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는 일 잘하는 방법
황 상무는 자기만의 철학이 확고한 사람이다. 회사는 오전 9시부터 근무 시작이지만, 최소 30분 전에는 사무실 자리에 앉는 것이 기본자세라고 생각한다. 퇴근 시간이 되어도 바로 집에 가는 것은 기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워커홀릭은 그는 회식이 끝나고도 종종 사무실에 복귀해서 보고서를 읽어보는 사람이다.
이러니 밑의 직원들은 죽을 맛이다. 상무가 아침 일찍 와서 집에를 안 가니 다들 따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들 근무 시작시간 최소 30분 전에는 와야 하고, 퇴근 시에도 일일이 보고해야 하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일찍 퇴근하는 직원은 일에 대한 열정이 없어서 저러는 거라고 자기 멋대로 판단하기 일쑤이다.
황 상무는 자기를 여기까지 성장시킨 비결이 일찍 사무실에 와서 늦게 집에 가는 패턴 덕분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이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문제는 이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강요한다는데 있다. 자기랑 다른 사람은 무조건 잘못된 사람, 틀린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황 상무는 꼰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이런 멋진 말을 한 사람이 과연 누구였을까? 바로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이다. 체 게바라를 아는 사람들이 많다. 한 때 그의 평전이 인기를 끌며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공산주의를 꿈꿨던 사람이기에 오랫동안 한국에서는 금기시된 사람이었지만, 냉전이 끝나면서 다시 재조명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흔히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쿠바 혁명을 완수해 내고, 산업부 장관이라는 안락한 삶을 버리고 세계의 오지로 가서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가 일찍 죽은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그는 열정이 있었고 그의 신념을 위해 평생을 살다 갔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숨겨진 이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는 과연 알려진 대로 훌륭한 인물이었을까? 체 게바라처럼 실제 모습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미화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를 겪어본 주변 사람들은 그에 대해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 안하무인에 거만하고 제 멋대로인 사람으로 그를 평가했다. 그의 명성을 듣고 처음에는 그를 흠모했던 사람들도 실망하기 일쑤였다. 과연 그의 어떤 모습이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었을까?
아르헨티나에서 1928년에 태어났던 그는 의사로 일하다가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남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하게 된다. 이때 남아메리카 각지에서 대지주와 군부 정권에 의해 착취당하는 수많은 원주민 소작농들을 보게 된다. 이때 그는 의사가 아니라 혁명가로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멕시코로 도망한 그는 그곳에서 한 변호사를 만나게 된다. 그 변호사 역시 혁명을 꿈꾸던 사람으로 그의 이름은 피델 카스트로였다. 훗날 50년 가까이 쿠바를 통치했던 독재자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서로 뜻이 맞았던 두 사람은 쿠바를 독재에서 구해내기로 마음먹고 마침내 1959년 쿠바 혁명을 통해 친미성향의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내고 카스트로를 리더로 하는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때 게바라의 나이는 불과 31세였다.
그는 쿠바에서 중앙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으로 그의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의사였다.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장관을 하고 있으니 국가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무리한 산업 국유화는 국가 경제에 큰 부담이 되었고 점차 카스트로도 그의 행정능력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 역시 한 곳에 조용히 앉아서 행정을 하는 것이 몸에 잘 맞지 않았다.
그 당시 게바라는 유엔 연설에서 소련의 이중적인 모습을 비판한 바 있다. 공산국가 안에서도 과거 제국주의 열강들처럼 주변국들을 착취하는 나라가 있다고 했는데, 누가 봐도 이건 소련이었다. 당시 소련의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카스트로에게 당장 게바라를 모든 공직에서 해임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소련에 우호적이었던 카스트로는 그를 즉시 해임하였다. 사실 게바라는 자꾸 소련에 의존하려는 카스트로와 자주 견해차를 보여왔었다. 이 기회에 해외로 떠나 다시 그의 이상을 실현해 보기로 결심한다.
그는 아프리카 콩고로 떠났다. 그곳 정글 속으로 들어가 당시 모부투 대통령을 반대하는 반군에 합류하였다. 체 게바라의 명성은 이미 그곳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처음에 반군 구성원들은 그의 합류를 통해 많은 것이 개선되고 반군 내부의 알력 다툼도 줄어들 것으로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실망하게 되었다. 게바라는 오만한 사람이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득했고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해서 미개한 사람들이라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내가 이 사람들을 계몽하고 바꾸어야 한다는 선민의식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념이 머릿속을 지배하다 보니 혁명에 소극적인 사람은 가차 없이 처형해 버렸다. 한 마을 주민들이 몰살당하기도 했고 같은 동지라도 노선이 다르면 죽음을 면치 못했다. 심지어 그는 전투 중 후퇴할 때는 부하들을 외면한 채 혼자서만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기도 하였다.
당연히 반군 내부에서는 게바라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만 갔다. 어디서 이상한 사람이 하나 와서 우리에게 완장질 하느냐는 볼멘소리였다. 점점 그런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더구나 그는 선전 선동은 잘했지만 행정능력은 꽝이었다. 일단 다 뒤집어엎자! 이건 잘했지만, 그 뒤에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신망을 잃어버린 게바라는 콩고를 떠나고 말았다.
게바라의 다음 행선지는 남아메리카의 내륙국 볼리비아였다. 사실 그를 반겨주는 곳은 없었다. 소련과는 이미 원수가 된 지 오래였고 중국은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한 때 동지였던 쿠바의 통치자 카스트로는 게바라와는 관계가 틀어진 상태였다. 고심 끝에 그는 볼리비아로 가서 그곳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공산주의 혁명을 완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볼리비아 농민들은 게바라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원주민이었던 그들은 오랜 기간 백인 지배층에게 착취당한 기억이 있었다. 심지어 혁명가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조차 원주민들은 무식하다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게바라도 역시 백인이었기에 그들은 경계했던 것이다.
