가 서바이벌 가이드(김휘빈 지음)


포기한 것도 아니면서 결과에 체념한 듯 보이지만 결국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정면에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애매하게 걸쳐 있는 태도는 김휘빈 저자가 말하듯 스스로를 더 괴롭히는 일이다. 그러니 당당히 쓰고 평가받자. 무명도 중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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