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못러에서 벗어나기
드디어 여름휴가 시즌이 다가왔다. 주 과장에게 올해는 유독 힘든 한 해였다. 왜 이리 바쁜 일이 자꾸 생겨나는 건지, 올해 연차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했다.
이번에 큰맘 먹고 7월 말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초등학생 아이도 지금 방학이고 이때 아니면 가족여행 갈 기회는 없다. 이제 다음 날 휴가 시작이다. 필리핀 보라카이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벌써부터 나른 부르는 것만 같다.
그렇게 주 과장은 일주일 간 휴가를 다녀왔다. 지구상에 천국이 있다면 그런 곳이 아닐까? 평생을 거기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사무실에 복귀했다. 그런데 팀 동료들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내 인사도 건성으로 받고 어떤 직원은 인상까지 찌푸렸다. 이건 뭐지?
잠시 뒤 팀장이 넌지시 주 대리를 자리로 불렀다.
"주 과장 업무 인수인계는 하고 간 거야?"
"네.. 진혁 씨에게 구두로 전달했습니다"
"구두로 했다고? 그것도 아직 들어온 지 6개월 밖에 안된 신입한테? 영업실적 매주마다 시스템에 입력하는 거 그거 진혁 씨가 펑크 낸 거 알아? 지난주에 영업기획팀에서 실적 틀어졌다고 난리였어. 다른 팀원들이 그거 밤늦게까지 자료 찾아서 겨우겨우 다 넣었다고"
아차, 주 과장이 인수인계를 제대로 안 했던 것이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추억 속 보라카이의 에메랄드 바닷물이 붉은 용암으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인수인계는 직장인의 기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고, 내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수인계 때문에 잡음이 발생하는 경우가 참 많은 게 현실이다. 인수인계가 잘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누군가는 그 업무를 해야 하는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그저 내가 휴가 가고 회사를 그만두거나 팀을 옮기는데만 관심이 있고. 내가 떠나면 어떻게 되는지는 관심이 없다. 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일에 너무나 치여 있는 사람이다. 마음은 굴뚝같은데 도저히 정리할 시간이 없다. 엄두를 못 내게 된다. 그러나 이는 핑계일 뿐이다. 인수인계 준비할 시간은 없으면서 휴가 다녀올 시간은 있다는 것이다. 어불성설이다.
팀원들과 소통도 별로 없고, 관계가 소원하다. 이 업무를 누구에게 인수인계 해야 하는지 누구랑 이야기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안다고 해도 별로 알려주고 싶지도 않다. 그 사람과 말하는 게 싫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업무 인수인계는 잘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내가 지금 하는 업무를 어떻게 알려줘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이다. 머릿속에서 업무 프로세스가 정리되지 않은 경우이다. 나도 잘 모르는데 남에게 제대로 알려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냥 어버버 하다가 타이밍도 놓치고 결국 인수인계를 못하게 된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하나의 업무만 쭉 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다양한 업무를 맡게 된다. 이직을 하거나 타 팀으로 가는 경우 필수적으로 업무 인수인계를 하게 된다. 휴가 때도 인수인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인수인계가 부실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참 많이 생긴다. 전임자가 온갖 지뢰를 파묻어 놓고 이직하는 바람에 두고두고 고생하는 동료를 본 적이 있다. 급여 담당자였는데 전임자가 4대 보험 공제비율을 1년 넘게 잘못 입력한 바람에 그거 다 고치느라 죽을 고생 다 하다가 결국 후임자도 견디지 못하고 퇴사해 버렸다. 이러면 지뢰는 제거되지 않은 채 남아 후임자들의 발목을 노리게 된다.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내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팀의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해야만 한다. 인수인계만 잘 되면 상대방은 어떤 업무를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미리 대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인수인계가 잘 되지 않으면 상대방은 아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폭탄을 맞게 된다. 이는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하는 행동이다. 당연히 나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고 만다.
갑자기 떠올리려고 하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큰 단위의 일은 기억이 나지만,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들을 즉시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휴가를 앞두고 있다면 업무 리스트에 따로 칸을 만들어 두고 '인수인계 리스트' 이렇게 제목을 달자. 그리고 인수인계 할 것을 생각날 때마다 적는 것이다.
- 회사 공용계정 내 이메일 확인, 담당자에게 전달
- 8/11 대강당 예약하기
- 8월 첫째 주 서빙로봇 판매실적 영업기획팀에 엑셀 파일로 전달
- 지하 우편함에 가서 부서 우편물 챙겨 오기
- 영업 시스템에 들어가서 서빙로봇 판매실적 입력하기
어려운 일들도 있지만, 작고 소소한 일들도 많다. 평소에 기록하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일들이다. 미리 기록하면 놓치지 않고 관리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다고 해서 상대방도 쉽게 알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한 번도 그 일 안 해본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행길인 사람이 용산역 어떻게 가느냐고 물어볼 때, 앞으로 150미터 쭉 간 뒤에 왼쪽에 보이는 아이파크 몰로 들어가면 된다고 설명한다면 길 제대로 찾아갈 수 있겠는가?
최대한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상세하게 기록하자. 만약에 시스템에 들어가서 업무를 해야 한다면 각 단계 별 화면을 캡처하고 넘버링을 해서 이렇게 하면 된다고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하자.
글로 자세하게 적었다고 상대방이 당연히 쉽게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글로 봤을 때는 이해한 것 같지만, 막상 시스템에 접속하면 잘 안되고 막히는 일이 분명히 생긴다.
자리로 가서 친절하게 알려주자. 직접 접속하게 한 뒤, 프로세스를 하나씩 알려주는 게 제일 좋다. 자기가 직접 해보면서 눈으로 익힌 것은 쉽게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전달하자.
휴가 갈 마음에 들떠서, 다른 회사 이직할 생각에 기뻐서 인수인계를 소홀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수인계는 중요한 업무이다. 대충 해도 되는 그런 시시한 일이 아닌 것이다.
만약 내가 이직한다면 두 번 다시 안 볼 사람인데 뭐 하러 잘해줄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기 쉽다. 껄끄럽게 나간 경우는 한 번 엿 돼 봐라! 생각하고 일부러 인수인계를 엉망으로 하기도 한다.
인수인계 잘했다고 칭찬 듣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엉망으로 하면 두고두고 욕을 먹는다. 인사팀에서 헤드헌터들에게 그 사람 조심하라고 이메일 보내며 해코지하는 것도 종종 보았다. 그렇게 불이익을 당하면 이직도 어렵고 결국 자기 손해다.
해코지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인수인계는 내 기본 도리이기 때문이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만일 인수인계를 받는 입장인데 선임자가 엉망으로 알려준다면 심정이 어떻겠는가? 역지사지의 생각으로 임하자. 사람은 준 만큼 되돌려 받게 된다.
인수인계 잘하시고, 즐거운 휴가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