역시나 게바라도 그런 사람이었다. 의사 출신에 집안도 부유했고 심지어 쿠바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경험이 있었기에 경력도 화려했다. 그 역시 볼리비아 농민들을 미개하다고 여겼고 계몽이 필요한 존재로 취급했다. 게다가 농민들 대부분은 소작농이 아닌 자경농이 었다. 굳이 혁명 따위는 필요 없었다. 게바라는 애초에 엉뚱한 곳으로 온 것이었다. 혁명에 미온적인 주민들을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면서 그는 한편으로는 볼리비아 정부군과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민들을 선동했다. 물론 둘 다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무기나 병력도 부족했고, 주민들의 지지도 예상보다 훨씬 저조했기 때문이었다.
게바라는 결국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도피하다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살아있으면 어러 모로 골치가 아플 것을 예상했던 볼리비아 정부는 한 폐교에서 비밀리에 그를 처형했다. 이때 게바라의 나이는 39세였다.
그의 독단적인 면에 질려버린 볼리비아 반군 중 일부가 그의 은신처를 밀고했다는 소문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리고 있다.
우리가 영웅으로 생각했던 체 게바라가 그런 면이 있었다니 충격일 것이다. 사실 그는 지나치게 미화된 면이 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분란을 일으켰고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는 자기 방식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온건하게 추진하자는 주변의 의견은 다 개혁에 소극적인 기회주의자들의 변명으로 치부하였다. 그리고 그런 반대 의견이 나오는 것을 그는 참지 못했다. 반드시 힘으로 억눌러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도 그의 큰 패착이었다.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현지 주민들을 그저 무식하고 미개한 족속들이라고 취급한 것이다. 오만한 사람 근처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는다. 곁에 있으면 항상 기분 나쁘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나를 높여주고 아껴주는 사람 곁에 늘 지지자들이 모이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19세기 영국의 거물 정치인을 꼽으라면 글래드스톤과 디즈레일리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당대 최강국으로 만든 주인공들이었다. 사람들은 두 정치인을 이렇게 평가했다.
"글래드스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디즈레일리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당시 많은 정치인들은 디즈레일리를 더 지지했고, 빅토리아 여왕도 글래드스톤보다는 디즈레일리를 더 곁에 두고 싶어 했다고 한다. 사람을 이끄는 것은 단순히 학식과 사회적 조건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존중해 주고 높여주는 겸손함이다. 이걸 놓치면 많은 지식으로 머리통만 커진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게바라는 이 점을 간과했고 그래서 실패했던 것이었다.
직장에서 많은 리더들은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고 싶어 한다. 심한 경우는 와이셔츠 착용 강요 등 복장 통제, 팀원들 출퇴근 시간까지 종이에 일일이 다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전형적인 '마이크로 매니징 (Micro-managing)' 스타일인 것이다.
자신의 성공 방정식을 강요하는 사람들도 있다. 말투부터 보고서 스타일, 회의 때 의사 표시 방법까지 다 자기 방법대로 따라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에 대한 반항으로 간주하고 온갖 인격적인 모독을 서슴지 않는다. 시범 케이스로 만드는 것이다. 내 말을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회의나 식사 자리에 이 사람은 부르지 않는다. 심지어 리더는 아예 이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한다.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고 눈도 안 마주친다. 정보는 이 사람만 쏙 빼고 다른 팀원들끼리만 공유한다. 주변 팀원들에게는 이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하고 조그마한 건수가 있으면 보고하라고 은밀하게 지시를 내린다. 그렇게 직장 내 괴롭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권력만 있으면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자기 주관이 너무 뚜렷하고 외골수에 빠진 사람은 특히 이런 경향이 강하다. 여기에 나르시시스트인 경우는 더욱더 심각해진다. 자기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기에 주변에서 자기를 추종하도록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체 게바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면서 섬뜩함을 느꼈다. 그에게서 '나르시시스트'의 진한 향기가 풍겼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라면 치가 떨릴 정도로 싫어하는 나는 그때부터 체 게바라를 제대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실 체 게바라를 가슴에 꿈을 간직한 채 안락함을 버리고 불편한 생활을 자처했던 혁명가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거기까지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어두운 면도 보아야 한다. 그는 자기 방식만을 강요했다. 그리고 자기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었다. 공산주의 사상을 거부했던 마을 주민들을 몰살시켰다는 소문도 있었고, 심지어 동료라도 자기에게 반기를 드는 경우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지나친 선민의식, 과도한 자의식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그는 현지 주민들을 그저 멍청하고 미개한 족속들로 보았기 때문에, 자기가 나서서 이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에게 매료되었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자 하나둘씩 그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그 대신 적의 숫자는 이에 비례해서 많아졌다.
사실 체 게바라처럼 미화된 인물도 찾기 힘들다. 기본적으로 그는 공산주의자였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얼마나 교묘하게 사람을 현혹시키고 파괴시키는지 북한을 통해 그 실체를 잘 알고 있다. 기본적으로 그들이 하는 말은 전부 다 거짓말이라고 봐도 된다.
게바라는 그런 공산주의자들조차도 질려버릴 정도로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직장에도 이런 리더가 있다면 그냥 떠나야 한다. 이런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풀 한 포기도 남아 있지 않는다. 팀원들은 서로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팽배하죠 있기에 갈등이 좀처럼 봉합되기 힘들다.
체 게바라가 했던 유명한 말을 이렇게 바꿔보고 싶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는 것도 좋지만, 겸손함부터 먼저 배우자. 오만한 리얼리스트는 표리부동한 인간일 뿐이다"